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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포해전3. 400여척 격파, 1592년 9월 2일 [임진왜란 이순신 전쟁]

믿을만한 건강정보 2017. 10. 7. 22:14

부산포해전3. 400여척 격파, 1592년 9월 2일 [임진왜란 이순신 전쟁]


초2일


(이로부터 8일 후인 9월 11일 경상도 성주에서 김면의 의병 부대가 왜군을 격파했다.

9월 16일에는 함경도 경성에서 정문부의 의병 부대가 왜군을 격파했다.

그 뒤 10월 초6일에 진주에서 목사 김시민 등이 왜군을 무찌르고 성을 지켰다.

10월 30일에 함경도 길주, 장평에서 정문부의 의병 부대가 왜군을 격파했다.

11월에는 경상도 상주에서 정기룡 부대가 왜군을 격파했다.

성주에서는 김면의 의병 부대가 7~14일에 걸쳐 왜군을 격파했다.

10일 길주에서 정문부의 의병 부대가 왜군을 격파했다.) 


싸우고 난 다음 날이다.

또 한 번 쳐들어가서 적들의 소굴을 불 지르고, 배들을 전부 깨부술까 하였다.


그러나 위로 올라간 적들이 여러 곳에 꽉 들어차 있는데, 그들이 돌아갈 길을 끊는다면 막다른 골목에 몰린 도적이 되어 버릴 게 걱정되었다. 부득이 수륙에서 함께 쳐야 섬멸할 수 있을 터였다.


부산포해전, 부산포 해질녘부산포해전, 부산포 해질녘


한편 풍랑이 심한 탓에 전선이 서로 부딪쳐서 부서진 곳이 많았다. 전선을 수리하고 군량을 넉넉히 준비한 다음에, 또 육전이 또 크게 벌어지는 날을 준비하기로 하였다. 경상 감사 등과 수륙으로 함께 진격하여 남김없이 쳐부수기로 약속했다.


진을 해산하고 본영으로 돌아왔다. 그동안 네 차례 출전하고 열 번 싸워서 모두 다 이겼다. 그러나 장수와 사졸들의 공로를 따진다면 이번 부산 싸움에 비길 것이 아니다.


부산포해전, 임진왜란, 부산성 함락임진왜란 초기 함락당했던 부산성


전날의 싸움에서는 적선의 수가 아무리 많아도 70여 척에 불과하였는데, 이번에는 왜적의 소굴에 4백여 척의 배가 정박해 있었다.


그 속으로 돌진하여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하루 내내 공격하여 적선 1백여 척을 깨뜨려 적이 겁내어 떨게 하였다. 비록 목을 벤 것은 없었으나 힘껏 싸운 공로는 먼젓번보다 훨씬 더하였다. 전례에 따라 공로를 참작하여 등급을 마련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순천 감목관 조정趙玎은 혼자 힘으로 배를 준비하고 종과 말먹이 꾼들을 거느리고 자원하여 왜적을 많이 쏘아 죽이고 왜의 물건도 많이 빼앗아 왔다. 이를 중위장 권준이 두 번, 세 번 보고해 왔고 내가 본 바도 그와 같았다.


부산포해전, 쌍충사,부산 몰운대에서 순절한 정운의 사당부산포해전, 쌍충사,부산 몰운대에서 순절한 정운의 사당


녹도 만호 정운은 변란이 생긴 뒤로 나라를 위한 마음이 솟구쳐서 적과 함께 죽기로 맹세하고 세 번 싸움에 매번 앞장섰다. 부산 싸움에서도 죽음을 무릅쓰고 돌진하다가 적이 쏜 총알에 이마를 뚫려 전사하였다. 지극히 슬프고 가슴 아팠다.


여러 장수 중에서 따라 차사원差事員을 정하여 특히 정운의 초상 치르는 일을 맡아 보살피도록 하였다.

곧 그를 대신할 만한, 특별히 무략 있는 사람을 속히 제수하여 내려보내기를 조정에 재촉하였으며, 그 틈을 메우기 위해 군관 전 만호 윤사공을 가장假將으로 하였다.



釜山破倭兵狀, 9월 17일

난중일기, 송찬섭, 서해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