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역사 472

만화 삼국지5 불타는 신야성. 화공으로 또 이긴 공명

만화 출처 - 重温儿时三国演义连环画之第二十四集 49. 허저가 크게 노해 군사를 이끌고 산을 오른다. 산 위에서 아래로 나무를 굴리고 돌을 날리자 전진할 수 없다. 50. 또한, 산 뒤에서 함성이 크게 나는지라 길을 찾아 무찌르려 하나 날이 이미 저물었다. 병력을 거느리고 도착한 조인이, 신야성을 빼앗아야 쉴 수 있다고 다그친다. 51. 군사들이 성 밑에 다다르니 4개 성문이 죄다 열려 있다. 조조 병력이 돌입해도 아무도 막아서지 않는다. 52. 성안에도 역시 한 사람도 없으니 그야말로 성하나가 텅텅 비었다. 조홍이 말한다. "형세는 외롭고 계책은 궁하니 백성을 모조리 데리고 도망한 것이 틀림없소. 우리는 잠시 여기 머물다가 내일 해가 뜨거든 진병해야겠소." 53. 이때 군사마다 지치고 굶주려 모두 방을 ..

동아시아 역사 2017.05.29

만화 삼국지4 공명과 유비가 산 위에 올라 승전보를 기다린다

만화 출처 - 重温儿时三国演义连环画之第二十四集 37. 이적은 재차 양양으로 들어가 유종과 채씨 일당을 몰아내고 형주를 손에 넣으라 권한다. 공명도 옆에서 거들지만, 유비는 다시금 거절한다. 38. 상의하고 있는데 탐마(정찰 기병)가 급보를 전하니, 조조 병력이 이미 박망에 도착했다는 것이다. 현덕이 황망히 이적을 강하로 돌려보내 군마를 정돈하게 하는 한편, 공명과 더불어 적을 막을 계책을 상의한다. 39. 공명이 말한다. "주공께서는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번에 화공으로 하후돈의 인마 태반을 불살랐습니다. 이번에 조조 군대가 다시 오니 필시 그가 저 계략에 걸려들었던 것을 가르쳐줬을 겁니다. 우리가 신야에 머물러서는 위험하니 어서 번성으로 가는 것이 낫습니다." 40. 곧 사람을 보내 4개 성문에 방..

동아시아 역사 2017.05.28

만화 삼국지3 유종, 송충을 시켜 조조에게 항복 문서를 전하다

만화 출처 - 重温儿时三国演义连环画之第二十四集 25. 유종의 앞으로 나아가 말을 잇길 "장군의 능력은 조공曹公에 비하면 어떻습니까?" 유종이 말한다. "미치지 못하오." 왕찬은 더 압박한다. "조공의 병력은 강하고 장수들은 용맹하며, 모사들은 지혜가 많고 계책이 넘쳐납니다. 지금 대군이 남하하는데 저희는 막을 길이 없습니다. 항복이 최선입니다. 장군께선 머뭇거리다 후회해서는 안 됩니다!" 26. 유종이 계속 망설이며 말을 잇지 못하자 그 어머니가 결정을 내린다. 채부인은 유종의 앞에 서며 말한다. "모든 관원이 한목소리로 내는데, 나는 더 할 말이 없다!" 27. 유종은 마침내 마음을 정하고 항복 서신을 쓴다. 그리고 송충宋忠에게 명해 몰래 조조 군대의 진영으로 가서 바치게 한다. 28. 송충은 완성에 ..

동아시아 역사 2017.05.28

만화 삼국지2 유종에게 항복을 권하는 부손 (간언올린 이규 죽다)

만화 출처 - 重温儿时三国演义连环画之第二十四集 13. 유기가 말한다. "나는 아버지를 뵙고 곧 돌아가야 하오". 채모와 왕윤은 서슬 퍼런 눈을 뜨고 칼을 굳게 잡은 뒤 유기를 막아선다. 유기는 영문도 모른 채 아버지를 만나지 못한다. 14. 유기는 아버지를 만나지 못해 마음이 아파 대성통곡을 한다. 15. 유기는 한바탕 크게 울었음에도 별다른 방법이 없자 강하로 돌아간다. 이때 아들을 보지 못한 유표의 병은 더 심해져 곧 사망한다. 16. 채부인은 크게 울며 부고를 알리는 한편, 채모, 장윤과 모의해 유언을 몰래 고친다. 그리곤 자기 아들 유종을 형주의 주인으로 삼는 가짜 유언을 발표한다. 17. 유종의 나이는 14세였으나 매우 총명했다. 그가 관원들에게 말한다. "그대들이 나를 옹립한 것처럼, 형님과 ..

동아시아 역사 2017.05.28

만화 삼국지1 유표가 죽기 전 유언을 남기다 (채부인의 음모)

만화 출처 - 重温儿时三国演义连环画之第二十四集 관도대전 이후, 조조는 형주 정벌을 위해 남쪽으로 군대를 돌립니다. 그러나, 유표 밑에는 유비 3형제와 삼고초려로 유명한 제갈공명이 있었죠. 이 만화는 제갈공명이 하후돈을 박망파에서 화공으로 물리친 이후부터 시작입니다. 만화 삼국지 - 불타는 신야성 1. 제갈량은 박망파博望坡에서 화공으로 조조군을 격파한다. 조조군 도독 하후돈夏侯惇은 패잔병을 이끌고 허창许昌으로 귀환한 뒤 조조에게 죄를 지었으니 벌을 달라 청한다. 2. 하후돈은 엎드린 채 조조 앞으로 나가 패배한 경위를 설명한다. 조조가 묻는다. "너는 어려서부터 병사를 다뤘는데, 어찌하여 좁은 길목의 화공을 예상치 못했느냐?" 하후돈이 부끄러워 고개를 차마 들지 못하고 말한다. "이전李典과 우금于禁이 언급..

