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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 46

[명나라 역사] 홍승주를 꾸짖은 신동 하완순 편지 (옥중에서 어머니께)

[명나라 역사] 홍승주를 꾸짖은 신동 하완순 편지 (옥중에서 어머니께) 먼저 읽어볼 글 - 하완순이 홍승주를 꾸짖다 [클릭] 하완순이 옥중에서 어머니께獄中上母書 소자가 죽은 다음 아내에게 유복자가 생기거든 가문의 축복으로 여겨주시고, 그렇지 않거든 후사를 생각지 마십시오. 회계會稽의 대망족大望族(하씨 가문을 일컬음)도 이렇게 영락하고 마는군요. 글과 지조에 있어 저희 부자만 한 사람이 몇이나 있었습니까! ... ... 슬프게도 천지는 아득하나 한 집안의 후대는 영원할 수 없는 모양입니다. 언젠가 조정이 다시 일어서면 이 몸은 사당에 옮겨져 천추에 길이 제사를 받을 것이니, 어찌 밀가루 음식과 족발을 흠향하며 아귀餓鬼(제사상을 차려줄 후손이 없어 항상 배고픈 귀신)가 되지 않은 것에 그치겠습니까? ... ..

동아시아 역사 2016.11.22

북위 국사 사건, 최호와 태무제 (멸망하는 통일 왕조)

북위 국사 사건, 최호와 태무제 (멸망하는 통일 왕조) 한족 지식인들이 북위 정부에 속속 참가함에 따라 최호(북위 국사 사건의 주범)는 이 나라를 더욱더 중국적인 귀족제 국가로 개편하고자 했다. 당시의 말로 성족姓族을 분명히 하는 것, 즉 명망가로서 사회적인 평가 정도에 따라 가문의 신분적 차등을 명확히 규정하여 강남에서 행해지는 귀족제 사회의 계급 질서를 만들어 내고자 한 것이다. 고종사촌인 노현이 "그런 것을 원하는 자는 거의 없다. 아직은 시기상조다"라며 반대했으나, 태무제의 신임을 받던 최호는 받아들이지 않고 적극적으로 공작을 진행했다. 그것은 앞서 왕혜룡을 둘러싸고 불붙은 북족의 반감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마침 최호 등은 칙명을 받들어 북위의 국사를 편찬하는 중이었는데, 국사는 중국 사학의 ..

동아시아 역사 2016.11.22

사마천 궁형이란 치욕을 받다 (전한시대 한무제의 분노)

사마천 궁형이란 치욕을 받다 (전한시대 한무제의 분노) 한서漢書 (전한시대 역사서)누에를 치는 자는 따뜻한 곳에서 누에가 빨리 자라기를 원하므로 누에를 밀봉된 방에 넣어두고 불을 지피게 마련이다. 부형腐刑(남자를 거세하는 형벌, 사마천 궁형 시에도 마찬가지)은 죄인의 몸에 바람이 들어갈 위험이 있으므로 반드시 밀봉된 장소에서 행해졌으므로 그곳을 잠실蠶室(궁형에 처할 사람을 가둬두는 곳, 한무제는 바로 이곳에 사마천을 가둠)이라 불렀다. 청나라 저인획, 견호솝직의 부인유폐편 (睽人獲, 堅瓠續集, 婦人幽閉)갈석잉담碣石剩談에 '여자를 탁규椓竅한다'는 말이 나오는데, 탁椓은 여형에 나오는 말로 순전舜典의 궁형과 같은 뜻이다. 남자는 거세하고 여자는 막는 것을 이른다. ... '탁규'하는 방법은 나무망치로 여자의..

동아시아 역사 2016.11.21

중국 화북 지방, 위진남북조 전진 멸망 이후 흥망사

중국 화북 지방, 위진남북조 전진 멸망 이후 흥망사 중국 화북 지방, 동부의 흥망화북 동반부의 옛 전영 영내에서는 384년 모용수가 연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워 이윽고 중산中山(하북성 정현)을 수도로 삼고 제위에 올랐다. 이를 전연과 구별하여 후연이라고 한다. 또 모용수(전진 부견에게 중용)의 독립을 계기로 하여 옛 전연의 황제 모용위의 동생들이 장안의 동쪽과 산서성 남부에서 병사를 일으켰고, 이에 호응하고자 한 모용위가 부견에게 살해당한 뒤 동생 가운데 한 명인 모용충이 황제를 칭하였다. 위진남북조 시대의 이 세력은 서연西燕이라 한다. 중국 화북 지방의 서연은 부견으로부터 수도 장안을 빼앗았으나 관중으로 강제 이주되어 있던 선비족이 그 세력의 주체였고 그들은 동쪽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했기 때문에, 장안을 ..

동아시아 역사 2016.11.21

삼국시대 전설 2개, 백제 위례성 우물(소서노), 마한 태기왕

삼국시대 전설 2개, 백제 위례성 우물(소서노), 마한 태기왕 백제 위례성 우물(소서노)백제건국 초기, 형인 비류와 헤어져 산 위에 나라를 세운 온조는 동쪽으로 내려가서는 백성들에게 곡식을 키우는 방법도 가르쳐 주기도 하고 사냥하러 다녔으나, 밤에는 잠자리에 들어가면 새벽까지 일체 바깥에 몸을 나타내지를 않았다. 위례성 우물은 온조가 잠자는 움막의 바로 옆에 있었다. 밤이 되면 온조는 움막에서 나와서는 샘으로 들어간 후 용이 되어 북쪽으로 뚫린 한강으로 나갔다. 위례성 우물을 중심으로 땅속으로는 한강과 금강으로 통하는 강줄기가 있었다. 북쪽에서 떠나올 때 틀림없이 자기가 나라를 세우면 그들이 침범해 올 것을 예상했었다. 그래서 북쪽으로 올라와서 한강 변에 나와서는 북쪽 하늘을 살피고는, 적의 침범이 없을..

