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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도겸의 서주 학살 기록 (조조의 복수)

믿을만한 건강정보 2017. 8. 19. 11:25

[삼국지] 도겸의 서주 학살 기록 (조조의 복수)


[삼국지] 무제기

초평4년(193년) 여름, 태조가 정도定陶(제음군 정도현)로 회군했다. 하비의 궐선闕宣이 무리 수천 명을 모으고 천자天子를 자칭했다. 서주목 도겸陶謙은 그와 함께 군사를 일으켜 태산군의 화華현, 비費현을 차지하고 임성任城을 공략했다.


가을, 태조가 도겸을 정벌해 10여 성을 함락시켰으나 도겸은 성을 지킬 뿐 감히 나오지 못했다.


흥평 원년(194년) 여름, 순욱, 정욱에게 견성을 지키게 하고 다시 도겸을 정벌하여 다섯 성을 함락시키니 공략한 땅이 동해(東海-서주 동해군)에까지 이르렀다.

돌아오는 길에 담郯(동해군 담현)을 지나는데 도겸의 장수 조표曹豹가 유비劉備와 함께 담郯현 동쪽에서 태조를 요격했다.


태조가 이를 격파하고 마침내 양분襄賁(동해군 양분현)을 공격해 함락시켰고 지나는 길에 잔륙(殘戮-살육)한 곳이 많았다. 때마침 장막이 진궁과 함께 여포를 맞아들이자 군현들이 모두 호응했다.


조조와 도겸의 위치, 서주 사수의 강줄기조조와 도겸의 위치, 서주 사수의 강줄기

(사수는 서주의 중심을 관통. 조조는 서주의 인구가 가장 많은 그 중심부에서 학살을 자행)


[삼국지] 도겸전

초평 4년(193년) 태조가 도겸을 정벌하니 10여 성을 공격해 함락시키고 팽성에 이르러 크게 싸웠다.


도겸군이 패주하고 죽은 자가 수만에 이르니 사수泗水가 (막혀) 흐르지 못할 정도였다. 도겸은 물러나 담郯현을 지켰다. 태조는 군량이 부족해 군을 이끌고 퇴각했다.


흥평 원년(194년), 다시 동쪽을 정벌해 낭야와 동해의 여러 현을 평정했다. 도겸이 두려워하며 단양丹楊(양주 단양군, 도겸의 고향)으로 달아나 되돌아가려 했는데, 때마침 장막張邈이 배반해 여포를 맞아들이자 태조가 되돌아가 여포를 공격했다.


도겸의 도주 장막의 배신도겸의 도주 장막의 배신

(도겸은 고향인 단양으로 도주. 조조는 쫓으려 했으나 장막이 배신함)


[一] 오서 왈 – 조공의 부친이 태산에서 피살되자 도겸에게 그 허물을 돌리고 도겸을 정벌하고자 했는데 그가 강성함을 두려워하여 표를 올려 주군에 일시 파병罷兵(군대해산)을 명하도록 했다.


조공은 도겸의 상주문을 받아보고 그가 파병하지 않으려 함을 알고 이에 진격하여 팽성을 공격해 인민들을 다수 죽였다. 도겸이 군사를 이끌고 이를 공격하고 청주자사 전해 또한 군사를 이끌고 도겸을 구원하니 공은 군사를 이끌고 되돌아왔다.


신 송지가 보건대, 이때 천자는 장안에 있었고 조공이 아직 정무를 장악하지 않았을 때이니, 파병罷兵의 조서는 조 씨로부터 나올 수 없다.


삼국지 도겸 서주 조조삼국지 도겸 서주 조조


[삼국지] 순욱전 &  조만전(배송지 주)

(195년 조조가 여포와 겨루는 중에 다시 서주를 공격하려 제음군 승씨현에 주둔하자 순욱이 올린 진언 중) 전에 서주를 토벌할 때 위벌威罰이 실행되어 [二] 그 자제들이 부형父兄의 치욕을 생각하니 필시 사람마다 스스로 지키려 하며 항복하려는 마음이 없을 것입니다.


설령 격파할 수 있다 해도 가히 소유할 수는 없습니다.


[二] 조만전 왈 - 경사京師에서 동탁의 난을 만나자 인민들이 유이流移(유망, 유랑)하여 동쪽으로 나와 많은 이들이 팽성 사이에 의탁하고 있었다.


태조太祖(조조)가 당도하여 사수泗水에서 남녀 수만 명을 갱살坑殺하니 이 때문에 강물이 흐르지 못했다. 도겸이 그 군사를 이끌고 원무武原(팽성국 원무현)에 주둔하자 태조는 진격할 수 없었다.


군사를 이끌고 사수 남쪽을 따라 취려取慮, 수릉睢陵, 하구夏丘의 여러 현들(모두 하비국 속현들)을 공격해 모두 도륙하니, 닭이나 개조차 다 없어지고 폐허가 된 읍에는 다시는 행인을 볼 수 없을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