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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의 해릉왕 - 그 인물과 행적

믿을만한 건강정보 2017. 5. 24. 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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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의 제4대 황제는 통상 해릉왕海陵王이라 불린다. 태조의 서장자庶長子 완안종간完顔宗幹의 차자로, 본명은 테크나이, 중국명으로는 량亮이라 한다. 그에게는 천덕天德 정원貞元 정륭正隆의 3원호元號가 있고, 13년의 치세(1149-61)를 가진 황제이면서도 묘호(사후 종묘에 제사 지내질 때 그 종묘 내의 위치를 취해 故황제의 칭호에 사용한다)가 칭해지지 않음은 왜일까.


해릉왕 완안량해릉왕 완안량

(출처 : 天津的一篇高分的高考作文,批判狭隘汉民族主义思维)


궁정 내에서는 임금을 죽이고 모후를 죽여, 규문이 안정되지 않았고, 밖으로는 가혹한 형벌로써 무고한 자를 살해하고, 까닭 없이 맹약을 깨고, 명분 없이 군사를 일으켜 국력을 소모하는 등의 잘못을 지적받아서 사후에도 종묘(종묘에 제사 지내지는 것은 황제의 특권)에 제사 지내지지 않은 채 단순한 왕작(작위 중 최고라도 신하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대우 되고, 나중에는 거듭 왕작조차 박탈되어서 서인으로까지 지위가 강등되었기 때문이다.


해릉왕은 종형제에 해당하는 희종熙宗을 죽이고 즉위하였기 때문에, 처음 출발부터 이상한 흉기가 감돌고 있다.


즉위 이후에도 질투, 의심으로 종실을 살해하고, 색에 빠져 금수 같은 행실에 빠져 있었고, 단지 기분에 따라 처벌刑하고, 그 종말은 자신도 신하의 흉도에 쓰러지고 말았기 때문에 이것 또한 심상치 않다. 후세에 그를 폭군을 대표하는, 사람이 아닌 사람의 전형으로 삼는 것도 당연하다.


금 희종 완안합라금 희종 완안합라

(출처 : 金朝十二帝)


그렇지만 그 반면에 해릉왕은 어려서 글을 깨우치고, 독서를 즐기고 좋아해서 유생과 담론하고 고사故事에 능하고 문예에 뛰어나서, 당시에 현賢이라 칭해졌다고 한다. 또 전해지고 있는 오산吳山이라는 시에서는 


천하는 모름지기 한 사람의 왕자王者의 정령政令하에 통일되어야 하는데도, 강남에 대립국(對立國, 남송)이 있고, 남북조의 분열이 계속되고 있는 것인가?


지금 보라, 백만의 병사를 거느리고 남송을 토벌하고, 국도 임안부의 郊外西湖 근처를 공격하고 있다. 몸소 城內 吳山의 정상에 말을 타고 나아가서 임안부의 함락을 마지막까지 지켜보는 것을.(萬里車書合混同. 江南何有別提封. 移兵百萬西湖上. 立馬吳山第一峰)


이라고, 강남 병탄의 광대한 기개가 흘러넘치고 있다.


또 전해지는 영설詠雪이라는 속요에서는


촌스러운 초촌樵村과 어포漁浦도 어젯밤의 눈으로 오늘 아침에는 백옥白玉의 나라로 보인다.

향로봉도 아닌데, 발을 친 사이로 보이는 먼산의 설경이 아름다운 이른 새벽에, 고귀한 미인은 아직 금장錦帳에서 자고 있다.


눈꽃에 의해 하천川이 뒤덮여 버린 풍정(風情, 풍치)을 알지 못하고, 눈을 뜨면 틀림없이 눈꽃이 휘날린 것인가揚花, 아니면 갈대꽃(蘆花, 노화)이 흩어진 것인가 하고 놀랄 것이다. (昨日樵村漁浦. 今日瓊州小渚. 山色捲簾看志. 錦帳美人貪睡. 不覺天花翦水. 驚問是揚花是蘆花.)


만인의 심금을 울리는 섬세한 감정이 훌륭하게 표현되어 있다. 한 마디로 노래 하나를 만드는 것이(1吟1咏, 일음일영)이 모두 당시에 으뜸갔다고 칭해지는 것은 결코 헛말이 아니다.


