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11

조선 정조가 아끼던 번암 채제공 유물들 (수원화성박물관)

조선 정조가 아끼던 번암 채제공 유물들 (수원화성박물관) ※ 이 포스트에서 수원화성박물관에서 찍은 사진과 소개글을 정리합니다. 번암집 어정범례樊巖集御定凡例정조가 채제공의 문집인 번암집 원고의 편차를 정해 준 어정범례이다. 1799년(정조 24) 1월에 채제공이 세상을 떠나자 그해 가을에 문인門人인 정약용丁若鏞과 이가환李家煥 등이 유고를 교정하였다. 이듬해 정조는 번암집 편집과 관행에 큰 관심을 갖고 유고를 여러 차례 살펴보고 직접 문집의 범례凡例를 지어 주며 문집을 편집하는 기준으로 삼게 하였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임금이 신하의 문집에 범례를 제정해 준 것은 매우 드문 일로 채제공에 대한 정조의 높은 관심과 애정을 느낄 수 있다. 수원유수에게 장용외사를 겸하라는 전령정조는 1789년(정조 13) 사도세자..

동아시아 역사 2017.11.03

수원의 조선 시대 시전과 둔전 (정조의 농업, 상업 정책, 수원화성박물관)

수원의 조선 시대 시전과 둔전 (정조의 농업, 상업 정책, 수원화성박물관) 농업개혁의 산실, 수원 정조는 신도시 수원을 자급적인 도시로 만들기 위하여 농업과 상업 생산기반 시설(둔전과 시전)을 마련하였다. 화성 일대에 만석거를 비롯한 저수지와 국영농장인 둔전이 바로 그것이다. 정조는 신도시 수원을 건설하면서 화성 일대에 만석거를 비롯한 저수지와 국영 농장인 둔전을 만들어 안정적인 농업기반을 확보하였다. 그리고 토지 없는 백성들은 둔전을 경작하여 경제적 안정을 추구하게 하는 한편, 이들이 수확한 양곡으로 화성에 주둔한 장용외영 군사들의 군량미와 급여를 확보하게 하였다. 또한, 저수지와 수차를 이용한 농법 개발과 이앙법의 대대적인 실시로 생산량을 크게 향상해 수원을 농업과 상업(둔전과 시전)의 선진 도시로 ..

동아시아 역사 2017.10.27

조선 정조 대왕 화성행궁, 조심태에게 보낸 어찰첩 (수원화성박물관)

조선 정조 대왕 화성행궁, 조심태에게 보낸 어찰첩 (수원화성박물관) 조선 정조 대왕 화성행궁화성행궁은 1789년(정조 13) 수원 신읍치 건설 후 팔달산 동쪽 기슭에 건립되었다. 정조 대왕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현륭원으로 이장하면서 수원 신도시를 건설하고 성곽을 축조했으며 1790년에서 1795년에 이르기까지 서울에서 수원에 이르는 중요 경유지에 과천행궁, 안양행궁, 사근행궁, 시흥행궁, 안산행궁, 화성행궁 등을 설치하였다. 그중에서도 화성행궁은 규모나 기능 면에서 단연 으뜸으로 뽑히는 대표적인 행궁이라 할 수 있다. 화성행궁은 평상시에는 조선 정조가 수원부 유수留守가 집무하는 관아로도 활용하였다. 정조는 1789년 10월에 이루어진 현륭원 천봉 이후 이듬해 2월부터 1800년(정조 24) 1월까지..

동아시아 역사 2017.10.26

수원 화성성역의궤와 수원 출신 김후 (수원화성박물관)

수원 화성성역의궤와 수원 출신 김후 (수원화성박물관) 김후 초상김후金㷞(1751~1805)의 본관은 해풍海豊이고 자는 광중光仲이며 증호조참판贈戶曹參判 김상걸金相傑(1727~1798)의 아들이다. 1771년(영조 47) 정시 무과에 급제 후 출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1790년(정조 14) 수원중군에 제수되었고, 1791년 당시 수원부 읍치邑治의 외곽을 호위하던 독성산성禿城山城의 중군을 역임하였다. 1793년에는 경기중군이 되어 경기지역의 모든 군사업무를 실질적으로 통솔하게 되는데, 수원 화성 축성(화성성역의궤를 만든 이유)이 시작되기 딱 1년 전이었다. 정조가 의도적으로 수원 토박이 무반 가문 출신의 김후를 중용하였다. 1794년 2월 화성성역 별감동別監蕫이 되어 화홍문, 방화수류정 등 시설물의 현장감독..

동아시아 역사 2017.10.23

정조 수원화성과 사도세자, 현륭원과 사도세자 유품들 (장헌세자)

정조 수원화성과 사도세자, 현륭원과 사도세자 유품들 (장헌세자) 정조가 공을 들여 조성한 수원화성 인근엔 사도세자의 흔적이 많습니다. 자연스레 만들어지진 않고 아들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를 그리워하여 인위적으로 조성한 것인데요. 대표적으로 현륭원과 용주사가 있습니다. 용주사엔 불설대보부모은중경이 있는데, 여기엔 부모와 자식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차있죠. 이제 소개할 아래 사진들은 수원화성박물관에서 직접 찍었습니다. 재밌게 봐주세요~ 조선 후기 문화의 황금기 영조 - 장조(사도세자) - 정조의 시대 조선 후기 르네상스라 불리는 영조-장조(사도세자)-정조의 시대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가 모두 안정되고 크게 발전하여, 마치 청淸의 황금기라 불리는 강희제-옹정제-건륭제의 시대와 비견할 만하다. 정조는 왕위에..