동아시아 역사 2017.05.28

명림답부가 혁명가인가? - 조선상고사

제5장 차대왕次大王의 피살과 명림답부明臨答夫의 전권專權 (혼자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름) 차대왕次大王의 20년 전제專制 (국가의 권력을 개인이 장악하고 그 개인의 의사에 따라 모든 일을 처리함) 차대왕이 양위를 받아 20년 동안 고구려에 군림하여 전제하다가 연나(椽那)의 조의(皀衣) 명림답부(明臨答夫)에게 살해당하였다. 그러나 차대왕의 본기(本紀)가 간략하고 허술하여, 그 전제(專制)의 정도와 살해당한 원인이 무엇인지를 알기 어렵다. 이에 본기의 전문을 여기에 번역해 싣고 나서 논평하고자 한다. "차대왕의 이름은 수성(遂成)이니, 태조왕의 동모제(同母弟 : 동모제 3字는 서자로 고칠 것)로 용감하고 위엄이 있었으나, 인자(仁慈)가 적었다. 태조왕의 양위(讓位)로 왕위에 오르니, 나이 76세였다. (출처 :..

동아시아 역사 2017.05.27

곡주후 역상, 별동대의 선봉장이었던 그에 대해

출처 - 용호상박의 명장들, 장개충 별동대의 선봉장 역상 곡주후曲周侯 역상酈商은 고양(허난성 진류현) 사람이다. 진승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역상은 젊은이들을 모아 부근의 지역을 닥치는 대로 공략하는 과정에서 수천 명의 부하를 얻었다. 그로부터 반년이 지나자 유방이 진류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역상은 4천 명의 군졸을 데리고 기 땅에서 유방에게 귀속했다. 역상은 유방을 따라 장사(허난성 장갈현長葛縣)를 공격할 때 선봉에 섰던 공으로 작위를 받아 신성군에 봉해졌다. (출처 : 郦商勇猛堪比樊哙) 이어 유지(허난성 언수현)를 공격하고 황하의 나루터를 차단해 진나라 군사를 낙양의 동쪽에서 격파했다. 또 유방을 따라 완(허난성 남양현), 양(허난성 등현)을 공략하고 함락시키는 등 17개 현을 평정했다. 게다..

동아시아 역사 2017.05.27

원나라 종족별 신분 규정

종족별 신분 규정 몽골인, 색목인, 한인, 남인 원나라 치하의 주민은 크게 나누어서 몽골인, 색목인, 한인, 남인의 4종류로 구분되어 있었다. 원래 정복왕조에서는 다민족국가가 원칙이기 때문에 이러한 4종류가 병존하고 있었다고 해도 특히 별개의 것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특히 원나라는 몽골세계제국의 분신이기 때문에 그러한 색채가 짙은 것도 당연하다. 특별히 특징적인 것은 다수의 서역인(물론 여기서 말하는 서역인이란 그 본국과 원나라 사이를 내주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원나라 치하에 거주한 사람들을 가리킨다)이 그 속에 포함된 점이다. (출처 : 바이두 이미지) 원나라에서는 이들 1. 서역인을 일괄해서 색목인이라 칭했다. 이것은 여러 색목인의 약칭으로, 다시 말해 서방계에 속하는 각종 잡다한 사람들이라는 ..

동아시아 역사 2017.05.27

우산국을 점령한 이사부 - 맹수로 겁을 주다

이사부異斯夫(혹은 태종苔宗)는 성이 김씨요, 나물왕의 4대손이다. 지도로왕智度路王 때 연해 국경 지역의 지방관이 되었는데, 거居道도의 꾀를 답습하여 마희馬戰로 가야국伽耶을 취하였다. 지증왕 13년 임진(512)에 이사부는 아슬라주阿瑟羅州(강원 강릉시) 군주가 되어 우산국于山國(경북 울릉도)의 병합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나라 사람들이 어리석고 사나워 위력으로 항복 받기는 어려우니 계략으로 복속시킬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나무사자를 많이 만들어 전선에 나누어 싣고, 그 나라 해안에 다다라 거짓으로 말하였다. "너희들이 항복하지 않으면 이 맹수를 풀어 놓아 밟아 죽이겠다." (출처 : Dokdo, the territory of Silla 신라의 땅 독도, 그리고 이사부 장군) 그 사람들이 두..

동아시아 역사 2017.05.27

윤언이가 아깝지 묘청은 아깝지 않다던 단재의 글

고려사 묘청전(妙淸傳)을 보면, 묘청이 일개 서경(西京 : 평양)의 한 중으로서, "평양에 도읍을 옮기고 금국(金國)을 치자."하매, 일시에 군왕 이하 많은 시민의 동지를 얻어서 기세가 혁혁하다가, 마침내 평양에 웅거하여 나라 이름을 대위(大爲)라 하고, 원년 연호를 천개(天開)라 하고, 인종(仁宗)더러 대위국 황제의 자리에 오르라고 협박장 식의 상소를 올렸다. 반대당의 수령인 한낱 유생 김부식이 왕사(王師)로서 와서 문죄(問罪)하니, 묘청이 변변히 싸워보지도 못하고 부하에게 죽었으므로 묘청을 미친 자라고 한 사평(史評)도 있지마는, 당시의 묘청을 그처럼 신앙한 이가 많았음은 무슨 까닭이며, 묘청이 하루아침에 그렇게 패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고려사의 세기(世紀)와 열전(列傳)을 참고하여 보면 태조 왕건..

동아시아 역사 2017.05.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