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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수라상과 음식 그릇, 국립고궁박물관

국립고궁박물관은 경복궁 바로 옆에 있습니다. 이곳 2층에 가보면 왕실의 생활관이 있는데 이곳에서 수라간 정보들을 봤습니다. 이곳을 들렀다 나오면 ... 괜히 배고파집니다. 그러니 식후에 돌아보는 걸 추천해요 ㅎㅎㅎ. 수라상, Surasang, the Royal Meal Table 조선시대 왕의 밥상인 수라상은 각 지방에서 올라온 좋은 재료를 사용해 최고의 맛과 모양을 낸 음식들로 차려졌다. 수라상 상차림은 밥과 탕을 포함한 기본 음식과 12가지 반찬으로 구성된 12첩 반상으로 이루어졌다. 12첩 반상은 왕실만을 위한 것으로 일반 반가에서는 차릴 수 없었다. 왕의 수라상은 기본적으로 세 개의 상으로 이루어졌다. 하나는 왕의 앞에 놓이는 대형의 둥근 밥상(대원반大圓盤)이고, 다른 하나는 음식에 독이 들었는지..

동아시아 역사 2017.06.11

청주 흥덕사지 출토 유물 - 고인쇄박물관

직지에는 이 책이 청주 흥덕사에서 인쇄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흥덕사가 1984년 '운천지구택지개발사업'을 시작하면서 진행한 '운천동사지발굴조사' 중에 새로운 절터가 발견되었다. 이에 1985년에 이 절터에 대해 발굴조사를 하였는데, "서원부흥덕사西原府興德寺"라는 글자가 새겨진 청동금구靑銅禁口 조각과 "황통십년흥덕사皇統十年興德寺"라고 새겨진 청동불발靑銅佛鉢이 출토됨으로써, 이곳이 직지를 인쇄한 흥덕사지로 확인되었다. 이밖에도 '계향지사桂香之寺', '대중삼년大中三年(849)'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와 조각, 청동소종, 금강저, 철불나발편 등이 출토되었다. 흥덕사지 치미전통건물의 용마루 양쪽 끝에 올려 건물이 더욱 웅장하게 보이도록 하는 기와로 '망새'라고도 한다. 건물의 권위나 위엄을 상징하며, ..

동아시아 역사 2017.06.08

아리수(한강)를 건넌 고구려 군사와 일상 생활

아리수를 건넌 고구려 4세기에 고구려는 낙랑군과 대방군을 축출하는 등 정복 전쟁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396년 광개토왕은 백제를 공격해 58개 성 700개 마을을 빼앗고, 아리수阿利水(한강)를 건너 백제 아신왕의 항복을 받고 돌아갔다. 이후 475년 장수왕이 백제의 도읍인 한성漢城을 함락시키고 한강 유역을 장악하였다. 고구려는 한강 유역의 요충지에 크고 작은 군사시설을 만들고 군현을 설치했으며, 551년 백제와 신라 연합군의 공격을 받기 전까지 이 지역을 76년간 지배하였다. In 396, King Gwanggaeto of Goguryeo attacked Baekje across the Arisu(Hangang River), returned home after the surrender of King As..

동아시아 역사 2017.06.06

가야의 대외 교류 (백제, 신라, 중국, 일본과의 교류)

가야의 대외교류 가야의 많은 나라가 낙동강과 그 지류, 그리고 남쪽 바다 가까운 곳에 있었다. 육지는 물론이고 강과 바다로 이어진 물길로 많은 사람과 물자가 오갔는데, 가야 지역의 특산품 중 하나는 철鐵이었다. 전기 가야연맹을 이끈 금관가야는 우수한 철을 생산해 한韓, 예濊, 왜倭와 서북쪽의 낙랑, 대방군에 공급한 것으로 알려진다. 철을 만드는 기술은 단단한 그릇을 만드는 기술로도 이어졌다. 5~6세기에 가야는 한반도와 일본 열도를 잇는 중요한 통로였다. 백제와 왜의 사신 모두 가야를 거쳐 바다를 건넜다. 비록 6세기 중엽에 가야 제국이 멸망하였지만, 가야 사람들이 개발하고 운영한 교통, 교역 네트워크는 여전히 남아 동아시아의 사람, 기술, 문화를 더욱 풍요롭게 하였다. (5세기엔 고구려 평양, 백제 한..

동아시아 역사 2017.06.05

금속활자, 목활자, 목판본 구별 방법

금속활자본과 목활자본 구별법 금속활자본 목활자본 글자모양 일정한 글자본에 의해 주형을 만들어 주조하였기 때문에 글자 모양이 같고 정연하다. 그러나 글자본이 다르거나 주조방법이 다른 초기 및 민간활자의 경우는 동일한 글자라 하더라도 글자 모양이 다르다. 활자 하나하나가 글자본을 써서 뒤집어 붙이고 새겨 내기 때문에 동일한 글자라 하더라도 같은 글자 모양이 없고 조금씩 또는 각각 다르다. 민간 활자는 글자 모양이 더욱 고르지 않고 치졸하다. 글자획 글자획의 굵기가 고르고 일정하다. 그러나 어미자에 의한 주조방법을 쓰지 않은 초기 및 민간 활자인 경우는 그다지 고르지 않다. 획의 굵기의 차이가 심하며 고르지 않다. 마멸 오래 사용하면 글자획이 마멸되어 가늘어지고 일그러지지만 글자 획은 떨어지지 않고 붙어있다...

