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4 27

강대한 흉노를 달래던 전한의 효문제 2

출처 - 초한지와 삼국지를 이어주는 전한, 후한지, 장개충 효문제 시기, 공주를 흉노 땅에 호송하는 자로 환관 중항렬中行說에게 명령했다. 그런데 그는 먼 길을 떠나려 하지 않았기에 구실을 대어 거절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효문제는 그가 연나라 사람으로 북방에서 자랐기에 흉노의 형편을 잘 알고 있을 것으로 생각한 나머지 다른 사람을 보내지 않고 굳이 그에게 가라고 명하였다. 마침내 거절할 수 없었던 그는 길을 떠날 때, 이런 말을 한다. "조정에는 흉노에 갈 사람이 그렇게 없단 말인가? 꼭 나에게 가라고 하니 가긴 하겠지만 내가 장차 오랑캐를 도와서 한나라를 해치는 일이 있어도 탓하지 마시오!" 그 말을 들은 모두는 그가 일시적인 화를 못 이겨 한 말이라고 생각하였고, 한낱 환관인 주제에 무슨 힘이 있어서 ..

동아시아 역사 2017.04.30

강대한 흉노를 달래던 전한의 효문제 1

출처 - 초한지와 삼국지를 이어주는 전한, 후한지, 장개충 흉노를 달래는 효문제 하, 은, 주 3대 이래로 중국에서는 언제나 흉노족이 환난과 재해의 근원이었다. 한나라 황실에서는 그들 강약의 시기를 알아채고 군비를 갖추어 그들을 정벌하고자 했다. 흉노족은 대체로 북쪽의 미개척지대에서 목축하며 이리저리 이동하며 살았다. 특히 천고마비, 가을철에 말이 살찌면 한바탕 약탈하여 풍성한 겨울을 지내곤 하였다. 그들의 가축에는 말, 소, 양이 많았고, 물과 풀을 따라 이동해가며 살아야 했기 때문에 성곽이나 일정한 주거지가 있을 수가 없었고, 더구나 농사도 짓지 않았으므로 나누어 가질 땅도 없었다. 그들의 일반적인 풍습은 평화 시에는 목축에 종사하는 한편 야생동물을 사냥하는 것으로 생계를 세웠고, 전쟁이 일어나면 남..

동아시아 역사 2017.04.30

고려의 도교와 도사에 대해

도교 道敎 고려는 땅이 동해에 접해 있어서 틀림없이 도산道山, 선도仙島와는 상거가 멀지 않을 것이다. 그 백성들이 장생불사하는 가르침을 사모할 줄 몰랐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나, 다만 중원中原에서는 앞서 대부분 정토征討를 일삼고 청정무위淸淨無爲의 도로 교화시킨 자가 없었다. 당실唐祚이 일어나는 혼원시조混元始祖를 섬겼다. 그래서 무덕武德(당 고조의 연호 618∼626) 연간에 고려(고구려를 말함)에서 사신을 보내어, 도사가 그곳에 가서 오천언五千言(노자의 도덕경을 말함)을 강론하여 현미玄微(심오한 이치)를 풀이해 주기를 간청하였다(이 일은 고구려 영류왕榮留王 7∼8 양년 624∼625에 걸쳐 있었던 일로 전해진다. 三國遺事 寶藏泰老 三國史記 榮留王本記). 고조高祖(당 고조를 말함 618∼626) 재위는 성군..

동아시아 역사 2017.04.29

카이두의 난, 대제국 분열의 고착화

젊은 카이두의 대두 카이두(海都)는 태종 오고타이칸의 다섯 번째 아들 카시(合失)의 아들이다. 따라서 바투를 비롯해서 구육이나 몽케, 거기에 쿠빌라이라고 하는 칸(汗)位 쟁탈의 중추적 인물이 모두 칭기즈 칸의 손자에 해당하는 것에 반해서 카이두는 한 세대 젊은 층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분쟁 당시의 그는 아직 약관으로 新칸(汗)에게 반항할만한 역량은 도저히 갖고 있지 않았다. 몽케칸이 태종의 여러 자손 중에서 그를 선발해서 그들의 칸(汗)국의 일부를 나누어 준 그 시점에서는 확실히 타당한 조치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카이두도 오고타이家의 일원인 이상 희종 시대憲宗朝가 되어 갑자기 세력이 약해진 가문이 된 비운에 대해서는 마음속으로 불만을 품지 않았을 리는 없다. 카이두에게 할당된(所領) 카야..

동아시아 역사 2017.04.28

삼고초려의 구체적 내용 (삼국지 연의의 내용 정리)

출처 -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삼국지의 영웅호걸, 이우각 삼고초려의 구체적 내용 제갈량을 알게 된 배경 1. 양양성 풍년 잔치에서 유표의 처남 채모의 암살음모를 피해 도주하다가 남장에서 한 목동을 만난 유비 - 소년은 제 스승이라며 수경 선생 사마휘에게 안내 - 사마휘는 '경륜지사經綸之士가 필요하다며 와룡과 봉추 중 하나만 잡아도 천하를 바로 잡을 수 있다'고 선문답처럼 암시 2. 유표는 장남 유기를 보내 채모의 암살 음모를 사죄 - 유기를 전송하고 오다가 단복單福을 만나 군사로 기용 (출처 : 古代竟用与美女同床惩罚男人) 3. 조조의 사주를 받은 정욱이 서서 노모의 편지인 것처럼 위장하여 서서를 허도로 부름 - 정욱은 서서를 '천하의 재사材士'로 조조에게 설명 - 유비의 은혜를 갚기 위해 서서는 제갈량의..

