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역사

고구려 초기 선비족과의 관계 - 조선상고사

믿을만한 건강정보 2017. 8. 22.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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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鮮卑 대 고구려의 관계


고구려와 한이 충돌하는 사이에 서서, 고구려를 도우면 고구려가 이기고, 한을 도우면 한이 이겨, 두 나라의 승패를 좌우하는 자가 있으니, 곧 선비라 일컫는 종족이 그것이었다.


선비가 조선의 서북쪽, 지금의 몽고 등지에 분포되어 있다가, 흉노 모돈에게 패하여 그 본거지를 잃고 내외 흥안령(內外興安嶺) 부근으로 옮겨갔음은 이미 제2편 제3장에서 말하였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선비족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선비족

(출처 : 发现嘎仙洞的重要意义--北魏)


그 뒤에 선비가 둘로 나뉘어 하나는 그대로 선비라 일컫고, 하나는 ‘오환(烏桓)’의 고기를 먹고 짐승의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고, 목축과 사냥으로 생활하는 종족으로서 각기 읍락(邑落)을 나누어 사는데, 부족 전체를 통솔하는 대인(大人)이 있고, 읍락마다 부대인(富大人)이 있어 그 부족들은 다 그 대인이나 부대인의 명자(名子)로 성으로 삼으며, 싸우기를 좋아하므로 젊은 사람을 존중하고, 늙은 사람을 천대하며, 문자가 없으므로 일이 있으면 나무에다 새긴 것으로 신표(信標)로 삼아서 무리를 모으고, 모든 분쟁은 대인에게 판결을 받아서 지는 자는 소나 양으로 배상을 하였다.


흉노에서 갈라진 선비, 오환흉노에서 갈라진 선비, 오환

(출처 : 匈奴鲜卑突厥傻傻分不清?看完这些图起源区域一目了然)


조선이 모돈에게 패한 뒤에 선비와 오환이 다 조선에 복종하지 않고, 도리어 조선의 여러 나라를 침략하므로 고구려 초에 유류왕이 이를 걱정하여 부분노(扶芬奴)의 계략을 쫓아 군사를 둘로 나누어 한 부대는 왕이 친히 거느리고 선비국의 전면을 치고, 다른 한 부대는 부분노가 거느리고 가만히 사잇길로 하여 선비국의 후면으로 들어가서, 왕이 먼저 교전하다가 거짓 패하여 달아나니, 선비가 그 소혈(巢穴)을 비워두고 다투어 추격하므로, 부분노가 이에 소혈을 습격 점령하고, 왕의 군사와 함께 앞뒤에서 쳐서, 드디어 선비를 항복받아 속국으로 삼았다.


오환은 한의 무제(武帝)가 위우거(衛右渠)를 토며한 뒤에 이를 불러 우북평(右北平)ㆍ어양(漁陽)ㆍ상곡(上谷)ㆍ안문(雁門)ㆍ대군(代郡) - 지나의 서북부 지금의 직예성(直匠省)ㆍ산서성(山西省) 일대에 옮겨 살게 하여 흉노의 정찰을 맡아보게 하였다.


고조선과 연나라 경계고조선과 연나라 경계

(출처 : 战国红缟玛瑙疑云)


그 뒤 소제(昭帝) 때에 오환이 날로 불어나므로, 당시 한의 집권자 곽광(霍光)이 훗날의 걱정거리가 될까 하여, 오환의 선조 가운데 모돈에게 패하여 죽은 참혹한 역사로써, 오환을 선동하여 모돈의 무덤을 파헤쳐 조상의 원수를 갚게 하니, 흉노의 호연재 선우(壺衍鞮單于)가 크게 노하여 날랜 기병 2만 명으로 오환을 치매 오환은 한에 구원병을 청하였다.


