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역사

관구검을 막아낸 동천왕 기록의 의문점-조선상고사

믿을만한 건강정보 2017. 5. 23.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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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구검毌丘儉의 침략과 제2 환도丸都의 함락


서안평 전투서안평 전투


기원 245년경에 위가 동천왕의 잦은 침입을 걱정하여, 유주자사 관구검을 보내서 수만의 군사로 침략해오므로 왕이 비류수(沸流水)에서 이를 맞아 싸워서 관구검을 크게 격파하여 3천여 명을 목 베고, 양맥곡(梁貊谷)까지 추격하여 또 3천여 명을 목 벴다.


왕은, "위의 많은 군사가 우리의 적은 군사만 못하다."하고, 이에 여러 장수는 후방에서 싸움을 구경하게 하고 왕이 몸소 철기(鐵騎) 5천을 거느리고 진격하였는데, 관구검 등이 우리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 죽을 힘을 다하여 혈전을 벌여 전진해오므로, 왕의 군사가 퇴각하니 후군이 놀라 무너져서 드디어 참패하여 상한 군사가 1만 8천을 넘었다.


왕이 1천여 기병을 거느리고 압록원(鴨錄原)으로 달아나니 관구검이 드디어 환도(丸都 : 지금의 안고성安古城)에 들어와서 대궐과 민가를 다 불태워버리고 역대의 문헌을 실어 위로 보내고는, 장군 왕기(王頎)로 하여금 왕을 뒤쫓게 하였다. 왕이 죽령(竹嶺)에 이르렀을 때에는 여러 장수가 다 달아나 흩어지고, 오직 동부(東部)의 밀우(密友)가 왕을 시위하고 있었다.


뒤쫓는 군사가 급히 달려들어 형세가 매우 위급하게 되었는데, 밀우가 결사대를 뽑아 죽음으로써 위의 군사와 싸우고, 왕은 그 틈을 타서 도망하여 산골짜기에 들어가 흩어진 군사를 거두어 험한 곳을 지키고, 군중에게 영을 내련 밀우를 구원하여 오는 자는 큰 상을 내릴 것이라고 하니, 남부(南部)의 유옥구(劉屋句)가 이에 응하여 싸움터로 갔다.


밀우가 기진하여 땅에 엎드러져 있음을 보고 들러업고 돌아오니, 왕은 자기의 넓적다리 살을 베어 밀우에게 먹여 한참 만에 깨어났다. 이에 왕은 밀우 등과 함께 남갈사로 달아났다. 그러나 위병의 추격은 다급해졌다. 북부(北部)의 유유(紐由)가, 국가의 흥망이 달린 이같이 위급한 판에 위험을 무릅쓰지 않으면 위태로운 판국을 돌이킬 수 없다 하고, 음식을 갖추어서 위의 군사들 가운데 들어가서 거짓 항복하는 글을 바치고,


"우리 임금께서 대국에 죄를 해변에 이르러 다시 더 갈 곳이 없으므로 항복을 비시고, 먼저 얼마 안 되는 음식으로 군사들을 호궤하고자 합니다."


고 하니, 위의 장수가 그를 불러보았다. 유유는 음식 그릇 속에 감추어 갔던 칼을 빼 위의 장수를 찔러 죽였다.


관구검 기공비 탁본관구검 기공비 탁본

(출처 : [转载]历代名家手札、题跋,尺牍、手卷、扇面、斗方小品集锦)


왕이 군사를 명하여 위의 군사를 반격하니 위의 군사가 무너져서 다시 진을 이루지 못하고 요동의 낙랑으로 달아났다. 이 싸움에 대한 기사는 김부식이 삼국지와 고기(古記)를 뒤섞어서 고구려 본기에 넣었으므로 앞뒤의 기사가 서로 모순되는 것이 많다.


이를테면,


1. "관구검이 군사 1만 명으로 고구려를 침략하였다."하고 "왕이 보기(步騎) 2만 명으로 거역해 싸웠다."고 하였으니 고구려 군사가 위의 군사보다 갑절인데, 그 아래 동천왕의 말을 싣되, "위의 많은 군사가 우리의 적은 군사만 못하다."고 하였음은 무슨 말인가?


2. 비류수에서 위의 군사 3천 명을 목 베고, 양맥곡에서 또 위의 군사 3천여 명의 위병이 이미 6천여를 목 벴다고 하였는데, 1만 명의 위병이 이미 6천여 명의 전사자를 내어 다시 군대를 이룰 수 없었겠는데, 그 아래에 "왕이 철기(鐵騎) 5천으로 추격하다 크게 패했다."고 한 건 무슨 말인가?


삼국전투기. 비류수 전투삼국전투기. 비류수 전투


관구검전에 그 결과를 기록하여 "논공행상(論功行賞)을 받은 자가 백여 명이었다."고 하였으니, 그 출사한 군사의 많음과 싸움의 크기를 가히 미루어 알 수 있을 것인데, 어찌 겨우 1만 명의 출병이었으랴?


다만 저네의 역사에 상내약외(詳內略外)의 예를 지켜 그 기재가 이에 그쳤을 뿐이다. 고구려 본기에는 이 싸움을 동천왕 20년(기원 245년)이라 하였으니, 동천왕 20년은 위의 폐제(廢帝) 방(芳)의 정시(正始) 8년이요, 삼국지 관구검전에는, "정시(正始) 중에……현도의 군사를 내어 고구려를 치고……6년에 다시 정벌하였다(正始中……出玄免討句驪……六年復征之)."라고 하였으므로 해동역사(海東繹史)에는 정시 5년과 6년의 두 번의 전쟁으로 나누어 기록하였는데, 정시 5년과 6년은 동천왕 18년과 19년이다.


그러나 삼국지 본기에는 정시 7년에, "유주자사 관구검이 고구려를 쳤다(幽州刺史毌丘儉 討高句驪)."고 하여 고구려 본기와 맞는다. 어느 쪽을 좇음이 옳은 것인가?


최근 1905년 청(淸)의 집안현 지사(輯安縣知事) 아무개가 집안현 판석령(板石嶺) 고개 위에서 발견한 관구검의 기공비(記功碑)의 파편에 ‘6년 5월’의 글자가 둘째 줄에 보였으니, 만일 이것이 진정한 유적이라면 정시 6년, 동천왕 19년이 곧 그 싸움의 시작이고, 다시 싸웠다는 기록은 잘못이다. 그러나 옛 청조(淸朝)의 인사들이 고물(古物) 위조의 버릇이 매우 많아서, 지나 현대에 빛을 보게 된 옛 비석, 옛 기와가 거의 가짜라 하여 그 비서의 파편은 아직 고고학자의 심정(審定)을 필요로 할 것이고, 설혹 이것이 진짜 유적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불내성(不耐城)의 명(銘)이요 환도성의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집안현의 환도성은 제3의 환도성이요, 제3의 환도성은 동천왕 때에는 아직 건축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환도성 유적지환도성 유적지


환도성 유적지환도성 유적지


환도성 유적지환도성 유적지


환도성 유적지환도성 유적지


환도성 유적지환도성 유적지


환도성 유적지환도성 유적지


환도성 유적지환도성 유적지


환도성 유적지환도성 유적지


환도성 유적지환도성 유적지

(출처 : 自驾东北边陲小城集安——丸都山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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