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역사

대가야의 성장과 쇠퇴 (사다함의 신라군에 멸망)

믿을만한 건강정보 2017. 9. 8. 15:50

3~4세기 김해의 금관가야가 가야 제국諸國의 선진국가로서 연맹을 주도하던 시절에 대가야는 금관가야의 영향을 받으면서 성장하였다. 그리고 농업생산력을 바탕으로 제철 기술을 도입하고 야로철산冶爐鐵山을 개발함으로써 5세기에 획기적인 국가발전을 이루었다.


마침 4세기 말부터 고구려가 백제를 누르고 남쪽으로 군사를 보내 낙동강 유역에까지 진출함으로써 금관가야를 비롯한 해안지역의 국가들이 타격을 입자 그동안 내륙에서 착실히 성장해온 대가야가 더욱 급속히 성장할 수 있게 되었다.


반운리 고분군 출토 쇠도끼 쇠창 굽은칼반운리 고분군 출토 쇠도끼 쇠창 굽은칼


지산동 고분군 출토 가야 덩이쇠지산동 고분군 출토 가야 덩이쇠


중국의 남제서 동남이전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가라국은 삼한의 종족이다. 건원 원년(479)에 국왕 하지가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 조서를 내려 "널리 헤아려 비로소 오르니 먼 곳의 오랑캐가 두루 교화되는구나. 가라왕 하지는 동쪽 바다 바깥 먼 곳에서 정성껏 폐백을 받들었으니 보국장군본국왕 벼슬을 줄 만하다"고 하였다.


가라왕 하지를 금관가야 왕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대가야 왕이라는 것이 학계의 통설이다.


5세기 후반에는 이미 금관가야의 세력이 많이 위축되고, 대신 대가야가 두각을 나타내었기 때문이다. 대가야가 백제의 도움을 받지 않고 단독으로 사신을 파견했다는 견해도 있지만, 남제로 오갈 사신선과 인력 및 바닷길 확보 등 대가야로서는 백제의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부분이 많아서 더 구체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대가야의 세력 범위대가야의 세력 범위


가라왕 하지는 보국장군에 임명되었는데, 비록 백제의 진동장군鎭東將軍, 왜의 안동장군安東將軍 보다는 낮은 지위지만 같은 3품호였으므로 국제사회에서 상당한 정치적 위상을 확보했다고 할 수 있다.


마침 고령에서 출토된 것으로 알려진 6세기 중엽의 뚜껑 있는 긴목항아리에 '大王대왕'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주목된다. 6세기 중엽경 대가야에서 만든 그릇이므로 대가야 왕이 '대왕' 칭호를 사용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는 당시 대가야 왕이 지녔던 권력과 군사적 자신감이 상당했음을 나타낸다.


대왕 새김 뚜껑이 있는 긴목항아리대왕 새김 뚜껑이 있는 긴목항아리


대가야의 군사 활동은 주로 남쪽으로 향했다. 서쪽은 험준한 백두대간과 그 너머의 백제 때문에 멀리 진출하기 어려웠으며, 동쪽과 북쪽은 한창 영역을 넓히던 신라와의 충돌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서기에는 6세기 초에 반파국(대가야)이 기문己汶, 대사帶沙, 자탄子呑 등지를 두고 백제와 군사적으로 다투었다는 기록이 실려 있는데, 사실이라면 대가야의 군사력이 남원(기문), 하동(대사) 등 섬진강 유역에까지 이른 것이어서 영역이 꽤 넓었다고 볼 수 있다.


고령 지산동 고분군에서 출토되는 대표적인 토기 양식들이 합천 삼가 고분군, 산청 중촌리 고분군, 함양 상백리 고분군, 남원 월산리 고분군 등지에서도 출토되어 기록을 뒷받침한다.


전북 남원은 섬진강 상류, 경남 하동은 섬진강 하류에 해당한다. 고령의 대가야가 서쪽 또는 남쪽 바다로 나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목이므로, 대가야가 중국, 왜와 교통하기 위해 강대국 백제와의 군사적 충돌조차 피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516년, 백제가 대가야로부터 기문 지역을 빼앗았다. 이로써 대가야와 백제의 우호 관계는 깨졌다.


대가야의 뚜껑있는 굽다리 항아리, 고령 지산동 고분군대가야의 뚜껑있는 굽다리 항아리, 고령 지산동 고분군


백제에 대항하기 위해 대가야는 신라를 이용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법흥왕 9년(522)조의 '봄 3월에 가야국 왕이 사신을 보내 혼인하자고 청하니 왕이 이찬 비조부의 누이를 보냈다'는 기록과 일본서기 계체기 23년(529)조의 '가라왕이 신라 왕녀에게 장가들어 마침내 아이를 두었다'는 기록은 대가야와 신라 사이에 화친우호가 이루어졌음을 나타낸다. 


그러나 일본서기 계체기 23년 조의 이어진 기사는 이렇다.


신라가 처음 왕녀를 보낼 때 100명의 함께 보내 왕녀의 종으로 삼으니 받아서 여러 현에 나누어 두었는데, 신라 의관을 입게 하였다. 아리사 등이 그들이 옷을 바꿔 입은 것에 화를 내며 사신을 보내 거두어들이게 하니, 신라가 크게 부끄러워하며 왕녀를 다시 불러들이고자 하여,


"지난번 그대의 청혼을 받아들여 내가 혼인을 허락하였으나 이제 이렇게 되고 말았으니 왕녀를 돌려 보내줄 것을 청한다"고 하였다.


가라의 기부리지가己富利知伽가 "부부로 짝을 지었는데 어찌 다시 헤어지며 또 아이가 있는데 어찌 버리고 가겠는가"라고 대답하였다. 마침내 지나는 길의 도가, 고파, 포나모라 3성을 빼앗고, 또 북쪽 경계의 5성을 빼앗았다'라고 한 것을 보면 대가야와 신라의 우호는 오래가지 않았던 듯하다.


대가야 그물추, 고령 지산동 고분군대가야 그물추, 고령 지산동 고분군


대가야는 신라와 사이가 나빠지자 가야 제국의 결속력을 강화하고 백제와의 우호 관계를 회복하려 노력한 것으로 보인다. 6세기 중엽부터 대가야에서 굴식돌방무덤과 불교 문화 영향이 나타나고 백제 토기를 비롯한 백제계통 유물이 다수 출토되기 때문이다.


551년, 백제와 신라가 함께 고구려를 공격해 한강 유역을 빼앗았을 때 가야 국가들도 백제를 따라 전쟁에 동원되었다. 그리고 554년 관산성 전투에서도 백제를 도왔다. 그러나 백제 성왕이 신라 복병에 살해되고 백제-가야 연합군 3만 명이 몰살당함으로써 전쟁에 참여한 대가야도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고 말았다.


562년, 신라 진흥왕이 대가야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명하였다. 신라군의 총사령관은 이사부異斯夫였고 선봉장은 사다함斯多含이었다고 한다. 귀당 비장貴幢裨將 사다함이 거느린 신라군에 불의의 공격을 받은 대가야는 변변히 대항하지 못하고 멸망하였다.


출처 - 한성백제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