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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 56

우산국을 점령한 이사부 - 맹수로 겁을 주다

이사부異斯夫(혹은 태종苔宗)는 성이 김씨요, 나물왕의 4대손이다. 지도로왕智度路王 때 연해 국경 지역의 지방관이 되었는데, 거居道도의 꾀를 답습하여 마희馬戰로 가야국伽耶을 취하였다. 지증왕 13년 임진(512)에 이사부는 아슬라주阿瑟羅州(강원 강릉시) 군주가 되어 우산국于山國(경북 울릉도)의 병합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나라 사람들이 어리석고 사나워 위력으로 항복 받기는 어려우니 계략으로 복속시킬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나무사자를 많이 만들어 전선에 나누어 싣고, 그 나라 해안에 다다라 거짓으로 말하였다. "너희들이 항복하지 않으면 이 맹수를 풀어 놓아 밟아 죽이겠다." (출처 : Dokdo, the territory of Silla 신라의 땅 독도, 그리고 이사부 장군) 그 사람들이 두..

동아시아 역사 2017.05.27

윤언이가 아깝지 묘청은 아깝지 않다던 단재의 글

고려사 묘청전(妙淸傳)을 보면, 묘청이 일개 서경(西京 : 평양)의 한 중으로서, "평양에 도읍을 옮기고 금국(金國)을 치자."하매, 일시에 군왕 이하 많은 시민의 동지를 얻어서 기세가 혁혁하다가, 마침내 평양에 웅거하여 나라 이름을 대위(大爲)라 하고, 원년 연호를 천개(天開)라 하고, 인종(仁宗)더러 대위국 황제의 자리에 오르라고 협박장 식의 상소를 올렸다. 반대당의 수령인 한낱 유생 김부식이 왕사(王師)로서 와서 문죄(問罪)하니, 묘청이 변변히 싸워보지도 못하고 부하에게 죽었으므로 묘청을 미친 자라고 한 사평(史評)도 있지마는, 당시의 묘청을 그처럼 신앙한 이가 많았음은 무슨 까닭이며, 묘청이 하루아침에 그렇게 패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고려사의 세기(世紀)와 열전(列傳)을 참고하여 보면 태조 왕건..

동아시아 역사 2017.05.27

단재의 만주족, 몽고, 터키에 대한 인식 (조선상고사 4장)

제 4장 사료의 수집과 선택 만일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디서 무엇으로 어떻게 우리의 역사를 연구하여야 하겠느냐 하면, 그 대답이 매우 곤란하나, 우선 나의 경과부터 말하고자 한다. 이제부터 16년 전에 국치(國恥 : 국권침탈, 을사늑약을 말함)에 분발하여 비로소 동국통감(東國通鑑)을 읽으면서 사평체(史評體)에 가까운 독사신론(讀史新論)을 지어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지상에 발표하고, 이어서 수십 학생들의 청구 때문에 지나식(支那式)의 연의(連義)를 본받은 역사도 아니고 소설도 아닌 대동사천년사(大東史千年史)란 것을 짓다가, 두 가지 다 사고로 인하여 중지하고 말았었다. 그 논평의 독단(獨斷)임과 행동의 대담 하였음을 지금까지 스스로 부끄러워하거니와, 그 이후 얼마만큼 분발하여 힘쓴 적도 없지 아니하나..

동아시아 역사 2017.05.26

가야인의 일본열도 이주, 가야와 일본의 교류

가야인의 일본열도 이주 4세기 말 고구려군이 가야까지 침공하였을 때와 6세기 중엽 가야가 신라에 멸망하였을 때, 많은 가야인이 일본열도로 이주하였다. 이주지역은 주로 규슈 북부였으며, 이후 세토우치 지역을 거쳐 점차 기나이畿内 지역과 도호쿠東北 지역으로도 이주하였다. 이들은 대게 농기구, 무기, 말갖춤 등을 만드는 야철, 제련기술, 농경기술, 직조기술, 스에키 토기를 만드는 기술 등 선진 기술이 있어 일본내 수공업집단에 편입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중에는 오사카 남부의 가와치씨河内氏나 오카야마현 서부 및 히로시마현広島市 동부의 기비씨吉備氏 등과 같이 왕권이나 정치권력과 결합해 외교관으로 활약한 집단도 있었다. 일본에서 전해져온 지명 가운데 효고 일대 하리마播磨 지역의 아야베노사토漢部里는 아야히토漢人 곧 ..