동아시아 역사 2017.06.05

그림 속 백제 사신의 모습 (양직공도)

양직공도梁職貢圖는 6세기 중국 양나라를 찾은 백제, 왜 등 외국 사신들의 모습을 그리고, 그 나라의 역사와 풍속을 기록한 화첩이다. 지금 남아 있는 그림은 양나라 원제元帝(재위 552~554) 소역이 왕자 시절인 539년에 제작한 원본을 1077년 북송 시대에 모사한 것이다. 백제국사百濟國使로 기재된 그림 속 백제 사신의 모습은 가늘고 길게 째진 눈매에 낮고 넓은 콧방울, 작지만 붉은 입술, 오동통한 볼이 특징이다. 머리에 흰색 관을 쓰고 두루마기와 바지를 입었으며, 검은색 가죽신을 신었다. 백제 사신 그림 옆에는 백제의 유래와 도성, 제도, 풍속 등에 대해 기록되어 있다. 이 백제 사신 그림은 백제 사람의 구체적인 모습을 담은 유일한 자료이다. 타이완臺灣 국립고궁박물원國立故宮博物院에 소장된 남당고덕겸모..

동아시아 역사 2017.06.04

우리 민족 인쇄의 시작과 역사, 사례

인쇄의 시작 자신의 의사를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고 또 전달받는 정신적, 심리적인 교류는 인류문화의 시작과 함께 존재해왔다. 음성, 몸짓과 같은 원시적인 매개수단에서부터 언어와 문자, 인쇄를 거쳐 현대의 인터넷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다양한 소통수단을 통해 끊임없이 정보를 생산, 전달하고 유통해왔다. 또 이러한 과정의 기술적인 진보와 발전은 곧 인류 문명사의 근간이 되어왔다. 그 가운데 인쇄는 정보의 기록과 전달을 위한 가장 획기적이며 합리적인 매체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인류역사에서 현재와 같이 정보의 대량 보급과 유통이 가능해진 것은 그렇게 오래된 일이 아니다. 인간은 음성과 몸짓을 통한 원시적인 의사 표현 단계를 지나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고 보존하기 위해 다양한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만..

동아시아 역사 2017.06.04

조선 문종10. 문종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단종을 두고 눈을 감다)

"조선 문종10. 문종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단종을 두고 눈을 감다)" 왕실의 권력 공백 사태 단종을 두고 눈을 감은 문종의 마음? 문종은 생전에 아들 걱정이 많았고, 집현전 학자들과의 친분이 좋았습니다. 하루는 신숙주, 박팽년 등과 이야기를 나누다 어린 단종을 무릎 위에 앉히며, 이 아이를 당신들이 잘 보필해야 한다는 말도 했었죠. "임금이 병환이 나니 집현전의 여러 신하를 불러 토론하다가 무릎에 단종을 앉히고 '내가 이 아이를 경들에게 부탁한다'하고 술을 내려 주었다." 연려실기술 제4권 문종조 고사본말(文宗朝故事本末) 문종은 정말 계유정난의 조짐을 눈치채지 못했을까? 문종은 생전에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의 세력과 조짐이 수상하다는 언관들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세종은 왕자(대군)라 해도 능력이 있다..

동아시아 역사 2017.06.04

조선 문종9. 단종과 경혜공주를 두고 사망한 문종

"조선 문종9.단종과 경혜공주를 두고 사망한 문종" 1452년 음력 5월. 궁에 죽음의 기운이 드리운다. 왕위에 오른 지 2년 3개월. 문종은 갑자기 생을 마감한다. 세자 나이 12살. 개국 60년 만에 조선은 권력 공백 사태를 맡게 된다. 김종서대 수양대군으로 나뉜 궁은 곧 긴장감에 휩싸인다. 문종의 죽음이 불러온 비극 문종실록에 보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신민臣民의 슬퍼함이 세종世宗의 상사喪事보다도 더하였다.", 1452년 5월 14일 문종실록 비록 재위 기간은 짧았지만, 백성들에겐 좋은 기억이 남았던 왕이었습니다. 그 당시 백성들에게도 아버지 세종을 꼭 빼닮은 성군이란 이미지가 강했고, 어린 단종을 두고 세상을 떠난 안타까움이 더해졌을 겁니다. 문종을 죽음으로 몰아간 종기? 조선왕과 세자의 일..

동아시아 역사 2017.06.04

조선 문종8. 세자 섭정을 허락한 세종 (1442년)

"조선 문종8.세자 섭정을 허락한 세종 (1442년)" 1442년. 세종은 자신을 대신해 스물아홉 세자에게 나라를 다스리게 할 뜻을 밝힌다. 1442년 세종실록 "세자로 하여금 서무를 처결하게 하고자 한다." "동궁에 세자가 사무를 처리하는 관원을 두게 하라" 갑작스러운 왕의 결정에 대신들은 강력하게 반발한다. 하지만, 세종은 뜻을 굽히지 않는다. 왕의 강력한 왕의 의지에 반대하던 대신들도 세자의 섭정을 받아들인다. 전례가 없는 파격적인 세자 섭정. 세종은 무슨 생각이었던 걸까? 조선 시대 세자 섭정은 일반적이었나? 일반적인 일은 아닙니다. 대리청정이라고 해서 공부하는 세자에게 간접적인 국가 경영을 맡아보게 할 수는 있지만, 대부분은 왕이 위기의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아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이죠. ..

동아시아 역사 2017.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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