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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시대 금속활자 제작 과정 복원 2 - 고인쇄박물관

금속활자가 만들어지면 책을 만들기 위해선 조판해야 합니다. 직접 글을 쓴다기 보단 활자를 잘 조합해야 하죠. 그 위에 먹을 칠한 뒤 찍어내면 그 자체가 책이 되니깐요. 이렇게 틀에 맞춰 활자들을 조합해야 합니다. 한번에 하나씩, 꽤나 고된 일이었겠어요. 조판 작업이 끝나면 인쇄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먹을 칠해야죠. 꼼꼼하게 먹을 칠하고, 종이에 찍어내기를 반복합니다. 그러면 인쇄된 종이가 하나씩 쌓이게 돼요. 오로지 사람의 손으로만 이뤄지는 작업이기도 하죠. 이렇게 인쇄된 종이는 책으로 엮기 전 오탈자 검수 작업을 거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오탈자를 꼭 발견해야 책이 제대로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키보드론 백스페이스를 눌러 쉽게 글자를 지울 수 있지만, 저 당시엔 조판을 바꿔야 해요. 그리고 다시 ..

동아시아 역사 2017.05.31

고려 시대 금속활자 제작 과정 복원 1 - 고인쇄박물관

청주 고인쇄 박물관에는 금속활자 제작 과정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코너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 포스트에서 소개할 인형들을 통해서 제작 과정을 글이 아닌 그림과 행동으로 알 수 있어요. 처음, 활자를 제작하기 전에 글자본을 정합니다. 예서, 해서 등 글자본은 많습니다. 이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죠. 글자본이 정해졌다면 밀랍을 정제합니다. 굳은 밀랍에 글자를 새기고 그것을 찰흙으로 덮습니다. 다시 찰흙을 가열하면 밀랍이 녹으며 찰흙에 글자 모양이 새겨지죠. 여기에 쇳물을 부어 활자를 완성하는 것이죠. 그러기 위해선 잘 정제된 밀랍이 필요합니다. 가열하고 정제한 밀랍을 틀에 맞춰 굳힙니다. 이때도 글자가 잘 새겨질 수 있게 반듯이 정리하는 과정이 필요해요. 이런 긴 과정을 거쳐 마침내 밀랍에 글자를 ..

동아시아 역사 2017.05.31

북애자가 밝힌 강한 나라의 요건 3가지

만약 하늘이 나를 다시 태어나게 하여 수백 년 뒤로 놓아두기만 한다면, 곧 나는 우리나라 옷을 입고 청나라 언어를 구사하며, 네 필의 말이 끄는 수레에 올라앉아 청나라 황제를 설복하여 우리가 같은 조상의 후손임을 얘기하고 그 이해득실을 나열할 것이니, 조선과 더불어 요만遼滿과 유영幽營의 땅에 나란히 웅거하여, 북으로는 야인野人을 꾀어 선봉으로 삼고, 동으로는 왜倭와 연합하여 그들로 하여금 남쪽의 천한 종족들을 휘어잡게 하자고 할 것이다. 무릇 그러한 후에야 조선의 강성함은 다시 살아날 것이요, 한나라의 거만함은 좌절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 조선의 형세가 저무는 해를 따라가듯 하기에 단지 허약함만을 돌보아서는 떨치고 나와서 힘을 쓰는 것은 생각도 못 해 볼 것이며, 수백 년이 지나지 않아 조선은 반..

동아시아 역사 2017.05.31

백제의 고구려, 신라, 가야, 왜, 중국과의 교류

고구려, 신라, 가야와의 교류 4세기 낙랑樂浪, 대방帶方이 한반도에서 쫓겨난 후 백제는 고구려와 중국-한반도-일본을 잇는 동아시아 교역망을 장악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였다. 371년 근초고왕의 평양성 공격으로 고국원왕이 패사敗死한 이후 근구수왕, 진사왕, 아신왕, 개로왕대까지 총 15회의 전쟁을 되풀이했다. 백제는 신라와 왕권 강화와 대외진출의 필요성으로 3세기까지 간헐적으로 대립하였다. 4~5세기에는 고구려와의 동아시아 교역망 쟁탈전과 고구려 남진 정책으로 이해관계에 따라 때로는 신라를 견제하고, 때로는 동맹을 맺기도 하였다. 백제와 가야 소국들은 동맹 관계였다. 백제는 가야지역을 거점으로 왜와 안정적으로 교류하였고, 가야도 철의 국제 무역과 중국과의 교류에 백제의 도움을 받았다.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동아시아 역사 2017.05.31

문종이 만든 조선 화차 [문종의 전쟁 무기]

우리나라만의 독창적인 화약 무기는 세종 말기에 대부분 개발됩니다. 화차火車는 문종이 공을 들여 완성한 것으로, 세자 시절 보고 듣고 만졌던 화약 무기의 집대성을 자신의 대에 완성한 것이죠. 화차는 문종 1년인 1451년 개발되었습니다. 당대의 우수한 화약 무기를 집대성한 작품이죠. 1474년에 편찬된 국조오례서례에 제작 과정이 자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제작 자료가 상세하기에 현대에도 복원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어느 정도로 자세하냐면, 척, 촌, 푼, 리라는 단위까지 사용했는데, 설계도에 나온 자료 중 리는 0.3mm에 해당합니다. 이처럼 아주 정밀한 단위까지 사용해 기록을 남겨뒀기에 복원될 수 있습니다. 문종 화자의 작동 원리 앞부분에 화약을 넣는 종이로 된 통(약통)이 있습니다. 그 앞에는 일종의 폭..

