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역사

가야의 대외 교류 (백제, 신라, 중국, 일본과의 교류)

믿을만한 건강정보 2017. 6. 5.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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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의 대외교류


가야의 많은 나라가 낙동강과 그 지류, 그리고 남쪽 바다 가까운 곳에 있었다.

육지는 물론이고 강과 바다로 이어진 물길로 많은 사람과 물자가 오갔는데, 가야 지역의 특산품 중 하나는 철鐵이었다. 전기 가야연맹을 이끈 금관가야는 우수한 철을 생산해 한韓, 예濊, 왜倭와 서북쪽의 낙랑, 대방군에 공급한 것으로 알려진다.


철을 만드는 기술은 단단한 그릇을 만드는 기술로도 이어졌다.


5~6세기에 가야는 한반도와 일본 열도를 잇는 중요한 통로였다. 백제와 왜의 사신 모두 가야를 거쳐 바다를 건넜다.


비록 6세기 중엽에 가야 제국이 멸망하였지만, 가야 사람들이 개발하고 운영한 교통, 교역 네트워크는 여전히 남아 동아시아의 사람, 기술, 문화를 더욱 풍요롭게 하였다.


5세기 동아시아 교역 항로5세기 동아시아 교역 항로

(5세기엔 고구려 평양, 백제 한성과 죽막동, 신라 금성을 중심으로 중국의 츠산, 난징이 주요 교역 항로였음)



백제와의 교류


금관가야와 백제

마한에 속하였던 백제와 변한의 후예인 가야 제국 사이에 직접적인 교섭과 교류가 이루어진 것은 4세기 후반기이다.


백제는 왜와 교류하기 위해서 반드시 가야 지역을 거쳐야 했다. 늦어도 4세기 중엽에는 백제와 가야 제국 사이에 우호적인 관계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금관가야의 중심이었던 김해와 그 주변 지역에서 출토된 마한 또는 백제양식 토기와 금박유리옥은 가야와 백제의 교류를 상징하는 유물이다.


나주 용호고분군과 연기 용호리 고분군, 고흥 신촌리 고분군 등에서는 김해 양동리 고분군, 대성동 고분군 출토품과 유사한 덩이쇠鐵鋌, 고사리무늬 장식 철검, 굽다리 접시 등이 발견되었다.


김해 양동리 고분군 항아리와 목걸이



대가야를 비롯한 가야 제국과 백제


4세기 말~5세기 초 고구려와 신라의 공격으로 금관가야를 비롯한 남해안 일대의 가야세력이 큰 타격을 받았다.


이후 내륙지방의 대가야가 가야연맹을 이끌었는데, 고령의 지산동 고분군과 합천의 옥전 고분군 등에서는 백제 계통 금동관과 귀걸이, 고리자루큰칼 등의 위세품이 출토되어 5세기 중엽부터 대가야와 백제가 우호적인 관계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서울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그리고 전라남도의 생활유적과 고분군 등에서 5세기 무렵의 아라가야와 소가야 계통의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소가야지역의 고성 송학동 고분군과 내산리 고분군 등에서는 백제 영산강계 토기가 발견되었다.


고성 송학동고분군, 내산리고분군. 백제 영산강계 토기



신라와의 교류


가야와 신라는 지리적, 문화적으로 가깝고 비슷한 특수 관계이다. 발굴조사 성과에 따르면, 3세기 말 경주-울산 지방과 부산-김해 지방은 무덤과 토기를 기준으로 문화권을 분명하게 나누기 어렵다.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이르면 낙동강을 경계로 이른바 서쪽의 가야식 토기와 동쪽의 신라식 토기로 나뉘기 시작한다.


5세기 후반부터 6세기 전반에 해당하는 식리총, 호우총 등 경주의 왕릉급 무덤에서 대가야계 용 봉황무늬 고리자루큰칼이 출토되었으며, 대가야의 고령 지산동 고분군에서는 신라의 세잎고리자루 큰 칼과 굽다리접시가 출토되었다.


합천 옥전 고분군에서는 신라의 영향을 받아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금귀걸이와 금동관모가 출토되었고, 고성 송학동 고분군과 내산리 고분군에서도 신라양식 토기가 발견되었다.


신라양식 굽다리 접시, 토기



중국과의 교류


삼한 시기에 낙랑군과 대방군은 변진에서 철을 구해갔다.


사천 늑도유적, 창원 다호리 1호 무덤 등 해안지역에서는 한漢나라 때 유물이 다수 출토되었다. 바다를 통한 교역, 교류를 암시한다.

김해 양동리 고분군에서 출토된 청동거울과 청동세발솥 등의 중국계 유물은 3세기 이전 낙랑과 가야지역의 교역을 입증한다.

대성동고분군에서는 3세기 말 이후의 중국 청동 그릇, 칠그릇 등 중원계 유물과 청동솥, 금동제/청동제 말갖춤, 쇠뚜껑 등 북방계 유물이 모두 출토되었다.


5~6세기에는 가야지역에서 중국계 유물을 많이 찾아보기 어렵지만, 남제서 가라국전에 479년 가라왕 하지荷知가 사신을 보내와 보국장군輔國將軍 본국왕本國王 작호를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김해 가야 유물. 청동 유물



일본과의 교류


일본 내 가야 관련 유물 출토지역일본 내 가야 관련 유물 출토지역


삼국지 왜인전에는 대방군에서 왜로 가려면 구야한국에서 바다를 건넌다는 기록이 있다.

왜가 낙랑, 대방과 교류할 때 지금의 김해지역이 중간기착지였다. 4세기 이후 고구려의 남진정책에 맞서 백제-가야-왜의 군사연합이 이루어졌으므로 대성동 고분군을 비롯한 가야 지역에서는 왜계 유물이 많이 출토되었다.


비슷한 시기 일본의 긴키(간사이 近畿) 지방에서도 가야의 경질 토기를 본받아 만든 스에키須惠器가 제작되었고 실용적이고 선진적인 가야계통의 철기가 전해졌다.


오사카 후쿠이 와카야마의 가예 유물


5세기 중엽 이후, 왜와의 교역활동을 주도한 곳은 대가야였다. 일본열도 각 지역의 수장묘에서는 대가야 계통의 위신재인 금동관과 금귀걸이를 비롯하여 철제 무기와 말갖춤 등이 출토되었다.


5세기 일본의 세토나이카이 연안에 전해지던 고령양식 경질 토기도 6세기 이후 서일본 각지에서 발견되어 대가야가 일본 여러 지역의 호족들과 교섭한 것을 알 수 있다.


출처 - 한성백제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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