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백제박물관 12

대가야의 성장과 쇠퇴 (사다함의 신라군에 멸망)

3~4세기 김해의 금관가야가 가야 제국諸國의 선진국가로서 연맹을 주도하던 시절에 대가야는 금관가야의 영향을 받으면서 성장하였다. 그리고 농업생산력을 바탕으로 제철 기술을 도입하고 야로철산冶爐鐵山을 개발함으로써 5세기에 획기적인 국가발전을 이루었다. 마침 4세기 말부터 고구려가 백제를 누르고 남쪽으로 군사를 보내 낙동강 유역에까지 진출함으로써 금관가야를 비롯한 해안지역의 국가들이 타격을 입자 그동안 내륙에서 착실히 성장해온 대가야가 더욱 급속히 성장할 수 있게 되었다. 중국의 남제서 동남이전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가라국은 삼한의 종족이다. 건원 원년(479)에 국왕 하지가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 조서를 내려 "널리 헤아려 비로소 오르니 먼 곳의 오랑캐가 두루 교화되는구나. 가라왕 하지는 동쪽..

동아시아 역사 2017.09.08

대가야와 소가야, 철기 문화와 무덤 (포상팔국의 난)

소가야小加耶 소가야는 삼국지 동이전에 실린 변진 12개국 가운데 고자미동국이 발전한 나라이다. 고자미동국은 고자국古自國, 고사포古史浦, 고차古嗟, 구차久嵯, 소가야小加耶 등으로 기록되었으며, 중심지는 경상남도 고성이었다. 소가야는 해상 활동을 기반으로 성장하였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소가야를 비롯한 해안지역의 8개국이 금관가야 또는 아라가야를 공격했다는 기록이 있다. 구멍있는 작은 항아리 큰 입 항아리나 긴 목항아리의 몸통 중앙에 작은 구멍이 있는 토기를 말한다. 주로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전남 서해안부터 경남 남해안에 걸친 해안 지역에서 출토되었다. 일본의 스에키에서 이러한 특징이 나타나며, 가야에서는 고성 지역에서 많이 출토되었다. 이처럼 고성 지역 고분군에서 출토된 구멍 있는 작은 항아리는 영..

동아시아 역사 2017.08.11

백제 건국 - 나라를 세우다

백제는 마한馬韓 54국의 하나인 백제국伯濟國이 커진 나라이다. 건국설화에 따르면 기원전 18년 졸본부여 왕녀와 고구려 시조 주몽 사이에서 태어난 온조가 형 비류와 함께 백성과 신하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와 한산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 나라를 세울만한 땅을 살폈는데, 비류는 미추홀을 선택했고, 온조는 한강 남쪽의 위례성에서 백제를 세웠다고 한다. 이를 통해 백제는 부여, 고구려 등의 북방계통과 마한 등의 남방계통 주민이 함께 어우러진 나라임을 알 수 있다. 기원 전후 무렵, 한반도 중남부 지역에는 삼한이 있었다. 삼한이란 마한, 진한, 변한을 말한다. 마한은 54개의 소국으로 이루어졌고 오늘날의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지역에, 진한과 변한은 각각 12개 소국으로 이루어졌으며 오늘날의 경상도 지역에 있었..

동아시아 역사 2017.08.07

대가야의 성립과 명칭 정리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고령현 건치연혁조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한다. 최치원의 석리정전에 이르길 '가야산신 정견모주正見母主가 천신 이비가夷毗訶에게 감응하여 대가야왕 뇌질주일惱窒朱日과 금관국왕 뇌질청예惱窒靑裔 두 사람을 낳았는데, 뇌질주일은 이진아시왕의 별칭이고 청예는 수로왕의 별칭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가락국 옛 기록의 '여섯 알 전설'과 함께 모두 허황해 믿을 수 없다. 또 석순응전은 대가야국의 월광태자는 정견正見의 10대손인데, 아버지는 이뇌왕으로서 신라에 청혼해 이찬 비지배比枝輩의 딸을 맞아 태자를 낳았으며, 이뇌왕은 뇌질주일의 8대손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또한 참고할 수 없다. 삼국유사 기이 가락국기에 실린 설화는 금관가야 중심의 건국설화인데, 위의 설화는 대가야 중심의 건국설화임을..

동아시아 역사 2017.07.19

우리민족 2~3세기 여러 나라들과 삼한

2~3세기의 여러 나라 2~3세기 한반도와 만주 일대에는 여러 나라가 있었습니다. 가장 북쪽에는 부여, 압록강 유역에는 고구려가 이미 큰 세력을 형성했습니다. 한강 유역과 서쪽 바다 근처 평야 지대에는 마한, 남쪽 바다 근처에는 변한, 동쪽 바다 근처 산간지역에는 진한이 있었는데, 모두 합해 삼한이라고 부릅니다. 삼한은 지금 시와 군 크기와 비슷한 작은 나라 중 하나였습니다. 이 밖에 한반도 동해안의 북쪽 지역에는 옥저와 동예가 있었습니다. 삼한, 옥저, 동예 등은 절대적 권력을 지닌 왕이 아직 등장하지 않았고, 행정, 세금, 군대 등의 제도를 잘 갖추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이렇게 한반도와 만주지역의 여러 나라는 서로 경쟁하면서 고대국가로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삼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옛 기록을 ..