동아시아 역사 2017.05.30

하멜 표류기에 적힌 조선의 대기근

1661비가 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곡식과 그 밖의 다른 작물을 별로 수확하지 못했다. 1662올해 추수를 할 때까지 상황이 더 어려워서 수천 명의 사람이 기근으로 죽어갔다. 도로를 이용하기가 어려웠는데, 그건 도둑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왕의 명령으로 모든 도로에 경비대가 주둔했는데, 그것은 여행자의 안전을 도모하기도 하고 길거리에서 아사餓死한 사람들을 매장하기도 하며, 매일같이 일어나는 살인이나 강도를 예방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몇몇 고장과 마을들이 털리고 국고(“쌀 창고는 해안의 몇 군데에 있었는데 인근 지역의 기근에 대비했고, 공덕功德에 따라서 구호물 지급자에게 왕이 내리는 상을 주었다.”[파커, “조선”, 「차이나 리뷰」ⅪⅤ, 129].)가 습격당해 곡물을 강탈당했는데 범죄자들이 잡히지는 않았다...

동아시아 역사 2017.05.30

진흥왕이 설치한 화랑에 대해 - 조선상고사

진흥대왕眞興大王의 화랑花郞 설치 화랑은 한때 신라가 크게 일어난 원인이 되었을 뿐 아니라 후세에 한문화(漢文化)가 발호(跋扈)하여 사대주의파(事大主義派)의 사상과 언론이 사회의 인심ㆍ풍속ㆍ학술을 지배하여 온 조선을 들어 지나화(支那化)하려는 판에 이에 반항ㆍ배척하여서 조선이 조선되게 하여 온 것이 이 화랑이었다. 송도(松都) 중엽 이후로는 화랑의 여맥이 아직 없어지지 아니하여 비록 직접으로 그 감화를 받는 사람은 없지마는 그래도 간접으로 화랑의 유풍 여운을 받아 가까스로 조선이 조선되게 하여 온 것은 화랑이었다. 그러므로 화랑의 역사를 모르고 조선사를 말하려 함은 골을 빼고 그 사람의 정신을 찾음과 같이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화랑파(花郞派)에 스스로 기록한 문헌인 선사(仙史)ㆍ화랑세기(花郞世紀)ㆍ선랑..

동아시아 역사 2017.05.30

근구수왕의 대륙 백제와 일본 성덕태자-조선상고사

근구수왕近仇首王 즉위 후의 해외海外 경략經略 근구수왕이 기원 375년에 즉위하여 재위 10년 동안에 고구려에 대하여는 겨우 한 번 평양 침입이 있었으나 바다를 건너 지나 대륙을 경략하여 선비(鮮卑) 모용씨(慕容氏)의 연(燕)과 부씨(符氏)의 진(秦)을 정벌하여, 지금의 요서(遼西)ㆍ산동(山東)ㆍ강소(江蘇)ㆍ절강(浙江) 등지를 경략하여 넓은 땅을 장만하였다. 이런 기록이 비록 백제 본기에는 오르지 않았으나 양서(梁書)와 송서(宋書)에 “백제가 요서와 진평군(晋平郡)을 공략하여 차지하였다(百濟 略有遼西晋平郡).”고 했고,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부여(扶餘)가 처음에 녹산(鹿山)에 웅거하였다가 백제에게 격파당해 서쪽 연(燕) 가까이로 옮겼다(扶餘 初據鹿山 爲百濟所殘破 西徒近燕).”고 한 것이 이를 증명한다...

동아시아 역사 2017.05.30

백제, 바다로, 해상강국 백제의 해양 진출

백제는 서해와 남해로 이어지는 해안선이 길고 큰 강이 많아 해상 활동에 유리하였다. 이를 통해 중국 대륙, 일본 열도 및 아시아의 여러 나라와 활발하게 교류하였다. 백제 한성기에 이용된 항로는 육지 가까이 운항하는 연안 항로였다. 백제 후기에는 황해도 연안과 중국의 산둥반도를 직접 잇는 서해 횡단항로가 개발되어 더 짧은 기간에 중국이나 일본에 오갈 수 있게 되었다. 백제의 일본 항로 백제와 왜는 한반도와 일본 열도의 연안을 따라 두 나라의 수도를 오가는 최단 루트를 이용하였다. 한성 - 인천만 - 남양 반도 - 태안 반도 - 금강하구 - 변산반도 - 영산강 하구 - 고흥반도 - 섬진강 하구 - 쓰시마 - 규슈 북부 - 오사카만 - 야마토 백제의 중국항로 백제는 중국과 서해안을 따라 북상하는 연안 항로를 ..

동아시아 역사 2017.05.29

만화 삼국지8 유비가 15만 백성을 데리고 강릉으로 가다

만화 출처 - 重温儿时三国演义连环画之第二十四集 85. 현덕이 말한다. "본래 백성을 보호하고자 했으나 도리어 백성을 해치는구나! 양양에 들어가지 않으련다!" 공명이 말한다. "강릉은 형주의 요지입니다. 먼저 강릉을 취해 근거지로 삼는 게 낫습니다." 86. 이에 백성을 이끌고 모조리 양양의 대로를 떠나 강릉으로 떠나간다. 양양 성중의 백성들 가운데 많은 이가 혼란을 틈타 출성해 현덕을 따라간다. 87. 위연이 문빙과 교전하느라 현덕을 따라가지 못해 수하 병졸들이 모두 꺾였다. 위연이 이에 말을 몰아 달아나 현덕을 찾으나 만나지 못해 장사태수長沙太守 한현에게 몸을 맡기러 간다. 88. 한편, 현덕이 군사와 백성 10만 남짓과 동행하는데 크고 작은 수레가 수천량이고, 짐을 지고 메고 가는 이는 그 수를 헤아..

동아시아 역사 2017.05.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