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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위 국사 사건, 최호와 태무제 (멸망하는 통일 왕조)

믿을만한 건강정보 2016. 11. 22.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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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위 국사 사건, 최호와 태무제 (멸망하는 통일 왕조)


한족 지식인들이 북위 정부에 속속 참가함에 따라 최호(북위 국사 사건의 주범)는 이 나라를 더욱더 중국적인 귀족제 국가로 개편하고자 했다. 당시의 말로 성족姓族을 분명히 하는 것, 즉 명망가로서 사회적인 평가 정도에 따라 가문의 신분적 차등을 명확히 규정하여 강남에서 행해지는 귀족제 사회의 계급 질서를 만들어 내고자 한 것이다.


고종사촌인 노현이 "그런 것을 원하는 자는 거의 없다. 아직은 시기상조다"라며 반대했으나, 태무제의 신임을 받던 최호는 받아들이지 않고 적극적으로 공작을 진행했다. 그것은 앞서 왕혜룡을 둘러싸고 불붙은 북족의 반감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마침 최호 등은 칙명을 받들어 북위의 국사를 편찬하는 중이었는데, 국사는 중국 사학의 전통에 따라 설령 국가에 불리한 것이라도 사실을 있는 그대로 직필하는 태도로 기록되었다.

이렇게 해서 쓰인 국사를 비석으로 새겨 수도의 성내에 세우자고 편찬관 하나가 제안을 했다. 그것은 당시 제일 급 학자이기도 했던 감수자 최호의 이름을 후세에 길이 전하자며 제안한 것으로, 최호에 대한 아부였다. 최호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고 태무제의 황태자도 거기에 찬성하였다.


공비 3백만을 들여 국사를 새긴 비석이 줄을 이어 세워졌다.


길을 가던 사람들이 발길을 멈추고 읽어 보니, 거기에는 현재의 제실의 선조인 탁발부족이 멀리 북방의 문화 끝에서부터 나온 과정이 객관적으로 묘사되어 있었다. 북족 출신자에게 그것은 참기 힘든 모욕으로 받아들여졌고, 최호 등은 국가의 치욕을 폭로한다는 비난이 일어났다.


북위 최호의 동상[통일왕조 북위의 멸망 전초] 북위 최호 동상


이를 듣고 격노한 태무제는 최호 이하의 편찬관을 사형에 처하고, 그것만으로도 모자라 최씨 일가는 물론 그 인척인 범양의 노盧씨, 태원의 곽郭씨, 하동의 유柳씨 일가에까지 형벌을 내렸다. 이는 450년 6월의 일로 소위 국사 사건이라고 불린다.


최호와 연루되어 대탄압을 받은 사람들은 이미 화북에서 제일 급의 명망가에 속하고 모두 학식 있는 문화인들이었다. 그때까지 태무제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으며 최호가 부지런히 축적해 온 중국적인 귀족제 국가 건설의 꿈은 하루아침에 무너져 버렸다.


이민족 왕조로서의 북위 제국의 성격이 한족 지식인들 앞에 새롭게 냉엄한 현실이 되어 나타난 것이다. 태무제는 이 사건 직후, 강남의 한족 국가 송에 대한 정복 전쟁을 단행했으나 결국 강북을 휘젓고 돌아다녔을 뿐 정복에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 무렵 북위 궁정에서는 환관인 종애가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종애는 황태자를 핍박하여 근심에 빠진 그를 죽음으로 내몰고, 452년에는 결국 태무제까지 암살하고 말았다.

그 뒤 자신의 구미에 맞는 태무제의 막내아들 남안왕 탁발여를 제위에 앉혔으나 이도 또한 살해하는 폭거를 거듭하였기 때문에 실각하였다. 이리하여 태무제의 적손으로 겨울 열세 살 난 탁발준이 제위에 올랐다. 이를 문성제(재위 452~465)라고 하고, 그가 죽은 뒤에 아들 탁발홍이 제위를 잇는다.


국사 사건의 여파로 주살 당하는 최호국사 사건의 여파로 주살 당하는 최호


헌문제라고 불리는 이 황제도 열두 살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이윽고 실권을 장악한 황태후 풍씨의 강요로 재위 6년 만인 471년에 겨울 다섯 살밖에 안 된 탁발굉, 즉 효문제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결국 풍태후에게 살해당한다.


국사 사건 후 20년 동안 이 피비린내 나는 궁정의 사건을 포함하는 시기에 대하여 사서가 남긴 기사는 너무나 적다.


아마 국사 사건에 의해 국가의 중요 사건을 기록하는 작업이 정체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궁정 혼란은 전진을 제외한 5호 여러 나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북족에게 고유한 종실적 군사봉건제의 부패화 현상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북위 효문제 동상북위 효문제 동상


즉 당시 북위에도 군대를 장악한 종실, 귀족이 그 힘을 배경으로 사리를 추구하는 경향이 있었다.


국사 사건을 계기로 대량의 한족 지식인이 탄압당하면서 그 부패화 현상에 대한 관료 측의 제어능력이 약해졌고, 그 결과 사익 추구 경향이 궁정 혼란이라는 모습으로 빙산의 일각을 드러낸 것으로 생각된다.


중국의 역사 위진남북조, 가와카쓰 요시오, 혜안

북위 국사 사건, 최호와 태무제 (멸망하는 통일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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