동아시아 역사 2016.11.20

위진남북조 시대 동아시아 고구려 (화북 국가와 충돌)

위진남북조 시대 동아시아 고구려 (화북 국가와 충돌) 고구려高句麗위진남북조 시대 동북아시아 여러 나라 가운데 가장 먼저 국가형성의 첫걸음을 내디딘 것은 고구려이다. 이는 1세기부터 2세기 동안 요동에서 한반도 북부에 걸쳐 설치된 요동군, 현도군 등 한제국의 파견기관과 직접 접촉하면서 투쟁을 겪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2세기 후반부터 3세기에 걸쳐 요동에서 반쯤 독립한 한인인 공손씨 세력과 화북을 제압한 위나라와의 접촉, 투쟁에서도 자극을 받았기 때문이다. 238년 위나라(위진남북조의 위를 말함)에 멸망한 공손씨의 반독립국에는 184년 황건의 대란으로 시작된 화북의 혼란을 피해 많은 한민족이 유입되었고, 그 가운데에는 당시의 일류 지식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고도의 중국 문명이 요동지방에 현실적으로 뿌리를 내..

동아시아 역사 2016.11.20

명나라 장거정이 제거한 하심은, 취화당과 공산주의

명나라 장거정이 제거한 하심은, 취화당과 공산주의 취화당이 설립된 것은 하심은이 과거를 포기한 1546(명나라 세종 주후총 시기)년이고, 해체된 것은 1559년이니 약 십 년 정도 유지된 셈이다. 결국 '황목은량皇木銀兩(궁정을 짓기 위해 거둔 조세와 부역)'이라는 특별세 납부를 거부함으로써, 그리고 조세 저항의 과정에서 몇몇 마을 사람들이 무기를 가지고 싸우다가 죽는 일이 발생했다. 이로써 (장거정을 포함한) 지방관들은 이를 빌미로 모든 죄를 하심은에게 뒤집어씌우고 체포하여 교수형을 내렸다. 하지만 후에 다른 사람들의 구제 활동으로 인해 유배로 감형되었다. 이때부터 그의 일생은 황야를 떠돌며 쫓고 쫓기는 숨바꼭질의 연속이 되었다. 왕지원王之垣의 역사록歷仕錄에 "각 성에서 매년 그 행적을 샅샅이 뒤졌으나 ..

동아시아 역사 2016.11.19

금수저 출신 제갈량의 배경과 조건 (유표, 채모, 황승언)

금수저 출신 제갈량의 배경과 조건 (유표, 채모, 황승언) 먼저 제갈량은 매우 좋은 배경을 갖추었습니다. 우리는 제갈량의 가족들이 보통의 평범함 백성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의 선조 제갈풍諸葛豊은 사례교위司隷校尉를 지낸 사람입니다. 사례교위의 지위는 높고 권력은 강하여, 서한 시대에는 삼공三公의 아래, 구경九卿의 윗자리에 해당했으며, 동한 시대에는 상서령, 어사중승御史中丞과 더불어 삼독좌三獨坐(위의 세 직책은 조정에서 조회할 때에 전용 좌석이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삼독좌라 불렸음)라고 불렸습니다. 제갈량의 부친인 제갈규諸葛珪는 군승郡丞을 지냈고, 숙부인 제갈현은 태수를 지냈기 때문에, 제갈량도 관리의 자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관료 사회의 사정에 대해서는 틀림없이 그도 얼마간은 알고 있었을 것입니..

동아시아 역사 2016.11.19

삼국지 책 추천, 이중톈 삼국지 강의 1권 (조조 중심)

삼국지 책 추천, 이중톈 삼국지 강의 1권 (조조 중심) 삼국지 강의는 1, 2권 양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개인적으로 2권을 먼저 보았습니다. 당시에 삼국지의 세계란 책을 먼저 봤었기에 조조와 유비 사후의 삼국지 세계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한들, 삼국지 책 추천한다면 1, 2권 모두를 이야기하겠습니다. 2권을 먼저 볼 때 크게 흥미로웠던건 진수의 삼국지와 배송지의 주를 기반으로 쓴 책이 아니라, 중국내 다른 연구들의 의견과 저자인 본인의 의견을 기반으로 삼국지와 배송지 주는 참조의 역할로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분명히 기존의 삼국지 관련 서적과는 차별화된, 삼국지 강의만의 매력이 됩니다. 삼국지 강의 1권에선 주로 조조의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삼국지 책 추천할 때 조조 이야기 많이 나..

동아시아 역사 2016.11.18

조조가 한나라 헌제를 끝까지 모셔야 했던 이유? [삼국지]

조조가 한나라 헌제를 끝까지 모셔야 했던 이유? [삼국지] 순욱이 조조에게 제시한 천자를 높여서 받들고, 공평무사하며, 정의를 크게 선양하라는 삼대 강령은 전방위적으로 조조의 개인적 야심을 억제했습니다. (한나라 마지막 황제, 헌제의 자리에 욕심내지 말라는 의도도 있었음) 그리고 마음이 언제나 황실을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고와, 장군의 숙원이 천하를 바로잡아 회복하려는 데에 있다는 이 두 마디는 마치 조조 자신이 한 말에 자신을 옥죈 것과도 같아서, 그가 평생 감히 한나라 헌제를 대신하여 서슴없이 황제라 칭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조조는 자신의 야심이 부풀어 올랐을 때 그들에게 원한을 품었는지도 모릅니다. 순욱은 핍박을 받아 자살하였으며, 모개도 하옥되어 하마터면 죽을 뻔했습니다. 이것은 물론..

동아시아 역사 2016.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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