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역사 472

단재의 만주족, 몽고, 터키에 대한 인식 (조선상고사 4장)

제 4장 사료의 수집과 선택 만일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디서 무엇으로 어떻게 우리의 역사를 연구하여야 하겠느냐 하면, 그 대답이 매우 곤란하나, 우선 나의 경과부터 말하고자 한다. 이제부터 16년 전에 국치(國恥 : 국권침탈, 을사늑약을 말함)에 분발하여 비로소 동국통감(東國通鑑)을 읽으면서 사평체(史評體)에 가까운 독사신론(讀史新論)을 지어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지상에 발표하고, 이어서 수십 학생들의 청구 때문에 지나식(支那式)의 연의(連義)를 본받은 역사도 아니고 소설도 아닌 대동사천년사(大東史千年史)란 것을 짓다가, 두 가지 다 사고로 인하여 중지하고 말았었다. 그 논평의 독단(獨斷)임과 행동의 대담 하였음을 지금까지 스스로 부끄러워하거니와, 그 이후 얼마만큼 분발하여 힘쓴 적도 없지 아니하나..

동아시아 역사 2017.05.26

가야인의 일본열도 이주, 가야와 일본의 교류

가야인의 일본열도 이주 4세기 말 고구려군이 가야까지 침공하였을 때와 6세기 중엽 가야가 신라에 멸망하였을 때, 많은 가야인이 일본열도로 이주하였다. 이주지역은 주로 규슈 북부였으며, 이후 세토우치 지역을 거쳐 점차 기나이畿内 지역과 도호쿠東北 지역으로도 이주하였다. 이들은 대게 농기구, 무기, 말갖춤 등을 만드는 야철, 제련기술, 농경기술, 직조기술, 스에키 토기를 만드는 기술 등 선진 기술이 있어 일본내 수공업집단에 편입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중에는 오사카 남부의 가와치씨河内氏나 오카야마현 서부 및 히로시마현広島市 동부의 기비씨吉備氏 등과 같이 왕권이나 정치권력과 결합해 외교관으로 활약한 집단도 있었다. 일본에서 전해져온 지명 가운데 효고 일대 하리마播磨 지역의 아야베노사토漢部里는 아야히토漢人 곧 ..

동아시아 역사 2017.05.26

단기고사 5세 단군 구을 기록 - 천문학자 황포덕

제5세 구을(丘乙) 16년간 재위 첫해에 맏아들 달문(達門)을 태자로 삼고, 아우 삼인(三人)을 번왕(藩王)에 봉하였다. 2년 여름에 밭과 들에 황충(蝗虫, 메뚜기)이 크게 번져, 임금께서 친히 밭과 들에 나가 황충 한 마리를 삼키시고, 하느님께 황충을 멸하여 주기를 아뢰니, 며칠 만에 황충이 다 없어졌다. 4년 봄에 하(夏) 나라 사절이 왔다. 유웅(有應)씨가 무도(無道)하여 소나벌(蘇奈伐)을 보내어 토벌하여 평정하였다. 5년 봄에 하(夏) 나라 학사 두 사람이 역서(曆書)와 두건갑자기(斗健甲子記)를 가지고 조정에 들어왔다. 8년 여름에 신독(身毒, 인도?) 나라 사람이 표류하여 동해빈(東海濱)에 닿았다. 9년 가을에 접빈관(接賓館)을 동문밖에 지었다. 10년에 모든 곡식이 혼작이 들어 큰 창고에 쌓아..

