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598

대가야의 성장과 쇠퇴 (사다함의 신라군에 멸망)

3~4세기 김해의 금관가야가 가야 제국諸國의 선진국가로서 연맹을 주도하던 시절에 대가야는 금관가야의 영향을 받으면서 성장하였다. 그리고 농업생산력을 바탕으로 제철 기술을 도입하고 야로철산冶爐鐵山을 개발함으로써 5세기에 획기적인 국가발전을 이루었다. 마침 4세기 말부터 고구려가 백제를 누르고 남쪽으로 군사를 보내 낙동강 유역에까지 진출함으로써 금관가야를 비롯한 해안지역의 국가들이 타격을 입자 그동안 내륙에서 착실히 성장해온 대가야가 더욱 급속히 성장할 수 있게 되었다. 중국의 남제서 동남이전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가라국은 삼한의 종족이다. 건원 원년(479)에 국왕 하지가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 조서를 내려 "널리 헤아려 비로소 오르니 먼 곳의 오랑캐가 두루 교화되는구나. 가라왕 하지는 동쪽..

동아시아 역사 2017.09.08

중국황제 아명 - 한고조, 광무제, 양무제, 측천무후, 조광윤 등

중국황제 아명 - 한고조, 광무제, 양무제, 측천무후, 조광윤 등 황제의 이름(皇帝的名字) 저자 이문군(作者, 李文君), 2012년 5월 가격 : 38위안 (6,300원, 빌어먹을 도서정가제. 우리나라에선 이 가격에 책이 안 나옴) 한고조 유방, 별명 : 우뚝한 코를 가진분(隆准公) 후한 광무제 유수, 호 : 백수진인(白水眞人) 백수白水 : 중국의 남양南陽 백수현白水縣으로, 왕기王氣가 성대하게 일어나는 지역을 가리키는 말.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가 백수진인白水眞人으로 일컬어졌는데, 망기望氣를 잘하는 왕망王莽의 사자가 남양南陽 땅에 이르러 그가 거하는 지역인 용릉곽舂陵郭을 멀리 바라보고는 "기운이 성대하게 일어나는 것을 보니, 왕자王者가 일어나 천명을 받을 곳임이 분명하다."라고 감탄했다는 고사가 ..

동아시아 역사 2017.09.06

청주 흥덕사의 지금 모습 - 직지가 탄생한 그곳

청주淸州 흥덕사지興德寺址 사적 제315호 흥덕사터는 1985년 발굴조사 결과 금당터와 강당터, 그리고 탑터와 이들을 둘러싼 회랑터의 일부가 발견되었다. 이와 함께 각종 기와와 전돌, 그릇 조각을 비롯하여 청동으로 만든 금구禁口, 작은종, 금강저金剛杵 등이 출토되었다. 현재의 모습은 발굴 결과에 의하여 금당과 삼층석탑을 복원한 것이다. 이곳은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본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을 간행한 곳이다. 이 책은 1377년(고려 우왕 3년)에 백운화상(1298~1374)이 불조직지심체요절을 간추려 엮은 것을 그의 제자들이 금속활자로 인쇄한 것이다. 이 책은 독일 구텐베르크의 42행 성서보다도 78년이나 앞서 인쇄된 것으로, 2001년 9월 4일 유네스코..

동아시아 역사 2017.09.05

위진남북조시대 인물화 - 무도천왕 염민 등

위진남북조시대 인물화 - 무도천왕 염민 등 위진남북조시대 인물화 모음입니다. 중국 네티즌들이 올려놓았던 자료들 일부 발췌해 소개합니다. (출처 : 클릭) - 염민 5호16국 시대 염위, 즉 위나라 건국자입니다. 중국 사람들에겐 5호16국 시대 유일한 한족 출신 건국자이기에 좋은 평가를 받는 인물이죠. 그러나 염민의 위나라는 불과 2년 만에 멸망합니다. (가운데 염민) (모용선비와 전쟁에 나서는 염민의 위나라 군대) (모용선비에 패배해 목숨을 잃는 염민) - 유곤 사실상 중원에서 활약하던 한족의 마지막 희망이었습니다. 친한 친구 조적과 함께 어려서부터 무예를 닦고 나라를 위해 헌신하겠다고 맹세한 일화가 유명합니다. 그러나, 중원에서 세력을 잃고 선비족 단필제의 모함에 빠져 자신과 아들, 조카 등이 모두 죽..

동아시아 역사 2017.09.04

백제고분 돌방무덤, 제작 과정

백제고분 돌방무덤, 제작 과정 백제고분 돌방무덤 제작 과정 신봉동 유적에서는 3기의 백제고분 돌방무덤이 조사되었다. 백제고분 돌방무덤은 다른 널무덤에 비해 높은 곳에 있으며, 상층 신분의 인물이 묻힌 것으로 보인다. 백제고분 돌방무덤은 널길을 포함한 커다란 움을 파고, 평면 형태가 방형이나 장방형으로 일정한 높이까지 수직으로 네 벽으로 쌓은 뒤 점차 안으로 들여쌓아 천장을 이루었다. 대체로 남쪽으로 문을 내어 시신을 운반하였으며 커다란 돌로 막아 쌓은 뒤 마무리하였다. 백제고분 돌방무덤은 관대를 포함한 백제고분 돌방무덤방의 바닥에는 강돌을 깔고 관대 위에 관을 놓고 주위에 토기와 철기, 장신구 등의 많은 유물을 함께 묻었다. (운구를 운반하는 인부들) 단지 청주 신봉동 손잡이 잔, 출토지 미상 손잡이 잔..

