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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는 왜 서주에서 대학살을 벌였을까?

믿을만한 건강정보 2017. 9. 10. 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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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는 왜 서주에서 대학살을 벌였을까?


기록 1. 조조, 삼국지 속 서주 대학살 기록

기록 2. 조조, 후한서와 자치통감 대학살 기록


위 기사들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삼국지나 후한서가 사망자 숫자나 사건순서에 있어 약간 다른데 자치통감은 대체로 삼국지 쪽을 참조했습니다. 저도 이 자치통감의 기록에 따랐습니다)


193년 1차 침공 → 팽성 전투, 조조 승리 → 팽성(사수 일대)에서의 갱살 →도겸이 물러나 팽성 일대를 수비. 조조가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함 → 하비 일대를 공격해 도륙 → 군량 부족으로 회군

194년 2차 침공 → 낭야, 동해 일대 공략 → 담현 동쪽에서 유비, 조표 격파, 양분 함락 →여포의 연주 습격으로 회군 (행군 중에 고을을 다수 잔멸시킴)


1) 도륙, 잔멸, 잔륙 등등으로 다양하게 묘사되었듯, 조조의 학살 행위 자체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로 보입니다. 심지어 조조의 본기인 무제기에서조차 (다소 애매하게나마) 팩트 자체가 있었다는 건 명시하고 있고요.


조조 서주 대학살조조 서주 대학살


2) 한 가지 흥미로운 건 조만전에서는 ‘백성들 수만을 갱살해서 사수가 흐르지 못했다’고 구체적으로 적고 있으나, 진수는 도겸전에서 ‘사망한 자가 수만에 이르러 사수가 흐르지 못했다’는 식으로 적고 있습니다.


일반백성들이 아니라 싸움에서 패한 전사자의 시체로 강이 막힌 거로 읽힐 수도 있습니다.


만약 조만전 기사가 사실이라 가정할 때, 팩트 자체를 따지자면 진수의 저 표현도 분명 틀린 건 아니지만 충분한 표현이라 보긴 힘들고, 단어를 신중하게 골라서 썼다는 느낌이 듭니다.


상상의 나래를 좀 더 펼쳐보자면, 이른바 ‘팩트는 있으나 진실은 없다’는 케이스는 혹 아닐지?...  한편, 자치통감에서는 위에서 보듯 위 조만전 기사(학살행위의 좀 더 상세한 정황)를 대거 채택해 본문에 반영해 놓았습니다.


삼국지 조조. 솔선수범삼국지 조조. 솔선수범


3) 조조는 왜 이런 행동을 했을까?

이런 학살행위를 어떤 냉정한 이해타산이나 계산에 기반을 둔 것으로 볼 수 있을까요?


단지 한 구석 땅을 차지해 군림하거나 주변을 약탈하고 한몫 잡겠다는 것이 아니라, 천하를 품고자 하는 야망을 품은 조조에게 말이지요.

이른바 ‘시범케이스’로서 자신에 적대한 자에게 본보기를 보이려는 것이었다는 식의 설명이 제시될 수 있겠죠.


그러나 이 서주민들이 애초부터 조조에게 극히 적대적이거나 불온했던 것도 아니고... 이런 식의 살육은 오히려 정반대의 효과, 즉 살육자에 맞서 똘똘 뭉쳐 내 고향을 지키자는 반응이 나오는 게, 또 그런 극렬한 반감을 예상하는 게 정상 아닐까요?


순욱의 진언이나 그 뒤 유비가 서주를 다시 점거하게 되는 사례를 볼 때 또한 실제로도 그러했고요.


두 해에 걸쳐서 지속해서 이루어진 일이니 한번 잠깐의 실수나 변덕은 아닐 테고, 결국, 감정이나 성격의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좀 비약해서 표현하자면, ‘아버지의 죽음에 복수하기 위해 도겸을 쳤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분을 삭이지 못해 이곳저곳 약탈하고 살육했다’  …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것 이외에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는 것 같습니다.


삼국지 조조. 서주 대학살삼국지 조조. 서주 대학살


그리고 이와 유사한 행동은 관도 전투에서 원소를 격파한 뒤에도 되풀이됩니다.


이른바 항복한 원소군 8만 갱살.


물론 이 건에 대해서는 삼국지나 후한서의 원소전에서 ‘거짓 항복한 자를 죽인 것’이라는 식으로 기술해 좀 더 변명의 여지가 있긴 합니다.


그러나 ‘거짓 항복’이라는 말이 조조의 행위를 옹호하기 위한 사서의 가필이 아니라 곧이곧대로 사실이라 해도, 무려 8만이라는 숫자를 파묻어 죽인다는 건 분명 평범한 결단은 아닐 테죠.


삼국지 대학살. 원소 8만 생매장삼국지 대학살. 원소 8만 생매장


조만전에서 조조를 평하기를 혹학변사酷虐變詐하다, 즉 ‘혹독잔인하고 요리조리 속임수를 잘 쓴다’고 했는데 다른 개인적 일화들은 차치하고라도 이 학살 건을 보면 이 표현이 맞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뒤에 어느 정도 기반을 얻은 뒤나 스스로 여유가 있을 때는 대체로 대인의 풍모를 보였으나, 그렇지 못하던 초반, 위급하고 절박한 상태에서 튀어나온 이런 행동이야말로 오히려 조조의 본질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요.


그리고 이 문제는 조조라는 인격 전체로 보면 일부이긴 하나, 이런 잔인함과 이것이 빚어낸 서주학살사건은 결국 조조가 생전에 중국을 통일하는 것을 가로막는 주요한 걸림돌이었다고 짐작됩니다. 특히 조조가 남방을 정벌할 때 유비를 따라 피난하는 십여 만의 형주민들이 그 단적인 예겠죠.


비록 그 직전, 새로 점령한 하북 백성들과 호족들을 안무하는데 적지 않은 공을 들였지만, 이 ‘서주 학살의 추억’을 당시 중국 민중들은 여전히 오래도록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다...그런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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