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역사

윤언이가 아깝지 묘청은 아깝지 않다던 단재의 글

믿을만한 건강정보 2017. 5. 27. 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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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묘청전(妙淸傳)을 보면, 묘청이 일개 서경(西京 : 평양)의 한 중으로서, "평양에 도읍을 옮기고 금국(金國)을 치자."하매, 일시에 군왕 이하 많은 시민의 동지를 얻어서 기세가 혁혁하다가, 마침내 평양에 웅거하여 나라 이름을 대위(大爲)라 하고, 원년 연호를 천개(天開)라 하고, 인종(仁宗)더러 대위국 황제의 자리에 오르라고 협박장 식의 상소를 올렸다.


반대당의 수령인 한낱 유생 김부식이 왕사(王師)로서 와서 문죄(問罪)하니, 묘청이 변변히 싸워보지도 못하고 부하에게 죽었으므로 묘청을 미친 자라고 한 사평(史評)도 있지마는, 당시의 묘청을 그처럼 신앙한 이가 많았음은 무슨 까닭이며, 묘청이 하루아침에 그렇게 패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고려사의 세기(世紀)와 열전(列傳)을 참고하여 보면 태조 왕건이 거란(契丹 : 뒤의 遼)과 국교를 끊고 북방의 옛 강토를 회복하려 하다가 거사하지 못하고 죽었으므로 그 후예 되는 임금 광종(光宗)ㆍ숙종(肅宗) 같은 이는 다 태조의 유지를 성취하려 하였고, 신하에도 이지백(李知白)ㆍ곽원(郭元)ㆍ왕가도(王可道) 같은 이들이 열렬하게 북벌을 주장하였으나 다 실행치 못하고 윤관(尹瓘)이 군신이 한마음으로 두만강 이북을 경영하려는 창끝을 약간 시험하다가 너무 많아서 그 이미 얻은 땅이 구성(九城)까지 금(金) 태조(太祖)에게 다시 돌려주니 이는 당시 무사들이 천고에 한이 되는 일로 여겼다.


윤언이 초상윤언이 초상



그 뒤에 금의 태조가 요(遼)를 토멸하고 지나 북방을 차지하여 황제를 일컫고 천하를 노려 보았다. 금은 원래 백두산 동북의 여진(女眞) 부락으로서 우리에게 복종하던 노민(奴民 : 高麗圖經에, “여진은 종으로 고려를 섬긴다(女眞奴奉高麗)."고 하였고, 고려사에 실린 김경조(金景祖)의 국서에도, “여진이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삼았다(女眞以高麗爲父母之邦)”고 하였음)이었는데 갑자기 강성해져서 형제의 위치로 바뀌었다(고려사에 실린 金景祖의 국서에, “형 큰 금나라 황제大金皇帝가 글을 아우 고려왕에게 보낸다(兄大金皇帝致書干弟高麗國王).”고 하였음).


이에 나라 사람들 가운데 좀 혈기가 있는 사람이면 모두 국치에 눈물을 뿌렸다. 묘청은 이러한 틈을 타 고려 초엽부터 전해오는 "평양에 도읍을 정하면 36 나라가 조공 온다(定都平壤三十六國來朝)."하는 도참(圖讖)을 가지고 부르짖으니, 사대주의의 편벽된 소견을 가진 김부식 등 몇몇 사람 이외에는 모두 묘청에게 호응하여, 대문호인 정지상(鄭知常)이며, 무장(武將)인 최봉심(崔逢深)이며, 문무가 겸전(兼全)한 윤언이(尹彦燎 : 尹瓘의 아들) 등이 모두 북벌론을 주창함으로써 묘청의 세력이 일시에 전성하였다.


오래지 않아 묘청의 하는 짓이 미치고 망령되어 평양에서 왕명도 없이 나라 이름을 고치고 온 조정을 협박하니, 이에 왕의 좌우에 모시고 있던 정지상은 묘청의 행동을 반대하였고, 윤언이는 도리어 주의가 다른 김부식과 함께 묘청 토벌의 선봉이 되었다. 이것이 묘청이 실패한 원인이다. 그런데 김부식은 출정하기 전에 정지상을 죽이고 묘청을 토벌한 후에 또 윤언이를 내쫓아서 북벌론자의 뿌리를 소탕해버렸다. 김부식은 성공하였으나 이로 하여 조선이 쇠약해질 터전이 잡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참고하여 보면, 묘청의 성패한 원인과 그 패한 뒤에 생긴 결과가 분명하지 않은가. 이로써 회통(會通)을 구하는 한 예를 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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