동아시아 역사 2017.05.26

단기고사 5세 단군 구을 기록 - 천문학자 황포덕

제5세 구을(丘乙) 16년간 재위 첫해에 맏아들 달문(達門)을 태자로 삼고, 아우 삼인(三人)을 번왕(藩王)에 봉하였다. 2년 여름에 밭과 들에 황충(蝗虫, 메뚜기)이 크게 번져, 임금께서 친히 밭과 들에 나가 황충 한 마리를 삼키시고, 하느님께 황충을 멸하여 주기를 아뢰니, 며칠 만에 황충이 다 없어졌다. 4년 봄에 하(夏) 나라 사절이 왔다. 유웅(有應)씨가 무도(無道)하여 소나벌(蘇奈伐)을 보내어 토벌하여 평정하였다. 5년 봄에 하(夏) 나라 학사 두 사람이 역서(曆書)와 두건갑자기(斗健甲子記)를 가지고 조정에 들어왔다. 8년 여름에 신독(身毒, 인도?) 나라 사람이 표류하여 동해빈(東海濱)에 닿았다. 9년 가을에 접빈관(接賓館)을 동문밖에 지었다. 10년에 모든 곡식이 혼작이 들어 큰 창고에 쌓아..

동아시아 역사 2017.05.26

삼조선의 영토와 명칭 유래 - 조선상고사

삼조선 명칭의 유래 종래의 각 역사책에 삼조선 분립의 사실이 빠졌을 뿐 아니라, 삼조선이라는 명사까지도 단군ㆍ기자ㆍ위만의 세 왕조라고 억지 해석을 하였다. 삼조선은 신ㆍ불ㆍ만 삼한의 분립을 말한 것이니, ‘신한’은 대왕(大王)이요, 불ㆍ말 두 한은 부왕(副王)이다. 삼한이 삼경(三京)에 나뉘어 있어 조선을 통치하였음은 이미 제1편에서 말하였거니와, 삼조선은 곧 삼한이 분립한 뒤에 서로 구별하기 위하여 신한이 통치하는 곳은 신조선이라 하고, 말한이 통치하는 곳은 말조선이라 하고, 불한이 통치하는 곳은 불조선이라 하였다. 신ㆍ말ㆍ불 삼한은 이두문으로 진한(辰韓)ㆍ변한(弁韓)이라 기록된 것이고, 신ㆍ말ㆍ불 삼조선은 이두문으로 진(眞)ㆍ막(莫)ㆍ번(番) 삼조선이라 기록된 것이다. 똑같은 신ㆍ말ㆍ불의 음역(音譯)..

동아시아 역사 2017.05.26

성충이 이끌어낸 백제와 고구려 동맹-조선상고사

고구려ㆍ백제 동맹의 성립 의자왕이 대야주 40여 성을 차지한 지 오래지 않아서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죽이고 고구려의 정권을 잡았다. 의자왕의 성충(成忠)에게 물었다. "연개소문이 남의 신하로서 임금을 죽였는데 고구려 전국이 두려워서 그 죄를 묻는 자가 없는 것은 무슨 까닭이오?" "고구려가 서국(西國 : 지나를 가리킴)과 전쟁을 한 지 여러 백 년 만에 처음에는 여러 번 서국에게 패하다가 근세에 이르러 날로 강대해져서 요동을 차지하여 그 세력이 요서에까지 미치고 물에서만 마음대로 돌아다닐 뿐 아니라 바다에까지 드나들어 영양왕 때에는 세 번이나 백만의 수나라 군사를 격파하여 나라의 위엄이 크게 떨쳐서 고구려의 군사와 백성들이 서국과 맞서려는 기염(氣焰)이 하늘을 찌르려 하는 판인데 건무(建武 : 영류왕)가 ..

