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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진남북조시대 인물화 - 무도천왕 염민 등

위진남북조시대 인물화 - 무도천왕 염민 등 위진남북조시대 인물화 모음입니다. 중국 네티즌들이 올려놓았던 자료들 일부 발췌해 소개합니다. (출처 : 클릭) - 염민 5호16국 시대 염위, 즉 위나라 건국자입니다. 중국 사람들에겐 5호16국 시대 유일한 한족 출신 건국자이기에 좋은 평가를 받는 인물이죠. 그러나 염민의 위나라는 불과 2년 만에 멸망합니다. (가운데 염민) (모용선비와 전쟁에 나서는 염민의 위나라 군대) (모용선비에 패배해 목숨을 잃는 염민) - 유곤 사실상 중원에서 활약하던 한족의 마지막 희망이었습니다. 친한 친구 조적과 함께 어려서부터 무예를 닦고 나라를 위해 헌신하겠다고 맹세한 일화가 유명합니다. 그러나, 중원에서 세력을 잃고 선비족 단필제의 모함에 빠져 자신과 아들, 조카 등이 모두 죽..

동아시아 역사 2017.09.04

백제고분 돌방무덤, 제작 과정

백제고분 돌방무덤, 제작 과정 백제고분 돌방무덤 제작 과정 신봉동 유적에서는 3기의 백제고분 돌방무덤이 조사되었다. 백제고분 돌방무덤은 다른 널무덤에 비해 높은 곳에 있으며, 상층 신분의 인물이 묻힌 것으로 보인다. 백제고분 돌방무덤은 널길을 포함한 커다란 움을 파고, 평면 형태가 방형이나 장방형으로 일정한 높이까지 수직으로 네 벽으로 쌓은 뒤 점차 안으로 들여쌓아 천장을 이루었다. 대체로 남쪽으로 문을 내어 시신을 운반하였으며 커다란 돌로 막아 쌓은 뒤 마무리하였다. 백제고분 돌방무덤은 관대를 포함한 백제고분 돌방무덤방의 바닥에는 강돌을 깔고 관대 위에 관을 놓고 주위에 토기와 철기, 장신구 등의 많은 유물을 함께 묻었다. (운구를 운반하는 인부들) 단지 청주 신봉동 손잡이 잔, 출토지 미상 손잡이 잔..

동아시아 역사 2017.09.01

백제고분 - 청주 명암동 가경동 유적

백제고분 - 청주 명암동 가경동 유적 백제인의 삶과 죽음, 청주 명암동과 가경동 유적 청주명암동유적에서는 백제 집터와 백제고분 널무덤이 함께 발견되어 당시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10기가 발견된 집터의 내부에는 화덕이 설치되어 있으며, 인근의 가경동, 봉명동, 청원 쌍청리유적 등과 함께 4세기 무렵의 청주지역 백제 움집터의 입지와 주거형태 등을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또한, 백제고분 널무덤은 백제고분 신봉동고분군과 비교되는 것으로 다소 이르거나 병행하는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재갈, 청주 신봉동 출토, 재현품 청주가경동유적은 집터와 저장구덩, 백제고분 무덤이 좁은 지역에 밀집되어 있어 당시의 생활공간을 복원하는데 귀중한 단서를 제공해주고 있다. 이곳에서 발견된 백제가마..

동아시아 역사 2017.08.31

용두사지철당간, 고려광종 시대 당간

용두사지철당간, 고려광종 시대 당간 용두사철당기 (용두사에 철당간을 만든 이유)전 한림학생 김원이 짓고 썼으며 새긴 사람은 손석이다. 용두사지철당간 밑에서 3번째 당간에 용두사철당기가 적혀있다. 일찍이 용두사지철당간을 만드는 이유는 불문의 아름다운 표시이며, 당은 보전을 단장하는 신령스러운 깃발이라고 들었다. 그 형상은 마치 학이 푸른 하늘을 맴돌아 날고 용이 푸른 하늘을 뛰는 것과 같아 이를 세운 자는 신심이 크게 되고, 바라보는 자마다 티 없이 맑은 마음이 생기게 된다. 진실로 마귀를 굴복시키는 철장대요, 적을 물리치는 무지개 깃발이라 할 것이다. 이 고장의 호족이며 권세 있는 집안인 당대등 김예종이 갑자기 질병에 걸리자 경건히 용두사지철당간을 건립하여 사찰을 장엄하게 할 것을 부처님께 맹세하였다. ..

동아시아 역사 2017.08.30

용두사지철당간, 청주에 남은 고려 용두사 국보

용두사지철당간, 청주에 남은 고려 용두사 국보 용두사지철당간소재지 :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 2가 48-19지정사항 : 국보 41호건립연대 : 962년 (광종 13) 용두사지철당간용두사지철당간은 두 개의 화강암 지주와 20개의 철통으로 이루어져 있다. 용두사지철당간은 절 앞에 높이 세워 예불이나 법회가 있을 때 깃발을 걸던 곳이다. 대부분의 당간은 나무로 만들어 당간지주만 남아있는 경우가 많고 당간이 남아있는 사례가 드물다. 용두사지철당간은 밑에서 3번째 당간에 당기가 새겨 있어, 건립 목적과 조성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용두사지철당간을 세운 이유는 청주사람 김예종이 병에 걸리자 용두사지철당간을 세울 것을 부처님께 맹세한 것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자 사촌형인 ..

