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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 46

규원사화 중요성과 대종교 신단실기, 환빠로 변질된 사상

규원사화 중요성과 대종교 신단실기, 환빠로 변질된 사상 아랫글은 역사 21이란 사이트에서 무명이란 닉네임을 쓰시는 분의 글입니다. 규원사화의 중요성과 대종교와의 관계 (무명)도대체 몇 대 단군이 몇 년 동안 재위했고 무슨 일을 몇 년도에 했다는 사실이 어떻게 나올 수 있었을까요? 환빠들이 좋아하는 규원사화는 역대 단군의 이름이 나오는 최초의 사서(?)입니다. (신단실기가 베낀 책) 그전, 허미수가 동사를 쓰면서 단군의 아들 부루와 부루가 도산에서 우임금이 제후 회의를 소집하자 회동했다(입조 했다)는 이야기를 씁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규원사화와 대종교의 관계가 아리송합니다. 삼국유사의 단군 이야기에서 한 단계 나간 거죠. 그리고 상 무정 8년에 단군이 죽었다고 구체적인 연도까지 기재합니다. 부루는 단군 즉..

동아시아 역사 2016.11.30

주원장(홍무제)에게 목숨을 잃은 문인 13명 [오함의 주원장전]

주원장(홍무제)에게 목숨을 잃은 문인 13명 [오함의 주원장전] 오함吳唅의 주원장전 (명나라 태조 홍무제) 문인 1. 처주處州 교수敎授 소백형蘇伯衡은 그가 쓴 전론箋論 때문에 죽임을 당했다. - 전箋은 간단한 쪽지 정도로도 해석할 수 있는데, 제가 자세히는 모르겠으나 황제나 관원에 올리는 간단한 메모 정도로 트집이 잡혀 죽었다고 보입니다. 둘째 아들 역시 아버지를 옹호하다 연루되어 벌을 받지요. 문인 2. 태상경太常卿 장우張羽는 일에 연루되어 강에 몸을 던졌다. (그가 뛰어들어 자살한 것이 아니라, 홍무제에 의해 강제로 팔다리가 묶여 장강에 던져졌다) - DOTA에서 활약하는 장우가 아니라... 홍무 연간에 수도로 입경했으나, 주원장 없이도 즐거워했었다는 이유로 홍무 18년(1385년)에 오령 이남岭南으..

동아시아 역사 2016.11.28

발해 역대 왕 계보, 발해왕조는 대조영~대인선 15대 (유득공 발해고)

발해 역대 왕 계보, 발해왕조는 대조영~대인선 15대 (유득공 발해고) ※ 왕명 - 선왕과의 관계 - 연호 - : 당에서 책봉한 벼슬 진국공(震國公) 대중상 ? - 인안(仁安): 진국공(震國公) 고왕(高王) 대조영, 아들(子): 698년~719년: 좌효위대장군(左驍衛大將軍), 발해군왕(渤海郡王), 홀한주도독(忽汗州都督) 무왕(武王) 대무예, 아들(子): 719년~739년: 계루군왕(桂婁郡王), 좌효위대장군(左驍衛大將軍), 홀한주도독(忽汗州都督), 발해군왕(渤海郡王) 문왕(文王) 대흠무, 아들(子) - 대흥(大興): 737년~793년: 좌효위대장군(左驍衛大將軍), 홀한주도독(忽汗州都督), 발해군왕(渤海郡王), 좌금오대장군(左金吾大將軍), 특진(特進), 태자첨사(太子詹事), 태자빈객(太子賓客), 발해국왕(渤..

동아시아 역사 2016.11.27

주덕송, 죽림칠현 유령, 애주가가 외칩니다 "알라뷰 알콜"

주덕송, 죽림칠현 유령, 애주가가 외칩니다 "알라뷰 알콜" 죽림칠현 유령劉伶은 주덕송酒德頌(1)을 지었는데, 그것은 그의 기개를 의탁한 것이었다. 유효표의 주. (1) 명사전名士傳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유령(죽림칠현 중 한사람, 주덕송을 지음)은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고 우주를 좁다고 했다. 언제나 녹거를 타고 한 병의 술을 휴대했는데 하인이 삽을 들고 따르게 하였다. 그리고, "내가 죽거든 곧 구덩이를 파고 묻도록 하라." 고 말했다. 육신을 흙이나 나무처럼 생각하고 자기 마음대로 이 세상을 살았다.' 죽림칠현론竹林七賢論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죽림칠현 유령은 천지 사이에 있으면서 유유히 자기 마음대로 살았는데 어떤 일도 괘념치 아니했다. 어느 때 속인俗人과 서로 다투었는데 그 사람이 옷소매를 흔들면..

동아시아 역사 2016.11.27

천하 삼분 지계, 삼국지 노숙과 제갈량의 차이점 (융중대)

천하 삼분 지계, 삼국지 노숙과 제갈량의 차이점 (융중대) 첫째, 노숙의 천하 삼분 지계에서 주체는 손권, 유표, 조조입니다. 그러나 제갈량의 천하 삼분 지계에서 주체는 유비, 손권, 조조입니다. 이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제갈량은 유비를 위해 계획을 짰고, 그를 위해 형주를 차지할 계획(즉, 융중대)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유표에게 한자리를 내줄 수 없었겠지요. 반면 노숙이 손권을 위해 계획을 세웠을 때는 유비가 아직 남의 울타리에 있었으므로 자연히 그를 포함해 천하 삼분 지계하겠다고 생각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유표가 죽은 이후, 노숙은 곧바로 전략을 유비와 연합하여 조조에 대항하는 것으로 변환합니다. 둘째, 제갈량이 설정한 목표는 '한 황실의 부흥'이지만, 노숙은 '한 황실은 부흥할..