동아시아 역사 2017.07.08

일본 국보 미륵보살반가사유상, 백제가 만들었나 신라가 만들었나

일본 고류지 미륵보살반가사유상 (일본 국보) 전체 높이는 123.5cm이며 보살상 앉은키는 83.3cm이다. 일본 고류지의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일본의 국보이다. 백제로부터 건너갔거나 백제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국보 83호 금동 미륵보살반가상과 쌍둥이처럼 닮았다. 보살상은 왼쪽 무릎 위에 오른쪽 다리를 얹어 반가좌를 틀고 오른쪽 손끝은 오른뺨 위에 댄 사유의 자세를 하고 있다. 반가사유상은 석가모니가 왕자였던 시절에 상념에 빠져있던 모습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미륵보살은 56억 7천만 년 뒤에 이 세상에 나타나 중생을 제도해 줄 부처이다. 도솔천에 상주하면서 장차 용화수 아래에서 중생을 제도하기를 기다리는 미륵보살은 출가 이전에 고뇌하던 왕자의 모습과 닮았다. 이러한..

동아시아 역사 2017.06.14

복원된 백제의 배와 치수들, 그리고 자세한 사진

백제 사람들은 배를 만드는 기술이 뛰어났다. 일본에 가서 배를 만들어 주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백제의 배는 백제방百濟舫 또는 백제선百濟船으로도 불렸다. 배의 바닥은 편평하고 돛은 1개인 것이 특징인데, 돛이 2개라는 설도 있다. 선장 (Length of Hull) : 10.35m (34.5척)전장 (Length over All) : 12.25m (40.8척) - 옆에서 바라봤을 때, 닻이 닿기 전까지를 선장, 닻까지 포함한 전체 길이를 전장이라 함. 선고 (Height) : 1.50m (5.0척)선광 (Breadth Molded) : 3.45m (11.5척)- 정면에서 바라봤을 때의 높이와 폭. 닻줄 - 닻을 메어다는 길게 연결한 밧줄 닻 - 배가 떠나가지 않고 머물러 있게 하려고 물속에 내리는 기구..

동아시아 역사 2017.06.13

아리수(한강)를 건넌 고구려 군사와 일상 생활

아리수를 건넌 고구려 4세기에 고구려는 낙랑군과 대방군을 축출하는 등 정복 전쟁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396년 광개토왕은 백제를 공격해 58개 성 700개 마을을 빼앗고, 아리수阿利水(한강)를 건너 백제 아신왕의 항복을 받고 돌아갔다. 이후 475년 장수왕이 백제의 도읍인 한성漢城을 함락시키고 한강 유역을 장악하였다. 고구려는 한강 유역의 요충지에 크고 작은 군사시설을 만들고 군현을 설치했으며, 551년 백제와 신라 연합군의 공격을 받기 전까지 이 지역을 76년간 지배하였다. In 396, King Gwanggaeto of Goguryeo attacked Baekje across the Arisu(Hangang River), returned home after the surrender of King As..

동아시아 역사 2017.06.06

가야의 대외 교류 (백제, 신라, 중국, 일본과의 교류)

가야의 대외교류 가야의 많은 나라가 낙동강과 그 지류, 그리고 남쪽 바다 가까운 곳에 있었다. 육지는 물론이고 강과 바다로 이어진 물길로 많은 사람과 물자가 오갔는데, 가야 지역의 특산품 중 하나는 철鐵이었다. 전기 가야연맹을 이끈 금관가야는 우수한 철을 생산해 한韓, 예濊, 왜倭와 서북쪽의 낙랑, 대방군에 공급한 것으로 알려진다. 철을 만드는 기술은 단단한 그릇을 만드는 기술로도 이어졌다. 5~6세기에 가야는 한반도와 일본 열도를 잇는 중요한 통로였다. 백제와 왜의 사신 모두 가야를 거쳐 바다를 건넜다. 비록 6세기 중엽에 가야 제국이 멸망하였지만, 가야 사람들이 개발하고 운영한 교통, 교역 네트워크는 여전히 남아 동아시아의 사람, 기술, 문화를 더욱 풍요롭게 하였다. (5세기엔 고구려 평양, 백제 한..

동아시아 역사 2017.06.05

백제의 고구려, 신라, 가야, 왜, 중국과의 교류

고구려, 신라, 가야와의 교류 4세기 낙랑樂浪, 대방帶方이 한반도에서 쫓겨난 후 백제는 고구려와 중국-한반도-일본을 잇는 동아시아 교역망을 장악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였다. 371년 근초고왕의 평양성 공격으로 고국원왕이 패사敗死한 이후 근구수왕, 진사왕, 아신왕, 개로왕대까지 총 15회의 전쟁을 되풀이했다. 백제는 신라와 왕권 강화와 대외진출의 필요성으로 3세기까지 간헐적으로 대립하였다. 4~5세기에는 고구려와의 동아시아 교역망 쟁탈전과 고구려 남진 정책으로 이해관계에 따라 때로는 신라를 견제하고, 때로는 동맹을 맺기도 하였다. 백제와 가야 소국들은 동맹 관계였다. 백제는 가야지역을 거점으로 왜와 안정적으로 교류하였고, 가야도 철의 국제 무역과 중국과의 교류에 백제의 도움을 받았다.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동아시아 역사 2017.05.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