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역사

대가야와 소가야, 철기 문화와 무덤 (포상팔국의 난)

믿을만한 건강정보 2017. 8. 11. 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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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가야小加耶


소가야는 삼국지 동이전에 실린 변진 12개국 가운데 고자미동국이 발전한 나라이다. 고자미동국은 고자국古自國, 고사포古史浦, 고차古嗟, 구차久嵯, 소가야小加耶 등으로 기록되었으며, 중심지는 경상남도 고성이었다.


소가야는 해상 활동을 기반으로 성장하였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소가야를 비롯한 해안지역의 8개국이 금관가야 또는 아라가야를 공격했다는 기록이 있다.


구멍있는 작은 항아리. 가야구멍있는 작은 항아리. 가야


구멍있는 작은 항아리


큰 입 항아리나 긴 목항아리의 몸통 중앙에 작은 구멍이 있는 토기를 말한다. 주로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전남 서해안부터 경남 남해안에 걸친 해안 지역에서 출토되었다.


일본의 스에키에서 이러한 특징이 나타나며, 가야에서는 고성 지역에서 많이 출토되었다. 이처럼 고성 지역 고분군에서 출토된 구멍 있는 작은 항아리는 영산강 유역 및 왜와의 교류를 시사하고 있다.


이른바 포상팔국浦上八國의 난이라 불리는 이 사건은 낙동강 하류의 해상교역권을 두고 벌어진 전쟁이었다. 5세기 중엽 이후 대가야와 아라가야의 세력 성장으로 교역망이 다원화되었고 해상활동을 기반으로 한 소가야의 해상 활동도 활기를 띠어 5~6세기에 전성기를 맞이했던 것으로 보인다.


532년 금관가야의 멸망 이후 신라가 본격적으로 가야 지역에 진출하였고 554년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가 신라에 크게 패하면서 소가야는 신라의 강력한 군사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562년에 신라가 대가야를 병합하였는데, 비슷한 시기에 소가야도 신라에 병합되면서 멸망하였다.


명칭

문헌명

편찬시기

변진고자미동국弁辰古資彌凍國

삼국지三國志

3세기

구차久嗟, 고차국古嗟國

일본서기日本書紀

720년경

고사포古史浦, 고자군古自郡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년

고자국古自國, 소가야小加耶

삼국유사三國遺事

1281년


말띠꾸미개, 가야말띠꾸미개, 가야



소가야의 무덤


소가야를 대표하는 무덤은 고성의 송학동 고분군과 내산리 고분군이다.


두 고분군에서는 봉분을 먼저 쌓고 이를 되 파낸 뒤 돌방 또는 덜덧널을 만드는 흙무지무덤이 발견되었다. 이런 방식은 오랜 기간 주검을 덧붙여 묻는 추가장의 특징을 지니며, 영산강 유역에서 널리 유행하였는데, 가야 지역에서는 고성에서만 확인되었다.


무덤 규모와 출토유물을 근거로 두 고분군은 5세기 후반부터 6세기 전반까지 소가야의 지배 집단이 조성한 것으로 추정한다.


뚜껑있는 접시, 가야뚜껑있는 접시, 가야



포상팔국浦上八國의 난


삼국사기 신라본기 나해이사금 14년조와 열전 물계자조, 삼국유사 피은避隱 물계자勿稽子조에는 이른바 '바닷가 8개국의 가라(안라) 침공'사건에 대한 기록이 있다. 흔히 포상팔국의 난'이라고 하는데, 낙동강 하류의 해상 교육권을 두고 소가야를 포함한 해안지역의 8개국이 금관가야 또는 아라가야를 공격한 사건이다.


대체로 금관가야를 공격했다는 것이 학계의 중론이다.


포상팔국의 공격 추정로포상팔국의 공격 추정로


바닷가 8개국에 대해서는 문헌 기록이 분명치 않다. 8개의 나라 가운데 골포骨浦, 칠포柒浦, 고사포국古史浦=고자국古自, 보라국保羅, 사물국史勿 등의 이름만 기록에 남아 있다.


문헌에는 포상팔국의 난이 나해이사금(196~230년) 때 일어났다고 적혀 있지만, 대게 3세기 말~4세기 초, 5세기 중반, 6세기 중반, 7세기 초 등으로 시기를 늦춰 해석한다.


고령 출투 투구, 갑옷, 쇠도끼. 가야고령 출투 투구, 갑옷, 쇠도끼. 가야



대가야大加耶


대가야는 변진 12국 가운데 반로국半路國이 발전한 나라로서 반파叛波-伴跛로도 불렸으며 중심지는 고령이었다.

고령은 한때 가라加羅, 상가라도上加羅都로도 불렸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가야 산신이 천신과 결합해 대가야왕을 낳았다는 건국 설화가 전해진다.


3~4세기에 대가야는 가야 연맹체를 이끌던 김해 금관가야의 영향을 받으면서 성장하였다. 농업 생산력을 바탕으로 제철 기술을 도입하고 야로철산冶爐鐵山을 개발함으로써 5세기에 크게 도약하며 가야 연맹을 주도하였다.


그리고 479년 중국 남제로부터 보국장군본국왕輔國將軍本國王 작호를 받으며 국제사회에서 상당한 정치적 위상을 확보하였다.


가야 미늘쇠 유물가야 미늘쇠 유물


대가야의 군사 활동은 주로 섬진강 유역과 남쪽 바닷가로 향했다. 중국, 왜와의 교통로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때때로 백제와도 충돌했으나 신라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백제와는 대체로 우호관계를 유지하였다. 554년 대가야는 백제의 연합군으로 관산성 전투에 참여하였다가 대패하였으며, 결국 562년 신라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고 멸망하였다.


명칭

문헌명

편찬시기

변진미오야마국弁辰彌烏邪馬國, 변진반로국井康半路國

삼국지三國志

3세기

반파叛波

양직공도梁職貢圖

6세기

반파伴跛

일본서기日本書紀

720년경

가라국加羅國, 가야加耶, 대가야국大加耶國, 상가라도上加羅都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년

대가야大加耶

삼국유사三國遺事

1281년


가야 쇠못, 고령 자산동 고분가야 쇠못, 고령 자산동 고분



대가야의 철기문화


대가야는 낙동강을 통해 금관가야와 교류하였다.

당시 최대의 선진문물인 철기문화도 금관가야로부터 받아들였다. 4세기에 대가야는 철제농기구를 사용함으로써 농업생산력을 높였으며, 5세기에는 야로철산을 개발하는 등 제철기술을 국가발전의 동력으로 이용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야로현이 해마다 9,500근에 달하는 정철을 국가에 바친다는 기록이 있는데, 고대의 야철산업 전통을 이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고령지역의 대가야 무덤에서는 각종 무기류와 방어구, 축소모형 철기가 많이 출토되었다.


5세기 말에는 대가야가 섬진강 유역으로 진출해 운봉고원의 철산지를 장악하였다. 그 증거로서 남원 월산리 고분군과 두락리 고분군에서 출토된 대가야계 자루솥, 고리자루큰칼, 말갖춤류, 투구, 갑옷 등에 출토되기도 한다.


출처 - 한성백제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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