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역사

유득공 발해고 서문 - 고려가 기록하지 않은 발해사

믿을만한 건강정보 2017. 5. 25. 17:10
반응형

고려는 발해사를 이루지 않았는데, 고려가 이를 알면서도 떨치지 않은 것이다. 옛날에 고씨가 북쪽에 거하여 고구려라 하였고, 부여씨가 서남에 거하여 백제라 하고, 박, 석, 김씨가 동남에 거하여 신라라 하니 이것이 삼국이다. 마땅히 삼국사가 있는 것이니, 고려가 이를 이루었다.


부여씨가 망하고 고씨가 망하고 김씨가 그 남쪽에 있고, 대씨가 그 북쪽에 있으니 발해라 한다. 이에 남북국이라 일컬으니 마땅히 남북국사가 있어야 하는데, 고려가 아직 이를 이루지 않았다.


대씨는 누구인가? 바로 고구려인이다. 그 있던 곳은 어디인가?


남북국시대_지도남북국시대_지도


바로 고구려땅이다. 동쪽에도 나타나고, 서쪽에도 나타나고, 북쪽에도 나타나니, 큰 귀와 같은 형상이다. 김씨가 망하고 대씨가 망하여, 왕씨가 이를 통합하니, 고려라 하였다. 그 남쪽에 김씨의 땅은 온전하나, 북쪽의 대씨의 땅은 온전하지 않으니, 혹 여진족이 들어오고, 혹 거란족이 들어오니, 마땅히 이때 고려가 꾀하여, 발해사를 급히 이루었어야 한다.


잡힌 여진이 꾸짖어 말하길, "어찌 발해의 땅으로 돌아가지 않는가? 발해의 땅은 고구려의 땅이니 장차 군대로써 거두어야 한다. 토문의 북쪽이다." 잡힌 거란이 꾸짖어 말하길, "어찌 발해의 땅으로 돌아가지 않는가? 발해의 땅은 고구려의 땅이니 장차 군대로써 거두어야 한다. 압록의 서쪽이다." 


끝내 발해사를 닦지 않으니, 토문의 북쪽과 압록의 서쪽이 누구의 땅인지 알지 못하게 되었다.


여진을 책하고자 하나 그 논리가 없고, 거란을 책하고자 하나 그 논리가 없다. 고려가 약한 나라가 된 것은 발해의 땅을 얻지 못함에 있으니, 가히 승리할 수 있었음을 노래한 것이다.


혹 발해가 요나라에 멸망하였는데, 고려가 어찌 그 역사를 닦지 않는가? 이것은 자연스럽지 못한 것이다. 발해는 중국을 본받아 받듯이 사관을 세웠다.


홀한성이 깨졌을 때 세자가 고려로 십여만 명과 함께 아래로 도망왔는데, 관리가 없어도 반드시 그 책은 가지고 있었다. 관리가 없으니 그 책도 없는 것이다 하여 세자에게 물으니 세자는 가히 앎이 있었고, 숨은 왕족에게 물으니 예도 역시 앎이 있고, 십여만 명에게 물으니 가히 알지 못한 사람이 없었다.


장건장은 당나라 사람이다. 오히려 발해국을 기록하여, 고려사람은 홀로 발해의 역사를 닦지 못하게 하니 울면서 문서를 받치고 흩어지게 되었다. 그 백 년 후에 비록 이를 닦고자 하나 가히 얻을 수가 없었다.


남북국시대2남북국시대2


현대인들 입장에선 고려나 발해가 우리 역사라 두 나라 사이에 동포 의식이나 한민족이란 개념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추측합니다. 헌데, 신라는 발해를 북국, 또는 북쪽 오랑캐라 부르며 김유신의 손자 김윤중에게 발해 공격을 명하기도 했습니다. (성덕왕 32년 733년) 721년 성덕왕 20년엔 강릉 방면에 장성을 쌓았는데, 이는 발해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최치원은 당나라 유학 시절에 발해인들과 같은 취급을 받는 것에 분개해 당나라 조정에 항의 서신을 여러 차례 보내기도 했습니다. 내가 이런 오랑캐 놈들과 같은 취급을 받을 순 없다는 이유였죠.


고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10세기 초에 태조 왕건은 발해 남부인 평양과 평안도 일대를 수중에 넣습니다. 발해 입장으로선 명백한 영토 강탈이었죠. 재밌는 건, 고려와 발해 두 나라 모두 고구려의 후신임을 자처했습니다. 바로 정통성이 겹치는 문제가 발생한 것이죠.


왕건의 발해에 대한 인식은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를 통해 알 수 있는데, 이는 이글루스 길공구님의 포스트에 잘 나와 있습니다. (고려 태조의 발해에 대한 인식[클릭]) 왕건은 발해 왕자와 유민들에게 옷과 집과 밥을 주며 회유했고, 세자 대광현에겐 왕계란 이름을 주며 종실의 족보에 올리는 등 발해 유민에 대해 적극적인 애민 행보를 보입니다. 그런데도, 왕건은 발해사를 짓지 않았습니다.


고려의 북진 의지고려의 북진 의지


발해를 친척의 나라라며 애써 보듬으려 했던 행위는 그저 정치적인 계산이 깔린 결과라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 원수가 되어버린 고구려와 백제의 관계처럼 고려 역시 혼란스러운 후삼국 시대와 지방 호족을 제어할 수 없었던 왕건 시대였기에 이들이라도 자신의 친위 세력으로 받아들이려 했던 건 아닐지요.


조선 시대 정약용과 정조의 문답처럼, 분명 고려를 거치며 발해와 고려를 우리 민족의 역사라 인식하는 경향이 생겼으나, 정작 동시대에 존재하던 고려와 발해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이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대립하던 삼국시대도 마찬가지였죠. 같은 민족이란 개념보단 서로 공격하여 굴복시켜야 할 대상으로 인식했습니다.


발해고를 지은 유득공의 서문이 옳을 수도 있으나, 한편으론 틀리기도 한 것이, 당대 사람들의 인식을 반영했다기보단 후대의 조선인 인식이기 때문입니다. 발해사가 전해지지 않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나, 고려가 이를 짓지 않았다고 해서 고려에 모든 잘못을 덮어 씌울 순 없습니다. 신라가 고구려사를 정리하지 않았고, 백제가 신라사를 정리하지 않았다고 해서 이들에게 역사적 사명감을 잃었다고 비난할 순 없습니다.


그저, 안타까운 일이나 어쩔 수 없었던 상황이라고 이해해야겠습니다. 아들에게도 정치권력을 나눠주지 않는다는 말이 있듯, 당대 사람들에게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정통성의 문제는 설령 친척의 나라인 발해라 해도 거슬렸을 겁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