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역사

북송 말기 고려와 요나라의 상황 (관계)

믿을만한 건강정보 2017. 5. 24. 10:40

정삭 正朔


정삭正朔

본래 정월正月과 삭일朔日을 의미하는 말이었으나 그것으로 책력을 뜻하게 되었고, 나아가 고대 중국에서는 제왕이 창업하면 어느 달을 정월로 하느냐를 결정하는 세수歲首의 개정이 있었고, 그것에 따라 신력新曆를 반포하여 국민은 그것을 지켜 제반사를 집행했다. 그래서 봉정삭奉正朔, 즉 정삭을 받든다고 하는 것은 곧 신복臣服함을 의미하게 되었다.


그리고 매년 원단에는 신력을 반포하고 복속 국가에서는 사신을 보내어 그것을 받아오는 것으로 신복함을 표시하였다. 고려는 당시 북송의 정삭을 받들지 않고 있었다.


유인궤 일러스트유인궤 일러스트


당唐 유인궤劉仁軌(당고종唐高宗 때 삼한 공략에 전과를 올렸고, 그가 처음 말한 대로, 고종이 태산을 봉할 때 삼한과 일본의 대표자들을 이끌고 참여하였다. 후에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로 지정사知政事에까지 올랐다. 신당서新唐書 권卷100 유인궤전劉仁軌傳)가 방주자사方州刺史가 되자, 반포할 역서曆書 및 종묘의 휘諱를 청하여 말하기를


"마땅히 요해遼海를 평정하여 우리 조정의 정삭을 나누어 주고, 전쟁에 이기게 되면 군사를 가지고 고려高麗(고구려를 말함)를 공략하여 그 추장酋長을 거느리고 등봉登封(태산에 올라가 그 신을 봉함. 제왕의 위세를 선양하는 행사의 하나)의 모임에 가도록 해야 합니다."


라고 하였는데 마침내 처음에 한 말과 같이해 내어 사신史臣이 그 일을 장하게 여겼다.


그러나 인궤는 단지 그 힘을 굴복시켰을 뿐이었지 반드시 그 본심을 굴복시킨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고려인들이 중국을 섬기는 것을 살펴보건대, 그들이 존호尊號(중국 황제가 제후로 봉해 주는 관작의 칭호를 말함)를 내려주고 정삭을 나누어 주기를 청하는 것이 공손하고 간절하여 입에서 떠나지 않더니, 강한 오랑캐(글단契丹, 즉 요遼를 말함)에게 핍박받게 되고부터는 표면으로만 복종하였지, 우리 조정에 마음을 돌려 해바라기같이 기울고 개미같이 사모하는 정은 끝내 가슴속에서 떠나지 않았으니, 어찌 군사를 쓰는 것이 덕을 베푸는 것에 대하여 본디 비교가 되겠는가?


그러나 가까우면 복종시키기 쉽고 멀면 회유하기 어려운 것이다. 고려의 땅은 황제의 고장에서는 멀리 큰 바다 밖에 있으니, 거기서 올 때에는 거대한 배를 띄워 바람을 몰고 밤낮을 도와 10 여일을 와야 비로소 사명四明에 도달한다. 바람이 혹시 거세어지면 놀란 파도가 산같이 솟아올라 화덕의 가마솥이 뒤집혀 쏟아져서 한 방울의 물도 남지 않고, 또 취사할 수도 없어 뱃사람들은 왕왕 밥을 굶게 되고, 심할 때는 키가 부러지고 돛대가 꺾여져 뒤집어엎는 변고가 순식간에 생기니 또한 대단히 위험하다.


그러나 건륭建隆, 개보開寶(모두 송 태조의 연호, 960~975) 연간부터 신하의 충절을 지키기를 원하여 감히 조금도 해이해지지 않고 지금에 이르렀다. 북쪽 오랑캐와의 관계로 말하면 국토의 거리가 겨우 한줄기의 물 뿐이어서, 오랑캐가 아침에 말을 타고 떠나면 저녁에는 이미 압록강에서 물을 먹이게 된다. 앞서 크게 패전하고서야 비로소 신하가 되어 그들을 섬기고 그들의 연호年號를 썼는데, 그 일은 통화統和(983~1011)와 개태開泰(1012~1021)에 걸친 21년 동안 계속되었다. 


