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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화성박물관] 조선 임금 영조와 정조 어필 (홍재전서, 탕평비 등)

[수원화성박물관] 조선 임금 정조와 영조 어필 홍재전서弘齋全書 조선 임금 정조의 시문, 윤음, 교지 및 편저를 모은 전집으로 총 184권 100책이다. 1799년(정조 23) 편집하기 시작하여 총 190편으로 정리하였으며, 정조 사후 말년의 저술들을 덧붙여 1801년(순조 원년)에 재편집하고 1814년(순조 14)에 간행되었다. 춘저록春邸錄이라는 표제 아래 세손 시절의 시문 정리를 시작으로 조선 임금 정조 자신의 글뿐만 아니라 신하들과의 응답 내용, 해당 관서의 기록에 대한 국왕의 최종 판결, 정조 재위 기간에 편찬된 서적의 해제解題 등 다양한 내용의 글이 포함되어 있다. 탕평비蕩平碑1742년(영조 18) 영조가 탕평책을 널리 알리고 편당을 막고자 성균관 입구 반수교 옆에 세운 비석이다. 앞면에 예기禮記..

동아시아 역사 2017.10.17

조선 임금 정조 황금갑옷, 국화 그림, 팔가백선, 정조 어필 비망기 (수원화성박물관)

조선 임금 정조 황금갑옷, 국화 그림, 팔가백선, 정조 어필 비망기 (수원화성박물관) 조선 임금 제22대 정조 조선 후기 문예 군주이자 개혁 군주로 규장각을 설치하여 학문을 발전시키고 장용영을 창설하여 왕권을 강화하였으며 탕평 정책을 추진하여 정국을 안정시켰다. 정조는 신분과 관계없이 뛰어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차별받던 서얼들을 등용하고 가난하고 소외된 백성들을 위한 정책을 펼쳤다. 더불어 국가 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한 다양한 개혁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조선 임금 정조는 오늘날 조선 시대 세종과 더불어 성군으로 추앙받고 있다. 특히 정조는 수원화성 축성과 신도시 수원 건설을 통하여 오늘날 수원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정조正祖 (1752~1800) 이름은 성祘 (규장전운奎章全韻에서 '성'으로 발음),..

동아시아 역사 2017.10.15

조선 정조대왕 어머니 혜경궁 홍씨 회갑연, 수원행차 그림(봉수당진찬연 칠순, 수원화성박물관)

조선 정조 어머니 혜경궁 홍씨 회갑연, 수원행차 그림(봉수당진찬연 칠순, 수원화성박물관) 왕실잔치 봉수당진찬연 (1795년 조선 정조의 수원행차 당시) 수원에 당도한 지 3일째 되는 날인 윤2월 13일 아침 8시 45분경, 드디어 예복을 입은 어머니 혜경궁의 등장과 함께 궁중음악이 흐르며 봉수당진찬연이 시작되었다. 이날의 주인공인 정조 어머니 혜경궁은 '오늘의 이 경사를 주상(조선 정조)과 더불어 만백성과 함께하겠노라'며 친정 식구와 함께 아들인 국왕이 마련한 잔치를 맘껏 즐겼다. 222년 전 화성행궁의 봉수당에서는 궁중음식이 차려지고 궁중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궁중무용이 공연되는 도성을 벗어난 최초의 왕실잔치가 밤늦게까지 성대히 거행되었다. 헌선도장수를 기원하는 춤으로 도교에서 복숭아는 장수를 상징한다...

