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화성박물관 14

수원문화재, 그림과 글들, 수원화성박물관

수원문화재, 그림과 글들, 수원화성박물관 수원의 선비문화조선시대 수원은 정조와 수원화성으로 대표되지만, 그 이전부터 충과 효의 고장으로 널리 알려졌다. 서울과 평양 다음으로 무과武科 급제가가 많았던 수원은 상무尙武 전통과 함께 문무文武를 겸비한 유교 문화가 꽃피었다. 수원 땅에서 대를 이어 살아온 선비들은 유력한 명문 벌열閥閱 가문은 아니지만 수많은 동족 마을을 형성하면서 다양한 삶을 보여준다. 김시진 유언金始辰遺言, 1667년김시진(1618~1667)이 아들 양신에게 써 준 유언. 김시진은 한성좌윤, 형조, 예조, 호조의 판서와 수원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이 유언은 그가 죽은 50세의 3월과 4월 두 번에 걸쳐 작성된 것으로, 3월의 기록에는 하나뿐인 적자 양신이 공부를 게을리하여 가문의 유업遺業이 끊..

동아시아 역사 2017.11.16

삼국시대, 고려 시대 수원 역사와 유물 (수원화성박물관)

삼국시대, 고려 시대 수원 역사와 유물 (수원화성박물관) 한성백제 시대의 수원 한성백제는 마한 지역 연맹체인 안성천과 한강 유역 소국들의 다양한 정치적 경험을 흡수하면서 성장한 고대국가이다. 백제는 고이왕대 고대국가의 기틀을 다지고, 비류왕대 정치, 경제적 기반을 토대로, 4세기 근초고왕대 안정적 국가기반을 바탕으로 활발한 대외 정복 활동을 벌여 경기, 충청을 거쳐 전라도에 이르는 영역을 차지한다. 475년 고구려의 침입으로 한성을 포기하고 웅진으로 천도함으로써 500여 년 가까운 한성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된다. 수원지역은 이른 시기에 백제 세력권에 편입되었으며,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화성 동탄 먹실유적, 발안리 마을 유적이 있다. 삼국 문화의 융합점, 한강 유역과 수원지역 수원지역은 서해안과 한강 하류 ..

동아시아 역사 2017.11.12

수원 역사, 100년 전 사진 [수원화성박물관]

수원 역사, 100년 전 사진 [수원화성박물관] 100년 전 수원화성1907년 독일장교 헤르만 산더(Hermann Sander, 1868~1945)가 찍은 수원화성의 모습이다. 100년 전에 그는 주일 독일대사관 무관으로 1년간 조선에서 봉직했으며, 일본인 사진사를 대동하고 조선과 중국의 여러 곳을 여행했다. 1907년 3월 헤르만 산더는 1905년 개통된 경부철도를 이용하여 기차를 타고 수원을 방문하였다. 이때 촬영된 15컷의 사진이 100년 전의 수원화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 사진들은 현재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정조의 꿈을 실현하는 수원정조는 수원을 무대로 개혁 의지를 실현하면서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였다. 이러한 왕권을 바탕으로 그는 자신이 사랑하던 백성들을 위하여 다양한 정책을 ..

동아시아 역사 2017.11.10

채제공 초상화, 이명기가 그린 조선 정조 측근 (수원화성박물관)

채제공 초상화, 이명기가 그린 조선 정조 측근 (수원화성박물관) 채제공 초상 보자기 번암 채제공 초상 금관조복본朝服本, 흑단령본黑團領本, 시복본을 보관하기 위해 제작한 직사각형 형태의 보자기다. 보자기마다 조복본, 흑단령본, 시복본이라는 글씨가 먹으로 쓰여 있다. 이중 시복본時服本의 보자기는 바깥 면이 붉은색이고 양쪽 면은 연하늘색이며 끝자락마다 초록색 수술을 매달아 장식하였다. 원형의 연초록색 보자기 2점은 초상 아래 하축下軸의 양쪽 끝 축두軸頭를 감쌀 때 사용하던 것이다. 채제공 초상 시복본 누비보 1792년 장황한 번암 채제공 초상 시복본을 보관할 때 사용하던 직사각형 모양의 누비보로 재질은 명주다. 가장자리에 먹으로 시복時服 대소大小 각各 일본一本이라고 쓴 글씨가 있어 원래 수원화성박물관 소장의 ..

동아시아 역사 2017.11.05

조선 정조가 아끼던 번암 채제공 유물들 (수원화성박물관)

조선 정조가 아끼던 번암 채제공 유물들 (수원화성박물관) ※ 이 포스트에서 수원화성박물관에서 찍은 사진과 소개글을 정리합니다. 번암집 어정범례樊巖集御定凡例정조가 채제공의 문집인 번암집 원고의 편차를 정해 준 어정범례이다. 1799년(정조 24) 1월에 채제공이 세상을 떠나자 그해 가을에 문인門人인 정약용丁若鏞과 이가환李家煥 등이 유고를 교정하였다. 이듬해 정조는 번암집 편집과 관행에 큰 관심을 갖고 유고를 여러 차례 살펴보고 직접 문집의 범례凡例를 지어 주며 문집을 편집하는 기준으로 삼게 하였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임금이 신하의 문집에 범례를 제정해 준 것은 매우 드문 일로 채제공에 대한 정조의 높은 관심과 애정을 느낄 수 있다. 수원유수에게 장용외사를 겸하라는 전령정조는 1789년(정조 13) 사도세자..