동아시아 역사 2017.09.01

백제고분 - 청주 명암동 가경동 유적

백제고분 - 청주 명암동 가경동 유적 백제인의 삶과 죽음, 청주 명암동과 가경동 유적 청주명암동유적에서는 백제 집터와 백제고분 널무덤이 함께 발견되어 당시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10기가 발견된 집터의 내부에는 화덕이 설치되어 있으며, 인근의 가경동, 봉명동, 청원 쌍청리유적 등과 함께 4세기 무렵의 청주지역 백제 움집터의 입지와 주거형태 등을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또한, 백제고분 널무덤은 백제고분 신봉동고분군과 비교되는 것으로 다소 이르거나 병행하는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재갈, 청주 신봉동 출토, 재현품 청주가경동유적은 집터와 저장구덩, 백제고분 무덤이 좁은 지역에 밀집되어 있어 당시의 생활공간을 복원하는데 귀중한 단서를 제공해주고 있다. 이곳에서 발견된 백제가마..

동아시아 역사 2017.08.31

용두사지철당간, 고려광종 시대 당간

용두사지철당간, 고려광종 시대 당간 용두사철당기 (용두사에 철당간을 만든 이유)전 한림학생 김원이 짓고 썼으며 새긴 사람은 손석이다. 용두사지철당간 밑에서 3번째 당간에 용두사철당기가 적혀있다. 일찍이 용두사지철당간을 만드는 이유는 불문의 아름다운 표시이며, 당은 보전을 단장하는 신령스러운 깃발이라고 들었다. 그 형상은 마치 학이 푸른 하늘을 맴돌아 날고 용이 푸른 하늘을 뛰는 것과 같아 이를 세운 자는 신심이 크게 되고, 바라보는 자마다 티 없이 맑은 마음이 생기게 된다. 진실로 마귀를 굴복시키는 철장대요, 적을 물리치는 무지개 깃발이라 할 것이다. 이 고장의 호족이며 권세 있는 집안인 당대등 김예종이 갑자기 질병에 걸리자 경건히 용두사지철당간을 건립하여 사찰을 장엄하게 할 것을 부처님께 맹세하였다. ..

동아시아 역사 2017.08.30

용두사지철당간, 청주에 남은 고려 용두사 국보

용두사지철당간, 청주에 남은 고려 용두사 국보 용두사지철당간소재지 :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 2가 48-19지정사항 : 국보 41호건립연대 : 962년 (광종 13) 용두사지철당간용두사지철당간은 두 개의 화강암 지주와 20개의 철통으로 이루어져 있다. 용두사지철당간은 절 앞에 높이 세워 예불이나 법회가 있을 때 깃발을 걸던 곳이다. 대부분의 당간은 나무로 만들어 당간지주만 남아있는 경우가 많고 당간이 남아있는 사례가 드물다. 용두사지철당간은 밑에서 3번째 당간에 당기가 새겨 있어, 건립 목적과 조성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용두사지철당간을 세운 이유는 청주사람 김예종이 병에 걸리자 용두사지철당간을 세울 것을 부처님께 맹세한 것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자 사촌형인 ..

동아시아 역사 2017.08.29

선비족 북위 수도 평성 유물

선비족 북위 수도 평성 유물 이 포스트는 중국 다퉁시(大東) 박물관에 전시된 선비족 북위 수도 평성 유물전을 다룹니다. 선비족 북위 수도 평성 유물 특집이었던 시기에 박물관을 방문해 포스팅한 분의 글을 퍼왔습니다. 원본 링크는 大同市博物馆御东新馆巡礼之四:魏都平城(续1) 여기고 간단한 코멘트들도 그대로 옮깁니다. 두 명의 부처가 나란히 앉아 불공드리는 불상은 1956년에 선비족 북위 수도 평성 유적지 남쪽에 도로를 내던 중 발견되었습니다. 감실에 앉은 두 부처는 나란히 앉아 있습니다. 북위 효문제와 풍태후가 집권하던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되는데, 풍태후가 섭정을 했기에 정치적 의미가 담긴 불상이라 볼 수도 있습니다. 돌로 조각한 무사武士 석상은 2002년 선비족 북위 수도 평성 무덤군에서 출토되었습니..

동아시아 역사 2017.08.27

단군왕검 이두문-신지의 역사

단군왕검 이두문-신지의 역사 神誌의 역사 - 조선상고사 전사前史(단군왕검 이두문 시절)에 단군왕검 때에 신지神誌라는 사람이 있어 사관史官이 됐다 하였으나, 사실은 곧 신치의 번역이요, 신치는 신크말치의 약자요, 신크치는 신가의 별칭이요, 신가는 앞에서 말한 다섯 가의 수석首席 대신이니, 신치 곧 신가가 늘 신수두의 제일祭日에 단군왕검 이두문으로 우주 창조의 신화와 영웅과 용사 등이 행한 일과 예언, 유의, 경계하는 이야기를 노래하여 역대로 예가 되었다. 후세에 문사文士들이 그 노래를 거두어 한 책을 만들고, 그 벼슬 이름 신치로 책 이름을 한 것이니, 이른바 단군왕검 이두문으로 신지가 곧 그것이다. 이제 신지의 원서가 없어져서 그 가치의 어떠함을 알 수 없으나, 그 책 이름이 단군왕검 이두문으로 지은 것..

동아시아 역사 2017.08.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