동아시아 역사 2017.10.13

혜경궁 홍씨 회갑연을 다룬 화성능행도병(수원행차 때 제작)

혜경궁 홍씨 회갑연을 다룬 화성능행도병(수원행차 때 제작) 8일간의 축제 (혜경궁 홍씨 회갑연)1795년, 2년 전부터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시행된 조선 정조대왕의 수원행차는 한 치의 어긋남 없는 성공적인 행사였다. 8일간의 수원행차는 왕실뿐 아니라 백성들에게도 크나큰 의미를 지닌 행사였으며 정조대왕의 위대한 업적이었다. 정조대왕이 사도세자의 명예회복을 추진하는 것은 왕실의 위엄을 높이는 중대사였으며 혜경궁을 모시고 현륭원을 방문한 것은 효의 실천이었다. 수원에서 개최한 다양한 행사 중에서도 봉수당에서 진행된 혜경궁의 회갑잔치는 축제의 핵심이었고, 당대 최고의 격식과 예술성을 담은 왕실 잔치였다. 정조대왕은 회갑연 이후 거행된 양로연과 가난한 백성에게 쌀을 나눠주는 것이 혜경궁 홍씨의 뜻임을 분명히 하였..

동아시아 역사 2017.10.12

세설신어 하편, 유효표의 주해 (위진남북조)

세설신어 하편, 유효표의 주해 (위진남북조) 세설신어 下권은 전체 665페이지로 上권 444페이지, 中권 553페이지에 비해 양이 많다.세설신어 번역을 맡은 안길환 대표님의 세설신어 해제 10쪽, 세설신어 관계 연표 20쪽, 삼국시대와 진송晉宋 시대 세계표 8쪽, 마지막으로 각종 색인 50쪽이 추가되었기 때문이다. 유효표의 주해가 세설신어를 빛나게 해주었다면, 안길환 대표가 추가한 주변 정보들은 한글로 된 세설신어를 더욱 빛나게 해준다. 세설신어 상중하권 곳곳에 남아있는 안길환 대표의 주해 또한 세설신어 번역서의 빛을 더 밝히고 있다. 책의 맨 앞에 적힌 일러두기에도 나와 있듯, 송본宋本과 원본袁本을 대조하기 위해 각종 정사와 태평어람까지 참조하셨다. 저자의 노고가 담긴 주해 하나를 언급해 본다. 세설신..

동아시아 역사 2017.10.11

조선 정조대왕 수원행차 그림과 갑옷, 투구 (수원화성박물관)

조선 정조대왕 수원행차 그림과 갑옷, 투구 (수원화성박물관) 정조대왕의 갑옷과 투구1795년 윤2월 9일, 정조대왕은 수원행차 시 융복의 차림으로 창덕궁을 출발하였으나, 이튿날 장안문에 다다르자 군문軍門의 절차가 필요함을 밝히고 막차의 설치를 병조판서 심환지에게 명하여 갑주로 갈아입고 입성하였다. 또한, 윤2월 12일 정조대왕은 서장대에서도 군사훈련인 만큼 갑주차림으로 절차를 진행하였다. 서장대야조도 그림에서 장수들의 군복차림을 확인할 수 있다. 본 갑옷과 투구는 KBS 다큐멘터리 "의궤, 8일간의 축제"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현전하는 장수들의 갑옷과 문헌사료들을 토대로 복원된 재현품이다. 대모백은장 옥구 보도玳瑁白銀裝玉具寶刀목재로 만들어진 칼집과 손잡이의 외부를 대모玳瑁(바다거북의 등껍질)로 마감하여 제..

동아시아 역사 2017.10.10

조선 정조대왕 13차 수원 행차와 군복 (수원화성박물관)

조선 정조대왕 13차 수원 행차와 군복 (수원화성박물관) 이 포스트는 수원화성박물관에서 개최한 조선 정조대왕 수원 행차 행사에서 찍은 사진과 글을 소개합니다. 조선 후기 성군인라 칭송되는 조선 정조대왕은 탕평 군주이자 문예 군주로 규장각 설치, 장용영 창설, 수원화성 축성 등의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 특히 수원과는 특별한 인연을 맺어 재위 기간 동안 무려 13차례나 수원 행차를 거행하였습니다. 1789년 수원으로 옮겨 조성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에 매년 참배하기 위한 행차였습니다. 조선 정조대왕은 재위 20년이 되는 해인 1795년 을묘년 8일간의 성대한 수원 행차를 위해 6천 명이 넘는 수행원을 이끌고 화성행궁으로 향했습니다. 백성들과 함께 어머니 혜경궁의 회갑 잔치를 수원에서 베풀어 자식으..