동아시아 역사 2017.08.29

선비족 북위 수도 평성 유물

선비족 북위 수도 평성 유물 이 포스트는 중국 다퉁시(大東) 박물관에 전시된 선비족 북위 수도 평성 유물전을 다룹니다. 선비족 북위 수도 평성 유물 특집이었던 시기에 박물관을 방문해 포스팅한 분의 글을 퍼왔습니다. 원본 링크는 大同市博物馆御东新馆巡礼之四:魏都平城(续1) 여기고 간단한 코멘트들도 그대로 옮깁니다. 두 명의 부처가 나란히 앉아 불공드리는 불상은 1956년에 선비족 북위 수도 평성 유적지 남쪽에 도로를 내던 중 발견되었습니다. 감실에 앉은 두 부처는 나란히 앉아 있습니다. 북위 효문제와 풍태후가 집권하던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되는데, 풍태후가 섭정을 했기에 정치적 의미가 담긴 불상이라 볼 수도 있습니다. 돌로 조각한 무사武士 석상은 2002년 선비족 북위 수도 평성 무덤군에서 출토되었습니..

동아시아 역사 2017.08.27

단군왕검 이두문-신지의 역사

단군왕검 이두문-신지의 역사 神誌의 역사 - 조선상고사 전사前史(단군왕검 이두문 시절)에 단군왕검 때에 신지神誌라는 사람이 있어 사관史官이 됐다 하였으나, 사실은 곧 신치의 번역이요, 신치는 신크말치의 약자요, 신크치는 신가의 별칭이요, 신가는 앞에서 말한 다섯 가의 수석首席 대신이니, 신치 곧 신가가 늘 신수두의 제일祭日에 단군왕검 이두문으로 우주 창조의 신화와 영웅과 용사 등이 행한 일과 예언, 유의, 경계하는 이야기를 노래하여 역대로 예가 되었다. 후세에 문사文士들이 그 노래를 거두어 한 책을 만들고, 그 벼슬 이름 신치로 책 이름을 한 것이니, 이른바 단군왕검 이두문으로 신지가 곧 그것이다. 이제 신지의 원서가 없어져서 그 가치의 어떠함을 알 수 없으나, 그 책 이름이 단군왕검 이두문으로 지은 것..

동아시아 역사 2017.08.26

백제 고분군, 청주 신봉동 출토 유물들

청주 신봉동 고분군의 무덤 모형(청주 신봉동 고분군에서는 모두 4종류의 무덤이 발견되었다) 돌방무덤은 관을 옮길 수 있는 길과 문을 포함하고, 네 벽에 돌을 쌓은 후 내부에 관을 놓을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였다. 벽을 따라 많은 유물을 부장하였다. 대형 널무덤은 일반 토광묘보다 규모가 크고 바닥에는 강돌을 깔았다. 관과 곽을 사용하였고 곽을 덮은 흙은 진흙과 모래흙을 교대로 쌓아 마무리하였다. 널무덤은 가장 많이 발견되었다. 토광에 관과 유물을 넣은 후 마무리하였다. 일부에서는 유물을 넣는 부장칸을 따로 마련한 것도 있다. 화장묘는 지름 0.6m 내외 크기로 구덩이를 파고 내부에는 토기와 철기 등의 유물을 넣은 것으로 화장하거나 특별한 의식에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청주 신봉동 백제고분군의 토기 신봉동 ..

동아시아 역사 2017.08.25

조선 시대 목활자 인쇄와 목판 인쇄

조선 시대 목활자인쇄 나무로 만든 활자를 판에 짜서 찍어내는 목활자 인쇄는 조선 초기부터 중앙관서에서 민간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활용되었다. 조선 초기에 목활자로 인출한 것으로는 1397년 조선 건국과 더불어 공신들에게 내려준 개국원종공신녹권開國原從功臣錄券이 그 시기가 가장 빠르다. 특히 목활자는 전란戰亂 등의 국가 위기나 긴급한 필요 때문에 활자 인쇄가 신속하게 이루어져야 할 때 금속호라자의 대용代用 혹은 보충을 위해 다양한 일시 출판기관에서 만들어져 사용되었다. 훈련도감訓鍊都監, 공신도감功臣都監, 내의원內醫院, 실록청實錄廳 등에서 목활자를 만들어 임진왜란으로 없어진 책들을 복구하는 데 사용하였으며, 지방의 서원과 사찰 등 민간에서도 목활자를 만들어 시, 문집, 족보 등을 인쇄하였다. 울료자직해尉統子直解..

동아시아 역사 2017.08.23

고구려 초기 선비족과의 관계 - 조선상고사

선비鮮卑 대 고구려의 관계 고구려와 한이 충돌하는 사이에 서서, 고구려를 도우면 고구려가 이기고, 한을 도우면 한이 이겨, 두 나라의 승패를 좌우하는 자가 있으니, 곧 선비라 일컫는 종족이 그것이었다. 선비가 조선의 서북쪽, 지금의 몽고 등지에 분포되어 있다가, 흉노 모돈에게 패하여 그 본거지를 잃고 내외 흥안령(內外興安嶺) 부근으로 옮겨갔음은 이미 제2편 제3장에서 말하였다. (출처 : 发现嘎仙洞的重要意义--北魏) 그 뒤에 선비가 둘로 나뉘어 하나는 그대로 선비라 일컫고, 하나는 ‘오환(烏桓)’의 고기를 먹고 짐승의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고, 목축과 사냥으로 생활하는 종족으로서 각기 읍락(邑落)을 나누어 사는데, 부족 전체를 통솔하는 대인(大人)이 있고, 읍락마다 부대인(富大人)이 있어 그 부족들은 ..

동아시아 역사 2017.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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