동아시아 역사 2017.10.18

[수원화성박물관] 조선 임금 영조와 정조 어필 (홍재전서, 탕평비 등)

[수원화성박물관] 조선 임금 정조와 영조 어필 홍재전서弘齋全書 조선 임금 정조의 시문, 윤음, 교지 및 편저를 모은 전집으로 총 184권 100책이다. 1799년(정조 23) 편집하기 시작하여 총 190편으로 정리하였으며, 정조 사후 말년의 저술들을 덧붙여 1801년(순조 원년)에 재편집하고 1814년(순조 14)에 간행되었다. 춘저록春邸錄이라는 표제 아래 세손 시절의 시문 정리를 시작으로 조선 임금 정조 자신의 글뿐만 아니라 신하들과의 응답 내용, 해당 관서의 기록에 대한 국왕의 최종 판결, 정조 재위 기간에 편찬된 서적의 해제解題 등 다양한 내용의 글이 포함되어 있다. 탕평비蕩平碑1742년(영조 18) 영조가 탕평책을 널리 알리고 편당을 막고자 성균관 입구 반수교 옆에 세운 비석이다. 앞면에 예기禮記..

동아시아 역사 2017.10.17

조선 임금 정조 황금갑옷, 국화 그림, 팔가백선, 정조 어필 비망기 (수원화성박물관)

조선 임금 정조 황금갑옷, 국화 그림, 팔가백선, 정조 어필 비망기 (수원화성박물관) 조선 임금 제22대 정조 조선 후기 문예 군주이자 개혁 군주로 규장각을 설치하여 학문을 발전시키고 장용영을 창설하여 왕권을 강화하였으며 탕평 정책을 추진하여 정국을 안정시켰다. 정조는 신분과 관계없이 뛰어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차별받던 서얼들을 등용하고 가난하고 소외된 백성들을 위한 정책을 펼쳤다. 더불어 국가 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한 다양한 개혁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조선 임금 정조는 오늘날 조선 시대 세종과 더불어 성군으로 추앙받고 있다. 특히 정조는 수원화성 축성과 신도시 수원 건설을 통하여 오늘날 수원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정조正祖 (1752~1800) 이름은 성祘 (규장전운奎章全韻에서 '성'으로 발음),..

동아시아 역사 2017.10.15

동방의 자취를 오늘날에 증명할 수 있겠는가? (정조의 물음)

금대전책 지리책 - 정조의 물음 우리 동방으로 말한다면, 한쪽은 대륙과 연접되어 있고, 삼면은 바다로 막혀 있다. 조선朝鮮이라는 호칭은 멀리 단군檀君 시대 때부터 있었고, 숙신肅愼의 명命이라는 말이 주周나라의 역사에 실려 있다. 한漢 나라 무제武帝는 사군四郡으로 나누어 설치하고, 당唐나라 고종 高宗은 구부九府를 예전 그대로 설치하였다. 구부九府 - 당나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고구려 지역에 설치한 아홉 도독부都督府를 말한다. 당나라가 668년(보장왕 27)에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고구려의 옛 땅을 신성新城, 요성遼城, 가물哥勿, 위락衛樂, 사리利, 거소居素, 월희越喜, 거조去朝, 건안建安의 아홉 도독부로 나누고,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 都護府를 두어 이들을 관장하여 통치하게 하다. 그 지역과 그 자취에 대..

동아시아 역사 2017.07.28

소하가 미앙궁을 크게 지은 데 대한 논 - 이가환이 정조에게

신은 삼가 논합니다. 거룩하고 밝은 임금과 충성스럽고 어진 신하가 함께 나라의 계책을 토론하는 경우에는, 그 염려가 항상 깊고도 멀어서 다른 사람에게 고해주지 않습니다. 이는 고해주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라, 형세상 고해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 한고조漢高祖는 규모規模가 굉하여서 천지天地를 쳐들 만 한 도량이 있었습니다. 미천한 신분으로 있을 때부터 이미 두루 보고서 탄식한 일이 있었습니다. (한 고조가 일찍이 함양咸陽을 두루 둘러보다가 진 황제秦皇帝를 보고는 위연히 탄식하기를, "아, 장부라면 마땅히 저와 같아야 한다"고 하다. 史記 卷8 高祖本紀) 그러다가 함곡관函谷關 안으로 들어가서 아방궁阿房宮을 보면서는 마치 본디부터 익숙하게 봐왔던 것처럼 여겼습니다. 이것은 구구한 것들을 보고서는 마음이 동..

동아시아 역사 2017.07.06

역사 초고를 보려했던 이성계 [당태종도 했잖아? 괜찮지?]

임금이 당태종의 전례를 따라서 왕위에 오른 이후의 역사 초고를 보자고 하였다. 대신이 안 된다고 글을 올렸으며 대간도 또 글을 올려 말하였다. 임금이 승인하였다.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제7권 재위 4년 되는 해인 1395년 6월 신미일에 태조는 역사 초고를 보자고 하였지만, 거부 당한다. 절대권력자인 왕이나 황제도 역사 초고를 보는 것은 절대로 금기시되며 사관들도 목숨을 걸고 거부하는 게 일반적이며 조정 대신들도 무조건 안 된다고 말리게 마련이며 대게 이를 따른다. (출처 : 다음 블로그) 하지만 허구와 눈덩이 속에 감춰져서 성군으로 추앙 받는 당태종은 마치 자신만의 특권인 양 역사 속에서 유일하게 역사 초고를 보고 자기 마음대로 바꾼 괘씸하며 매우 거만한 황제였다. 정관정요 속에 파묻힌 그의 행적은 한..

동아시아 역사 2017.04.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