동아시아 역사 2017.05.25

유득공 발해고 서문 - 고려가 기록하지 않은 발해사

고려는 발해사를 이루지 않았는데, 고려가 이를 알면서도 떨치지 않은 것이다. 옛날에 고씨가 북쪽에 거하여 고구려라 하였고, 부여씨가 서남에 거하여 백제라 하고, 박, 석, 김씨가 동남에 거하여 신라라 하니 이것이 삼국이다. 마땅히 삼국사가 있는 것이니, 고려가 이를 이루었다. 부여씨가 망하고 고씨가 망하고 김씨가 그 남쪽에 있고, 대씨가 그 북쪽에 있으니 발해라 한다. 이에 남북국이라 일컬으니 마땅히 남북국사가 있어야 하는데, 고려가 아직 이를 이루지 않았다. 대씨는 누구인가? 바로 고구려인이다. 그 있던 곳은 어디인가? 바로 고구려땅이다. 동쪽에도 나타나고, 서쪽에도 나타나고, 북쪽에도 나타나니, 큰 귀와 같은 형상이다. 김씨가 망하고 대씨가 망하여, 왕씨가 이를 통합하니, 고려라 하였다. 그 남쪽에 ..

동아시아 역사 2017.05.25

북송 말기 고려와 요나라의 상황 (관계)

정삭 正朔 정삭正朔 본래 정월正月과 삭일朔日을 의미하는 말이었으나 그것으로 책력을 뜻하게 되었고, 나아가 고대 중국에서는 제왕이 창업하면 어느 달을 정월로 하느냐를 결정하는 세수歲首의 개정이 있었고, 그것에 따라 신력新曆를 반포하여 국민은 그것을 지켜 제반사를 집행했다. 그래서 봉정삭奉正朔, 즉 정삭을 받든다고 하는 것은 곧 신복臣服함을 의미하게 되었다. 그리고 매년 원단에는 신력을 반포하고 복속 국가에서는 사신을 보내어 그것을 받아오는 것으로 신복함을 표시하였다. 고려는 당시 북송의 정삭을 받들지 않고 있었다. 당唐 유인궤劉仁軌(당고종唐高宗 때 삼한 공략에 전과를 올렸고, 그가 처음 말한 대로, 고종이 태산을 봉할 때 삼한과 일본의 대표자들을 이끌고 참여하였다. 후에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로 지정사知政事에..

동아시아 역사 2017.05.24

금의 해릉왕 - 그 인물과 행적

금의 제4대 황제는 통상 해릉왕海陵王이라 불린다. 태조의 서장자庶長子 완안종간完顔宗幹의 차자로, 본명은 테크나이, 중국명으로는 량亮이라 한다. 그에게는 천덕天德 정원貞元 정륭正隆의 3원호元號가 있고, 13년의 치세(1149-61)를 가진 황제이면서도 묘호(사후 종묘에 제사 지내질 때 그 종묘 내의 위치를 취해 故황제의 칭호에 사용한다)가 칭해지지 않음은 왜일까. (출처 : 天津的一篇高分的高考作文,批判狭隘汉民族主义思维) 궁정 내에서는 임금을 죽이고 모후를 죽여, 규문이 안정되지 않았고, 밖으로는 가혹한 형벌로써 무고한 자를 살해하고, 까닭 없이 맹약을 깨고, 명분 없이 군사를 일으켜 국력을 소모하는 등의 잘못을 지적받아서 사후에도 종묘(종묘에 제사 지내지는 것은 황제의 특권)에 제사 지내지지 않은 채 단순..

동아시아 역사 2017.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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