북송 진종 황제북송 진종 황제


왕순王詢(고려 현종顯宗) 때에 이르러 북쪽 오랑캐를 대파하여 다시 중국에 통하게 되어서 진종 황제眞宗皇帝 대중상부大中祥符 7년(고려 현종 5, 1014)에 사신을 보내어 정삭을 나눠 주기를 청하여, 조정에서는 그 청대로 따랐고, 그 후에는 마침내 대중상부라는 연호를 쓰고 북쪽 오랑캐의 개태開泰라는 연호를 갈아 버렸다.


천희天禧(1027~1021) 연간에 이르러 북쪽 오랑캐가 다시 고려를 격파하고 그 백성들을 거의 다 살육하여, 왕순은 나라를 버리고서 합굴蛤堀로 도망가기에 이르렀고, 오랑캐는 성안에서 8개월동안 머물러 있다가 마침 서북쪽 산의 온갖 소나무가 다 사람 소리를 내자 비로소 놀라고 두려워하여 철수해 가버렸다.


고려 현종 몽진도고려 현종 몽진도


그러나 여전히 왕순에게 강제로 정삭을 나누어 주므로 왕순은 힘에 굴복하여 부득이 그것을 사용하였다. 그리하여 태평太平(글안契舟, 즉 요遼의 연호. 이하 중희, 청녕, 함옹, 태강, 태안, 수창, 건통, 청경 등도 같다) 2년부터 17년이 계속되었고, 중희重熙(1032~1054)에 이르러서는 22년이 계속되었고, 청녕淸寧(1055~1064)은 10년이 계속되었고, 함옹咸雍(1065~1074)은 10년이 계속되었고, 태강太康(1075~1084)은 10년이 계속되었고, 대안大安(1085~1094)은 10년이 계속되었고, 수창壽昌(1095~1100)은 6년이 계속되었고, 건통乾統(1101~1110)은 10년이 계속되었고, 천경天慶(1111~1120)은 8년(천경은 10년간 계속했으니 저자의 착각인 듯)까지 갔으니 도합 1백 년이 된다.


그리고 야율耶律(요 황제의 성씨, 요를 말함)이 대금大金에게 곤욕을 당하자 고려는 드디어 북쪽 오랑캐의 연호를 버려버렸으나, 또 우리 조정에 명령을 청하지 않아 감히 그대로 정삭을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다만 세차歲次(연수에 따른 간지를 말함)로 해를 기록하고 장차 정삭을 청하려 하는 것이다.


우리 조정은 고려와는 저토록 멀고 북쪽 오랑캐는 고려와 이토록 가깝다. 그러나 북쪽 오랑캐에게 붙은 것은 언제나 병력에 곤욕을 당해서였으며, 그것이 좀 이완해진 것을 틈타서는 곧 항거하였다. 성조聖朝를 높여 받드는 것으로 말하면 시종여일하게 간절히 추대하고, 비록 어쩌다 때때로 견제를 받아 소원대로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성의의 방향은 굳기가 금석과 같다. 그것은 누대의 성군께서 인자함으로 편안케 하여 주시고 은덕으로 위무하여 주셔, 안으로 그들의 마음을 얻은 것이 북쪽 오랑캐가 강포하여 한갓 힘으로 그들의 외면을 제압한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철과 달을 맞추어 날을 바로 잡는다.' (서경 순전舜典에 나오는 말. 이것은 순이 요 임금 아래에서 당시 중국의 역법, 율도律度, 도량형, 예제禮制 등을 통일한 일을 말한 것)’ 하였거니와, 이제 북쪽 오랑캐가 이미 멸망하였으니 고려의 사신이 정삭을 청해옴을 곧 보게 될 것이고, 만방의 시時, 월月, 일日을 맞춰서 바로 잡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출처 - 고려도경 40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