동아시아 역사 2016.11.26

가남풍 어머니의 포악함? 누명? 사마충의 장모 이야기

가남풍 어머니의 포악함? 누명? 사마충의 장모 이야기 가충의 후처 곽씨郭(곽괴, 郭槐)는 투기가 심했다. 여민黎民이라고 하는 아들이 있었는데, 태어난 지 갓 한 돌이었다. 가충(위나라 시기 명신이며 사마염, 사마충의 진나라 때에도 대신)이 밖에서 돌아왔을 때, 유모가 아이를 안고 정원에 있었는데, 아이가 가충을 보고 좋아서 뛰자, 가충이 유모에게 다가가서 유모 손안에 있는 아이에게 입을 맞추었다. 곽씨(가남풍의 어머니)는 이 모습을 멀리 보고 가충이 유모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곧바로 그녀를 죽여 버렸다. 아이는 슬픔 속에서 유모를 그리며 울었고, 다른 젖을 먹지 않다가 결국 죽고 말았다. 곽씨는 그 후 끝내 아들을 낳지 못했다. 유효표의 주. 진제공찬晉諸公寶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곽씨는 바로..

동아시아 역사 2016.11.26

5대10국 시대 남당 이후주, 무능했던 일화 9가지 (중국 오대십국)

5대10국 시대 남당 이후주, 무능했던 일화 9가지 (중국 오대십국) 1. 오대십국 시대 송나라 태조 조광윤에게 항복하며, "신(5대10국 시대 남당 이후주 본인)은 본래 학문을 하던 사람으로, 재주가 없음을 실로 부끄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학사에서 나온 후부터는 마음이 명리와 봉록에서 멀어졌고, 부형父兄의 그늘에서 하루하루 즐기며 살았습니다. 언제나 소보巢父, 허유許由(요 임금 때의 은사)의 발끝이나 따라갈 수 있을까를 생각하고 백이와 숙제의 높은 뜻을 흠모했습니다......" 2. 속자치통감 8권 (5대10국을 포함한 역사서, 청나라 때 지어짐)남군유수南郡留守 겸 시중侍中인 임인조林仁肇의 위명이 높아 송나라 조정에서 그를 꺼렸다. 그래서 몰래 사람을 시켜 그의 초상을 그리게 한 다음 사신을 접대하는 ..

동아시아 역사 2016.11.24

동진 사현을 추천한 치초, 비수대전 부견의 탄생 일화 (위진남북조)

동진 사현을 추천한 치초, 비수대전 부견의 탄생 일화 (위진남북조) 치초郗超와 사현謝玄은 사이가 좋지 않았었다. 때마침 부견이 동진을 병합코자 했는데 우선 양梁, 기岐의 땅(하남성 남부에서 호북성 북부 일대)을 침범하고, 다시 호시탐탐 회수 남쪽도 노리고 있었다. (비수대전을 일으키기에 앞서 국경 요충지를 먼저 함락함) (1) 당시 조정에서는 사현을 파견하여 북벌시키고자 하는 의견이 많았는데 세상의 논자들 사이에서 찬반양론이 있었다. 그러나 치초 만큼은, "사현은 틀림없이 해낼 것이오. 옛날 나는 그와 함께 환선무桓宣武(선무장군이었던 환온)의 막부에 있었는데 그가 인재를 등용하는 방법을 보면, 등용한 사람에게는 그 힘을 모두 발휘케 하고, 신분이 아주 낮은 자까지도 등용했었소. 이런 점으로 볼 때 틀림없..

동아시아 역사 2016.11.24

조선 시대의 재상 (종2품 이상의 고관이 재상)

조선 시대의 재상 (종2품 이상의 고관이 재상) 고려의 행정 체계와 법제를 고스란히 계승한 조선은 종2품 이상의 고관을 모두 재상으로 호칭했습니다. 정1품인 삼정승부터 종2품인 관찰사, 병마절도사까지 재상급 관리로 호칭했는데 고려와 달리 무신도 재상으로 호칭한 것이 이채롭습니다. 여기에 정3품인 통정대부와 절충장군도 재상의 대우를 받았고 승정원의 승지 역시 품계는 이르지 못했지만, 왕명출납이라는 중책으로 재상급의 대우를 받았습니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조선의 재상은 60명에 이르렀는데 이렇게 재상이 많다 보니 품계나 출신에 따라 1품 재상 2품 재상 3품 재상 문신재상 무신재상 종친재상으로 구분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레 정 2품 이상을 별도로 대감大監이라하고 그 이하 당상관을 영감令監이라 통칭하는 것이 일반..

동아시아 역사 2016.11.23

육진의 난, 성민의 대란, 쇠퇴하는 중국 북위와 무능한 호태후

육진의 난, 성민의 대란, 쇠퇴하는 중국 북위와 무능한 호태후 호태후 시기, 심화하는 지방 군인의 불만 정년격으로 인해 폭발 점까지 달해 있던 우림, 호분 군사의 불만은 일단 해소되었으나, 이런 인사의 퇴폐로 인하여 관계官界의 분위기가 침체한 것은 당연했다. 육진의 난은 어찌보면 필연적이었다. 그리고 중앙에 있던 북족 군인의 불만은 이것으로 해소되었다고 하더라도, 그보다 훨씬 심각한 문제는 지방 특히 변경에 배치된 군인들의 불만이었다. 중국 북위의 화북 지배는 요소요소에 비치된 진鎭과, 진이 주州로 전환된 후에도 아직 그곳에 주둔하는 북족 군사의 군사력에 의해 지탱되고 있었다. 그들은 중앙의 우림, 호분의 군사만큼은 아니라 해도 역시 군인으로서 북위를 지탱한다는 높은 자긍심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효문..

동아시아 역사 2016.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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