중도에서 변량으로 천도중도에서 변량으로 천도

(출처 : 바이두 이미지)


이처럼 모순되는 2가지 측면이 해릉왕의 인격을 분열시키고 있었다면, 그 치적에서도 똑같은 지적이 가능할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연경 천도 이후, 중국을 지향하고 중국을 확보하고자 하는 건설적인 일련의 시책과 현실을 전혀 무시한 무차별적인 남벌 사업을 대조하는 것으로 거의 그 요령을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즉, 요의 수도 연경을 대규모로 확대해서 중도中都라 이름 붙이고, 북만주에서 우선 여기에(1153년), 이어서 송의 고도 변량을 수축해서 제2회의 천도가 시행되는데(1161년), 여기에 동반해서 대량의 여진인이 군단적軍團的, 사회생활적 단위로서 천호(千戶, 맹안猛安 - 병정(兵丁) 1,000명으로 편성(編成)한 금(金)나라의 군대(軍隊))․ 백호(百戶, 모극謀克 - 병정(兵丁) 100명으로 편성(編成)한 금(金)나라의 군대(軍隊))의 형태 그대로, 중국 내지에 관전官田의 급부를 받아서 이주를 명령받는 것이다.


변량으로 천도하는 해릉왕변량으로 천도하는 해릉왕

(출처 : 바이두 이미지)


한지 영토의 통치를 중국인에게 위탁하는 것이 아니라, 여진인 스스로 관리하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에 해릉왕의 이 조치는 정복왕조로서 성숙해 가고 있는 금국의 모습 그 자체일 것이다.


일찍이 20년 전, 북송의 국도를 함락해서 단숨에 하남에까지 진출한 당시의 금국에서는 거부하는 장방창을 위협해서, 괴뢰정권인 초국을 세워서 그 황제로 삼고, 이 장방창이 즉위 1개월 만에 남송에 투항하자, 이번에는 유서劉豫의 제나라齊를 세워서 한지의 대리 통치를 위탁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지금은 그런 단계를 넘어서서 여진인에 의한 자주적 통치로의 비약이 이루어지고 있다.


금으로서는 최초의 법정화폐, 지폐가 해릉왕의 치세 때 발행된 것에서도, 그가 이 노선에 선 것을 당시의 중원에서의 경제실태에 대해서 더는 무관심할 수 없었던 결과라고 봐야만 할 것이다.


채석기 풍경도채석기 풍경도

(출처 : [转载]江淮揽胜——春节摄马鞍山采石矶、寿春古城墙全景)


이러한 해릉왕의 사적事績 일반에 보이는 정복왕조로서의 위상과 비교하면, 끊임이 없었던 이른바 정륭의 남벌正隆南伐은 뭐라고 해도 거기에 적합하지 않다.


중원의 자주적 통치를 지향하는 여러 시책은 막 진척되기 시작했다. 대규모의 토목공사에 따라서 민력은 적지 않게 피폐해 있다. 그런데도 엄격한 병정이나 군부의 강제징발과 거대한 전비의 낭비가 계속되기 때문에 민심의 동요, 국고의 파탄은 피할 수 없었다.


실제로, 거란족은 젊은이의 대량징발을 원망하여 열하에서 대반란을 일으키고, 내지에서도 산동, 산서에서 불평을 품은 한인 호걸이 반기를 들었다. 따라서 여진女眞, 거란契丹, 해奚, 한인漢人으로 혼성된 대군은 37만을 헤아린다고 해도, 단순한 오합지졸이기 때문에 전혀 인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더구나 이들 북군을 가장 능숙하지 못한 수전으로 몰고 갔기 때문에, 지리적 이점도 동시에 잃었다. 채석기(采石磯, 안휘성 당도현當塗縣 서북西北) 전투에서 노윤문虞允文이 이끄는 남송 주사舟師에게 대패한 해릉왕은 군대를 양주로 이동하고, 과주(瓜洲, 강소성 江都現南)에서 재차 도강을 강행하려다가 병변 중에 횡사한다. (1161년)


7세에 문장을 지었던 영재 노윤문7세에 문장을 지었던 영재 노윤문


송나라 노윤문 군은 선제 공격에 나선다송나라 노윤문 군은 선제 공격에 나선다


수전에 약했던 금군은 대패수전에 약했던 금군은 대패

(출처 : 采石矶大战:虞允文凭借长江天堑击败60万金军(4))


출처 : 원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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