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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조대왕 수원행차 그림과 갑옷, 투구 (수원화성박물관)

믿을만한 건강정보 2017. 10. 10. 09:02

조선 정조대왕 수원행차 그림과 갑옷, 투구 (수원화성박물관)


정조 대왕 갑옷 투구[조선 정조] 수원행차 갑옷


정조대왕의 갑옷과 투구

1795년 윤2월 9일, 정조대왕은 수원행차 시 융복의 차림으로 창덕궁을 출발하였으나, 이튿날 장안문에 다다르자 군문軍門의 절차가 필요함을 밝히고 막차의 설치를 병조판서 심환지에게 명하여 갑주로 갈아입고 입성하였다.


또한, 윤2월 12일 정조대왕은 서장대에서도 군사훈련인 만큼 갑주차림으로 절차를 진행하였다.


서장대야조도 그림에서 장수들의 군복차림을 확인할 수 있다. 본 갑옷과 투구는 KBS 다큐멘터리 "의궤, 8일간의 축제"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현전하는 장수들의 갑옷과 문헌사료들을 토대로 복원된 재현품이다.


대모백은장 옥구 보도, 정조 대왕 수원행차[조선 정조] 대모백은장 옥구 보도


대모백은장 옥구 보도玳瑁白銀裝玉具寶刀

목재로 만들어진 칼집과 손잡이의 외부를 대모玳瑁(바다거북의 등껍질)로 마감하여 제작한 환도다. 은으로 장식하고 코등이는 백옥을 사용하였으며, 칼자루에는 보도와 잘 어울리도록 중간에 매듭을 맺고 술을 달아 격식을 높였다.

이 칼은 칼집의 아랫마개 잠식, 윗마개 장식을 제외하면 철종 어진속의 어도御刀와 매우 유사한 형태를 보여 높은 신분의 인물이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을묘년 수원행차 때 정조나 최고 지휘관도 이러한 칼을 착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생전에 정조대왕의 갑옷과 투구 모습은?


정조대왕이 생전에 착용하였던 갑주의 모습은 그의 장례에 대해 기록한 정조국장도감의궤正祖國葬都監儀軌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이 자료에는 명기明器(부장품)로 제작된 갑옷과 투구에 대한 그림이 제시되어 있는데 평상시의 것을 1/5 크기로 축소하여 만든다고 밝히고 있다. 


정조국장도감의궤에 보이는 정조대왕의 투구는 첨주簷胄다. 첨주는 둥근 모자형 투구圓胃에 가장자리를 따라 챙을 붙인 투구를 말한다. 그리고 갑옷은 청릉화靑菱花로 만들었는데 9층九積의 찰札을 사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갑옷 거죽에는 9층의 찰을 고정한 두정頭釘을 그렸으며 갑옷의 가장자리綠鉓에는 자적색 가죽鹿皮을 둘러 장식하였다.


정조대왕 갑옷 정조국장도감의궤[조선 정조] 정조국장도감의궤에 그려진 정조대왕의 갑옷과 투구


이 기록을 통해 정조대왕은 챙이 있는 투구를 썼으며 갑옷은 안쪽에 9층의 찰을 대고 고정시킨 청색 두정갑頭釘甲을 착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일반 두정갑은 대부분 두석豆錫으로 만든 두정을 사용해서 만든 것이지만 국왕의 것이므로 도금한 것을 사용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두정갑옷 대신 황금갑옷이라는 묘사가 가능하였을 것이다.

4. 행복한 행차길


정조대왕은 6,300명이 넘는 수행원과 함께 어머니 혜경궁을 수원으로 모셔왔으며 친누이인 청연군주淸衍公主와 청선군주淸璿郡主가 동행하였다. 정조대왕은 가마를 타지 않고 혜경궁의 가마 뒤에서 어좌마御坐馬를 타고 어머니를 호위하였다.


을묘년 수원행차가 그려진 화성능행도에는 어가御駕가 지나는 길가에 수많은 백성이 늘어서서 행렬을 구경하는 모습이 보인다. 정조대왕의 수원행차는 이동하면서 펼쳐지는 하나의 장대한 예술 공연이자 볼거리였다.


이것은 정조대왕의 치밀한 계획과 더불어 개혁정치를 뒷받침하는 명신名臣들과 함께 이룬 노력을 결과였다. 정조대왕은 행차길 내내 백성들이 가까운 거리에서 국왕의 행렬을 구경할 수 있도록 하며 그들과 직접 대면하였다. 백성들은 임금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 자체가 큰 기쁨이었다.


수원 화성 박물관 상설전시장 정조대왕[조선 정조] 수원화성박물관 상설진시장의 정조대왕


을묘년 수원행차는 조선시대 그 어떤 국왕의 행차보다도 가장 장대하고 행복한 행차였다. 그야말로 행복왕의 행차, 행행幸行이었다.