동아시아 역사 2017.05.26

삼조선의 영토와 명칭 유래 - 조선상고사

삼조선 명칭의 유래 종래의 각 역사책에 삼조선 분립의 사실이 빠졌을 뿐 아니라, 삼조선이라는 명사까지도 단군ㆍ기자ㆍ위만의 세 왕조라고 억지 해석을 하였다. 삼조선은 신ㆍ불ㆍ만 삼한의 분립을 말한 것이니, ‘신한’은 대왕(大王)이요, 불ㆍ말 두 한은 부왕(副王)이다. 삼한이 삼경(三京)에 나뉘어 있어 조선을 통치하였음은 이미 제1편에서 말하였거니와, 삼조선은 곧 삼한이 분립한 뒤에 서로 구별하기 위하여 신한이 통치하는 곳은 신조선이라 하고, 말한이 통치하는 곳은 말조선이라 하고, 불한이 통치하는 곳은 불조선이라 하였다. 신ㆍ말ㆍ불 삼한은 이두문으로 진한(辰韓)ㆍ변한(弁韓)이라 기록된 것이고, 신ㆍ말ㆍ불 삼조선은 이두문으로 진(眞)ㆍ막(莫)ㆍ번(番) 삼조선이라 기록된 것이다. 똑같은 신ㆍ말ㆍ불의 음역(音譯)..

동아시아 역사 2017.05.26

성충이 이끌어낸 백제와 고구려 동맹-조선상고사

고구려ㆍ백제 동맹의 성립 의자왕이 대야주 40여 성을 차지한 지 오래지 않아서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죽이고 고구려의 정권을 잡았다. 의자왕의 성충(成忠)에게 물었다. "연개소문이 남의 신하로서 임금을 죽였는데 고구려 전국이 두려워서 그 죄를 묻는 자가 없는 것은 무슨 까닭이오?" "고구려가 서국(西國 : 지나를 가리킴)과 전쟁을 한 지 여러 백 년 만에 처음에는 여러 번 서국에게 패하다가 근세에 이르러 날로 강대해져서 요동을 차지하여 그 세력이 요서에까지 미치고 물에서만 마음대로 돌아다닐 뿐 아니라 바다에까지 드나들어 영양왕 때에는 세 번이나 백만의 수나라 군사를 격파하여 나라의 위엄이 크게 떨쳐서 고구려의 군사와 백성들이 서국과 맞서려는 기염(氣焰)이 하늘을 찌르려 하는 판인데 건무(建武 : 영류왕)가 ..

동아시아 역사 2017.05.25

유득공 발해고 서문 - 고려가 기록하지 않은 발해사

고려는 발해사를 이루지 않았는데, 고려가 이를 알면서도 떨치지 않은 것이다. 옛날에 고씨가 북쪽에 거하여 고구려라 하였고, 부여씨가 서남에 거하여 백제라 하고, 박, 석, 김씨가 동남에 거하여 신라라 하니 이것이 삼국이다. 마땅히 삼국사가 있는 것이니, 고려가 이를 이루었다. 부여씨가 망하고 고씨가 망하고 김씨가 그 남쪽에 있고, 대씨가 그 북쪽에 있으니 발해라 한다. 이에 남북국이라 일컬으니 마땅히 남북국사가 있어야 하는데, 고려가 아직 이를 이루지 않았다. 대씨는 누구인가? 바로 고구려인이다. 그 있던 곳은 어디인가? 바로 고구려땅이다. 동쪽에도 나타나고, 서쪽에도 나타나고, 북쪽에도 나타나니, 큰 귀와 같은 형상이다. 김씨가 망하고 대씨가 망하여, 왕씨가 이를 통합하니, 고려라 하였다. 그 남쪽에 ..

동아시아 역사 2017.05.25

북송 말기 고려와 요나라의 상황 (관계)

정삭 正朔 정삭正朔 본래 정월正月과 삭일朔日을 의미하는 말이었으나 그것으로 책력을 뜻하게 되었고, 나아가 고대 중국에서는 제왕이 창업하면 어느 달을 정월로 하느냐를 결정하는 세수歲首의 개정이 있었고, 그것에 따라 신력新曆를 반포하여 국민은 그것을 지켜 제반사를 집행했다. 그래서 봉정삭奉正朔, 즉 정삭을 받든다고 하는 것은 곧 신복臣服함을 의미하게 되었다. 그리고 매년 원단에는 신력을 반포하고 복속 국가에서는 사신을 보내어 그것을 받아오는 것으로 신복함을 표시하였다. 고려는 당시 북송의 정삭을 받들지 않고 있었다. 당唐 유인궤劉仁軌(당고종唐高宗 때 삼한 공략에 전과를 올렸고, 그가 처음 말한 대로, 고종이 태산을 봉할 때 삼한과 일본의 대표자들을 이끌고 참여하였다. 후에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로 지정사知政事에..