동아시아 역사 2017.04.25

고려도경에 적힌 고려 왕계 (이름은 오기라 쳐도 역사 흐름은 사실)

왕씨의 선조는 대개 고려의 큰 씨족이다. 고씨高氏의 정사가 쇠퇴하게 되매, 나라 사람들이 왕건을 어질게 여겨 드디어 군장君長으로 세웠다. 후당後唐 장흥長興 3년에 마침내 스스로 권지국사權知國事라 칭하고 명종明宗에게 봉작封爵하여 주기를 청하니, 곧 왕건에게 원도주도독都督을 제수除授하고 대의군사大義軍使에 충임充任하여 고려의 왕으로 봉하였다. 진晉나라 개운開運2년에 왕건이 죽고 아들 무武(2대 혜종)가 즉위하였으며, 한漢 나라 건우乾 말년에 무가 죽고 아들 소昭(4대 광종은 아들이 아니라 이복 동생)가 즉위하였다. 황조皇朝 건륭建隆 3년에 태조 황제太祖皇帝가 등극登極하여 만국萬國을 다 차지하매 소昭가 사신을 보내어 조회하러 왔으므로, 공신功臣의 호號를 내리고 이어 식읍食邑(국가에서 종실宗室과 공신에게 내려주어..

동아시아 역사 2017.04.24

한나라 유협 곽해가 민심을 얻은 배경

출처 - 한 권으로 읽는 중국 고전, 이우각, 동양고전연구모임 의협심이 많은 협객의 민심 끌기 사기에는 유협열전游俠列傳이라는 부분이 있다. 당시를 대표하는 유협, 즉 협객들의 언동이 기록되어 있는 부분이다. 원래 정사에는 여러 인간 군상이 등장하지만, 역시 깡패 두목에게 한 부분을 할애하는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이것을 보아도 사마천이라는 역사가는 협객들의 삶에 상당한 공감을 가졌던 것 같다. (출처 : 郭解) 사마천과 동시대에 곽해郭解라는 거물급 두목이 있었다. 사마천은 이 곽해의 인상을 다음처럼 기술하고 있다. "나는 곽해를 본 적이 있다. 그 풍모는 평균 이하였고, 말투 또한 이렇다 하게 눈에 띌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실제도 그의 평판은 대단한 것이었다. 상당한 인물이라면 또한 안면이 있든 없..

동아시아 역사 2017.04.23

한 고조 유방과 당 태종 이세민의 공통점

출처 - 한 권으로 읽는 중국 고전, 이우각, 동양고전연구모임 부하의 의견에 귀를 기울여라 항우와 유방 두 사람은 진시황제가 죽은 후 천하를 두고 싸웠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유방이 항우를 쳐부수고 천하를 통일하여 한漢이라는 새로운 왕조를 이룩하였다. 이 두 사람의 싸움에서 처음에는 항우 쪽이 우세했다. 그러나 유방은 끈질기게 열세를 만회하여 역전승을 거둔다. 그 승리의 원인에 대해서 유방 자신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에게는 소하, 장량, 한신이라는 세 명의 걸출한 인물이 있다. 이 세 명을 잘 활용한 것이 내 승리의 원인이다. 이런 나에 비해 항우에게는 범증이라는 참모가 있었지만, 그 한 사람조차도 활용하지 못했다. 이것이 항우의 패배 원인이다." 세 명의 걸출한 인물을 잘 활용한 것이 승리의 이유라..

동아시아 역사 2017.04.22

인간 본성 기반의 지도 철학 - 한비자가 주장한 내용

출처 - 한 권으로 읽는 중국 고전, 이우각, 동양고전연구모임 (출처 : 바이두 이미지) 인간불신의 지도 철학 서양의 마키아벨리, 동양의 한비자로 일컬어질 정도로 한비자韓非子라는 책은 철저한 인간 불신의 입장에서 리더 본연의 자세를 추구하고 있다. 따라서 그 내용의 찬부는 제쳐놓고 리더인 자는 한 번쯤 읽어봐야 할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삼국지에서 친숙한 촉한의 재상이었던 제갈공명은 초대 유비가 죽고 난 뒤 2대째 유선이 명재상으로 우러러 모신 인물이었는데 유선이 어린 황태자 시절에 한비자를 읽을 것을 되풀이해서 권했던 책이다. 공명은 제왕학을 심어주기 위한 교재로서 한비자를 주목한 것이다. 확실히 지금 새삼 읽어도 지혜로운 공명이 주목할 가치가 있는 책이다. 한비자는 조직의 우두머리는 어떡해야 ..

동아시아 역사 2017.04.21

일본 천지천황이 참여한 백제 부흥전쟁 2

일본서기는 참패의 원인을 '불관기상不觀氣像'과 '난오중군지졸'에 돌리고 있다. 백제왕과 일본 군장 모두에게 공동의 책임을 지우고 있다. 조수간만의 차이가 극심한 백촌강 입구의 형세를 제대로 간파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지세도 제대로 못 읽은 채 오합지졸로 정예병으로 구성된 나당연합군에 맞섰으니 패배는 명약관화한 일이었다는 것이다. 살아남은 백제 의병들은 "주유성도 무너졌다. 백제라는 이름도 오늘로써 다했으니 어떻게 고향 땅으로 돌아갈 수 있겠느냐?"며 일본 망명을 결심했다. 9월 11일 모궁牟弓을 출발하여 13일 궁례弓禮에 이른 뒤 침복기성枕服岐城(시무부쿠기사시)에 있는 처자들의 도착을 기다렸다가 663년 9월 24일 마침내 일본으로 향했다고 일본서기 '천지기天智紀'에 기록되어 있다. 좌평 여자신, 달솔 ..

동아시아 역사 2017.04.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