5.정조대왕의 을묘년(1795) 수원행차


정조대왕 을묘년 수원행차[조선 정조] 을며년 1795년 수원행차


음악 소리가 차츰 가까워져 오자, 멀리 임금이 타고 오시는 수레를 바라다보니, 마치 한 조각 붉은 구름이 공중에서 내려오는 것만 같았다. 그 아래에는 오색 기운이 환하게 빛나고 있어 마치 꽃과도 같았다.

자궁이 타고 오신 가마가 앞에 있는데, 궁중에서 기른 준마駿馬를 타고 옛 청귀靑騩의 유제遺制를 이용해 꾸미고 새겼는데, 모두 황금빛으로 치장을 했다. 20여 명의 붉은 옷을 입은 여관女官이 좌우로 벌려 서서 앞에서 길을 인도했다.


두 군주郡主는 가마를 타고 일행 중 조금 뒤에서 따라왔다. 전하殿下는 자궁의 뒤에서 융장戎裝을 입으시고 전립戰笠을 쓰셨는데, 붉은 털과 비취빛 깃이 마치 군의軍儀 같았다. <중략>


승정원承政院과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都, 병조兵曺 및 군문軍門에서 근무하는 이들은 모두 임금을 우러러보았다. 북소리가 조화로웠고 말의 발걸음의 빠르기도 가지런하여 편안히 말을 몰아갔는데, 엄숙하면서도 나는 듯하여 진실로 태평성대의 기상이 있었다. 잠시 후 포성砲聲이 울려 사람들을 경계시키니, 임금의 행차가 멀리서도 보였다.


- 홍용한의 화성 행행일기(1795년) 중에서


화성원행반차도 KBS 정조대왕 수원 행차[조선 정조] 화성원행반차도 재현품, 수원 행차


화성원행반차도華城園幸班次圖, 한국방송공사(KBS), 재현품 (바로 위)


1795년(정조 19) 윤2월 을묘년 수원행차 행렬을 화려하게 그린 채색 두루마리 반차도를 전통기법으로 재현한 것이다. 반차도는 행사 전에 행렬의 배치와 규모를 미리 연습해 보기 위해 제작한 계획도 성격의 그림이다.


국왕을 상징하는 교룡기를 앞세우고 수원으로 향하는 행렬의 중앙부에는 혜경궁이 탄 가마가 있다.


가마 양 끝을 말의 안장에 연결하여 두 마리의 말이 앞뒤에서 끌도록 특수하게 고안하였다. 정조대왕이 탄 어좌마는 혜경궁 가마 바로 뒤에 있다. 어머니를 모시고 가는 행차였으므로 정조대왕은 일부러 가마를 타지 않았다.


KBS 다큐멘터리 "의궤, 8일간의 축제(2013년)" 제작 당시 재현한 것이다.


한강주교환어도 시흥행궁 정조대왕[조선 정조] 한강주교환어도, 창덕궁으로 돌아오는 길


한강주교환어도漢江舟橋還御圖

시흥행궁에서 하룻밤을 지낸 후 윤2월 16일 아침에 출발하여 용양봉저정에서 휴식을 취한 다음, 노량진에 설치된 배다리舟橋로 한강을 건너 창덕궁으로 돌아가는 행렬을 묘사한 그림이다.


주교는 정조대왕이 1789년 첫 현륭원 참배 때부터 사용하였는데, 수원행차 시 가장 적합한 곳인 노량진에 주교사舟橋司를 두어 운영하였다.

1795년 원행 시 2월 13일부터 24일까지 배다리를 설치하고, 다음 달 윤2월 4일에 건너는 연습도 시행하였다. 주교를 설치할 때는 그림과 같이 교배선橋排船 36척, 난간 240척, 홍살문 3개, 배다리 좌우 위호선衛護船 12척을 사용하였다.


수원행차 때마다 한강에 배다리가 설치되었다.


환어행렬도 정조대왕 수원행차[조선 정조] 환어행렬도, 시흥행궁에 다다르는 장면


환어행렬도還御行列圖

1795년 윤2월 15일 수원에서의 일정을 모두 마치고 돌아가는 도중, 하룻밤을 머물기 위해 시흥행궁에 다다르는 장면이다.


그림의 중심인 혜경궁 가마 주변에 푸른 장막이 처져 있고, 그 곁에는 음식을 만들기 위한 임시 막차가 설치되어 있어 시흥행궁에 도착하기 전 잠시 멈춘 상태이다. 혜경궁 가마 뒤로는 정조대왕의 어좌마와 청연군주, 청선군주의 가마가 보이며, 행렬 앞에는 임금의 권위를 상징하는 둑㪲과 용기龍旗가 보인다.


수많은 행렬을 보여주기 위한 지그재그형 구도와 원근법의 표현, 혜경궁 가마와 어좌마 등 중심인물을 집중시키는 구도 등이 잘 표현되어 있다. 장엄한 국왕 행렬이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조선 정조대왕 수원행차 그림과 갑옷, 투구 (수원화성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