동아시아 역사 2017.10.09

부산포해전3. 400여척 격파, 1592년 9월 2일 [임진왜란 이순신 전쟁]

부산포해전3. 400여척 격파, 1592년 9월 2일 [임진왜란 이순신 전쟁] 초2일 (이로부터 8일 후인 9월 11일 경상도 성주에서 김면의 의병 부대가 왜군을 격파했다.9월 16일에는 함경도 경성에서 정문부의 의병 부대가 왜군을 격파했다.그 뒤 10월 초6일에 진주에서 목사 김시민 등이 왜군을 무찌르고 성을 지켰다.10월 30일에 함경도 길주, 장평에서 정문부의 의병 부대가 왜군을 격파했다.11월에는 경상도 상주에서 정기룡 부대가 왜군을 격파했다.성주에서는 김면의 의병 부대가 7~14일에 걸쳐 왜군을 격파했다.10일 길주에서 정문부의 의병 부대가 왜군을 격파했다.) 싸우고 난 다음 날이다.또 한 번 쳐들어가서 적들의 소굴을 불 지르고, 배들을 전부 깨부술까 하였다. 그러나 위로 올라간 적들이 여러 곳..

동아시아 역사 2017.10.07

부산포해전2 절영도. 1592년 9월 1일 [임진왜란 이순신 전쟁]

부산포해전2 절영도. 1592년 9월 1일 [임진왜란 이순신 전쟁] 9월 초1일, 닭이 울자 출발하여 아침 8시쯤 몰운대를 지나자, 갑자기 동풍이 일고 파도가 넘놀아 간신히 배를 지탱하였다. 화준구미花樽仇未에 이르러 왜의 큰 배 다섯 척을 만나고, 다대포 앞바다에 이르자 왜의 큰 배 여덟 척, 서평포 앞바다에 이르러서 왜의 큰 배 아홉 척을 만났다. 절영도에 이르니 왜의 큰 배 두 척이 모두 기슭에 줄지어 정박하고 있었다.이어 3도 수사가 거느린 여러 장수와 조방장 정걸 등이 힘을 합하여 남김없이 두들겨 부쉈다. 배에 가득 실린 왜의 물건과 무기도 끌어내지 못하게 하고 모두 불살라 버렸다. 왜적들이 우리 기세를 바라보고 산으로 도망가서 머리를 베지는 못하였다. (부산포해전 대승의 시작 시기) 절영도 안팎..

동아시아 역사 2017.10.06

북제 무성제 고담이 태자 고위에게 선위한 이유

북제 무성제武成帝 고담이 태자 고위高緯에게 선위한 이유 북제 무성제 고담은 4번째 황제로 동위魏 권신 고환의 9번째 아들입니다. 효명제孝昭帝 고연高演의 동복동생으로 어머니는 누娄씨입니다. 황건皇建 2년인 561년 즉위했고, 하청河清 4년(565) 태자 고위에게 선위하며 태상황제太上皇帝로 물러납니다. 고담은 황제였던 4년 동안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설마 아무 생각 없이 태자에게 선위했을까요? 사실 고담이 아무 생각 없이 선위했을 가능성은 없습니다. 효소제孝昭帝 고연高演(고담의 친형)이 즉위할 때 고담은 우승상으로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었습니다. 오래지 않아 고연이 중병에 걸리자, 무성제 고담은 형제인 고원해高元海, 고귀언高歸彥 등과 몰래 모의해 병사를 일으키려 합니다. 그래서 점쟁이를 찾아가지만, 점쟁이..

동아시아 역사 2017.1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