한이 3만 군사를 내어 구원한다 일컫고 멀리서 바라보고 있다가, 흉노가 물러나 돌아가는 것을 기다려 오환을 습격해서 수없이 학살하여 오환이 아주 쇠약해져서 다시 한에 대항하지 못하게 되었다. 왕망의 때에 이르러서는 오환으로 하여금 흉노를 치라 하고 그 처자들을 여러 고을에 볼모로 삼고 오환을 휘몰아서 흉노를 전멸시키기 전에는 돌아오지 못하게 하니, 오환이 분하게 여겨 배반하고 달아나는 자가 많았다. 왕망이 이에 그 볼모로 한 처자를 죄다 죽이니, 그 참혹함이 또한 심하였다.


드라마속 호연재 선우드라마속 호연재 선우

(출처 : 바이두 이미지)


왕망이 망하고 지나가 크게 어지러워지니, 고구려의 모본왕(慕本王)이 이를 기회로 하여, 요동을 회복하여 양평성(襄平城)의 이름을 고쳐 고구려의 옛 이름대로 오열홀(烏列忽)이라 일컫고 선비와 오환과 협력하여 자주 지나를 치니, 한의 광무제가 한을 중흥한 뒤에 요동군(遼東郡)을 지금의 난주(灤州)에 옮겨 설치하고, 고구려를 막기 위하여 장군 채동(蔡彤)으로 요동 태수로 삼았다.


그러나 채동이 자주 전쟁에 지고, 금백(金帛)으로 선비의 추장(酋長) 편하(偏何)를 달래어서 오환의 추장 흠지분(歆志濆)을 살해하게 하니, 모본왕이 다시 선비와 오환을 타일러서 공동작전을 취하였다. 한은 계책이 궁하여 해마다 2억 7천만 전(錢)을 고구려ㆍ선비ㆍ오환 세 나라에 바치기로 약조하여 휴전되었다.


시행당한 최초의 왕. 모본왕시행당한 최초의 왕. 모본왕


모본왕이 한을 이기니 몹시 거만해져서, 몸이 아플 때는 사람으로 누울 자리로 삼고, 누울 때는 사람으로 베개로 삼아서 꼼짝만 하면 그 사람을 목 베 죽여, 그렇게 죽은 사람이 수없이 많았다. 시신(侍臣) 두로(杜魯)가 왕의 베개가 되어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일찍이 친구에게 울면서 그 사정을 하소연하니, 그 친구가 말했다.


"우리를 살게 하므로 우리가 임금을 위하는 것인데, 우리를 죽이는 임금이야 도리어 우리의 원수가 아닌가? 원수는 죽이는 것이 옳소."


이에 두로가 칼을 품었다가 왕을 죽였다. 모본왕이 죽은 뒤에 신하들이 모본왕의 태자는 못났다고 하여 폐하고 종실에서 맞아다가 세우니 이가 태조왕(太祖王)이다.


태조왕의 군사 활동태조왕의 군사 활동


고구려 본기가 대주류왕 이후는 확실히 연대가 줄어들었으므로 모본왕 본기부터서야 비로소 근거할 만한 재료가 될 것이지마는, 모본왕을 대주류왕의 아들이라고 함은 그 연대가 줄어든 자취를 숨기려는 거짓 기록이다. 모본왕은 대개 대주류왕의 3세나 혹은 4세가 됨이 옳고, 모본왕 때에 요동을 회복하였다는 기록이 없다.


태조왕 3년(기원 55년)에 요서와 10성을 쌓았으니, 요동은 그 전에 한 번 회복되었던 것이 명백하며, 후한서 동이열전(東夷列傳)에 이런 기록이 있다.


"고구려와 선비가 우북평(右北平)ㆍ어양(漁陽)ㆍ상곡(上谷)ㆍ태원(太原) 등지를 침략하다가 채동(蔡彤)에 은혜와 믿음으로 불러다 다시 항복하였다."


세출전(歲出錢) 2억 7천만 전이 채동전(蔡彤傳)에 기록되어 있으니, 이는 세공(歲貢)이요, 은신(恩信)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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