동아시아 역사 2017.11.03

수원행차와 낙남헌 행사, 혜경궁 홍씨 회갑잔치 (수원화성박물관)

수원행차와 낙남헌 행사, 혜경궁 홍씨 회갑잔치 (수원화성박물관) 수원 백성에게 베푼 혜택 (낙남헌 양로연과 별시) 지팡이든 흰머리 노인들 앞뒤로 모여드니해동의 낙남 연회 화기가 넘치누나바라노니 노인들 백 세의 장수 누리시고자궁께 만만년 장수 빌며 술 따르고 절해주오 - 홍재전서 권6 시2, 수원행차한 정조가 노인들을 위한 잔치에서 읊은 시 낙남헌에서의 양로연윤2월 14일 오전, 정조가 낙남헌에서 영의정 홍낙성洪樂性 등 수원행차를 수행한 노대신老大臣 15명과 수원부의 노인 총 384명에게 양로연을 베푸는 장면이다. 이 잔치에 초대받은 화성부 노인의 명단에 따르면, 관료가 9명, 80세 이상의 노인이 208명이고, 61세 노인이 168명이었다. 이 중 90세 이상의 노인도 16명이나 되었다. 정조는 어머님이..

동아시아 역사 2017.11.01

수원 유수부와 수원행차 (조선 정조의 계획 도시, 수원화성박물관)

수원 유수부와 수원행차 (조선 정조의 계획 도시, 수원화성박물관) 대도시로 성장한 수원 유수부 "이곳은 본디 허허벌판으로 인가가 겨우 5~6호였는데, 지금은 1천여 호나 되는 인가가 즐비하게 찼구나. 몇 년이 안되어 하나의 큰 도회지가 되었다."(- 정조실록 권39, 1794년 1월 15일) 수원(당시 수원 유수부)은 정조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농업은 물론 상업이 발달함으로써 일거리를 찾아 유입되는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팽창하여 서울에 버금가는 도시로 성장하였다. 더불어 전국에서 가장 중요한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유수부로 승격 - 활성화되기 시작하는 수원 유수부수원은 1793년 명칭이 화성으로 바뀌면서 유수부로 승격되고, 성을 쌓으면서 점점 발전하였다. 이는 화성을 활성화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동..

동아시아 역사 2017.10.29

수원의 조선 시대 시전과 둔전 (정조의 농업, 상업 정책, 수원화성박물관)

수원의 조선 시대 시전과 둔전 (정조의 농업, 상업 정책, 수원화성박물관) 농업개혁의 산실, 수원 정조는 신도시 수원을 자급적인 도시로 만들기 위하여 농업과 상업 생산기반 시설(둔전과 시전)을 마련하였다. 화성 일대에 만석거를 비롯한 저수지와 국영농장인 둔전이 바로 그것이다. 정조는 신도시 수원을 건설하면서 화성 일대에 만석거를 비롯한 저수지와 국영 농장인 둔전을 만들어 안정적인 농업기반을 확보하였다. 그리고 토지 없는 백성들은 둔전을 경작하여 경제적 안정을 추구하게 하는 한편, 이들이 수확한 양곡으로 화성에 주둔한 장용외영 군사들의 군량미와 급여를 확보하게 하였다. 또한, 저수지와 수차를 이용한 농법 개발과 이앙법의 대대적인 실시로 생산량을 크게 향상해 수원을 농업과 상업(둔전과 시전)의 선진 도시로 ..

동아시아 역사 2017.10.27

수원화성 축성, 도로, 재료 (수원화성 박물관, 풍납토성, 삼년산성, 강화외성)

수원화성 축성, 도로, 재료 (수원화성 박물관, 풍납토성, 삼년산성, 강화외성) 조선 시대 성곽의 결정체, 수원화성 수원화성은 조선성곽과 이웃 나라 성곽이 지닌 장점을 결합하여 새로운 시설물을 고안한 성곽 건축의 결정체다. 수원화성은 삼국시대 이래 우리 성곽 문화가 지닌 우수성을 바탕으로 중국 및 일본 성곽의 장점을 결합하여 만든 성곽이다. 각각의 시설물들은 방어 기능뿐만 아니라 저마다의 고유한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다. 특히 지형과 지세를 거스르지 않고 자연을 크게 훼손하지도 않으며, 꼭 있어야 할 자리에 해당 기능을 가진 시설물을 배치한 점은 저절로 탄성이 나온다. 또한, 화성에는 정조의 애민정신이 깃들어 있다. 축성 기간 중 지나치게 춥거나 더울 때는 공사를 중지하고, 기존의 설계를 바꿔가면서까지 민..

동아시아 역사 2017.10.25

수원 화성성역의궤와 수원 출신 김후 (수원화성박물관)

수원 화성성역의궤와 수원 출신 김후 (수원화성박물관) 김후 초상김후金㷞(1751~1805)의 본관은 해풍海豊이고 자는 광중光仲이며 증호조참판贈戶曹參判 김상걸金相傑(1727~1798)의 아들이다. 1771년(영조 47) 정시 무과에 급제 후 출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1790년(정조 14) 수원중군에 제수되었고, 1791년 당시 수원부 읍치邑治의 외곽을 호위하던 독성산성禿城山城의 중군을 역임하였다. 1793년에는 경기중군이 되어 경기지역의 모든 군사업무를 실질적으로 통솔하게 되는데, 수원 화성 축성(화성성역의궤를 만든 이유)이 시작되기 딱 1년 전이었다. 정조가 의도적으로 수원 토박이 무반 가문 출신의 김후를 중용하였다. 1794년 2월 화성성역 별감동別監蕫이 되어 화홍문, 방화수류정 등 시설물의 현장감독..

동아시아 역사 2017.1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