동아시아 역사 2017.05.24

금의 해릉왕 - 그 인물과 행적

금의 제4대 황제는 통상 해릉왕海陵王이라 불린다. 태조의 서장자庶長子 완안종간完顔宗幹의 차자로, 본명은 테크나이, 중국명으로는 량亮이라 한다. 그에게는 천덕天德 정원貞元 정륭正隆의 3원호元號가 있고, 13년의 치세(1149-61)를 가진 황제이면서도 묘호(사후 종묘에 제사 지내질 때 그 종묘 내의 위치를 취해 故황제의 칭호에 사용한다)가 칭해지지 않음은 왜일까. (출처 : 天津的一篇高分的高考作文,批判狭隘汉民族主义思维) 궁정 내에서는 임금을 죽이고 모후를 죽여, 규문이 안정되지 않았고, 밖으로는 가혹한 형벌로써 무고한 자를 살해하고, 까닭 없이 맹약을 깨고, 명분 없이 군사를 일으켜 국력을 소모하는 등의 잘못을 지적받아서 사후에도 종묘(종묘에 제사 지내지는 것은 황제의 특권)에 제사 지내지지 않은 채 단순..

동아시아 역사 2017.05.24

목숨을 잃은 원소의 모사 이야기 2 전풍과 허유편

원소의 모사는 왜 목숨을 잃었을까? 원소 모사의 비극 (원문 : 袁绍的谋士是怎么死的?袁绍谋士的悲剧2 [클릭]) 전풍은 원소 수하 중 제일 뛰어났지만, 감옥에 갇힌 포로 신세였었죠. (관도대전 당시) 사신을 보내 충언을 했지만, 돌아온 건, 원소의 하옥 명령과 이어진 사형 명령이었습니다. 숲에서 나온 나뭇 가지는 바람에도 부러지듯, 명성이 너무 높았던 전풍은 남의 시기를 크게 받았습니다. 전풍 본인도 시기하는 이들과 타협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타인의 시기로 죽음을 맞게 된 건 어찌보면 당연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전풍은 견해와 관찰력이 남들보다 뛰어나 원소가 패해자 자신이 죽을 것이란 것도 예견했죠. 처음, 원소가 패했다는 이야기가 들려오자 감옥에 있던 많은 사람들은 전풍을 축하하며, 지금보다도 더 중용될 ..

동아시아 역사 2017.05.23

관구검을 막아낸 동천왕 기록의 의문점-조선상고사

관구검毌丘儉의 침략과 제2 환도丸都의 함락 기원 245년경에 위가 동천왕의 잦은 침입을 걱정하여, 유주자사 관구검을 보내서 수만의 군사로 침략해오므로 왕이 비류수(沸流水)에서 이를 맞아 싸워서 관구검을 크게 격파하여 3천여 명을 목 베고, 양맥곡(梁貊谷)까지 추격하여 또 3천여 명을 목 벴다. 왕은, "위의 많은 군사가 우리의 적은 군사만 못하다."하고, 이에 여러 장수는 후방에서 싸움을 구경하게 하고 왕이 몸소 철기(鐵騎) 5천을 거느리고 진격하였는데, 관구검 등이 우리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 죽을 힘을 다하여 혈전을 벌여 전진해오므로, 왕의 군사가 퇴각하니 후군이 놀라 무너져서 드디어 참패하여 상한 군사가 1만 8천을 넘었다. 왕이 1천여 기병을 거느리고 압록원(鴨錄原)으로 달아나니 관구검이 드디어 ..

동아시아 역사 2017.05.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