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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역사 472

조선 정조대왕 수원행차 그림과 갑옷, 투구 (수원화성박물관)

조선 정조대왕 수원행차 그림과 갑옷, 투구 (수원화성박물관) 정조대왕의 갑옷과 투구1795년 윤2월 9일, 정조대왕은 수원행차 시 융복의 차림으로 창덕궁을 출발하였으나, 이튿날 장안문에 다다르자 군문軍門의 절차가 필요함을 밝히고 막차의 설치를 병조판서 심환지에게 명하여 갑주로 갈아입고 입성하였다. 또한, 윤2월 12일 정조대왕은 서장대에서도 군사훈련인 만큼 갑주차림으로 절차를 진행하였다. 서장대야조도 그림에서 장수들의 군복차림을 확인할 수 있다. 본 갑옷과 투구는 KBS 다큐멘터리 "의궤, 8일간의 축제"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현전하는 장수들의 갑옷과 문헌사료들을 토대로 복원된 재현품이다. 대모백은장 옥구 보도玳瑁白銀裝玉具寶刀목재로 만들어진 칼집과 손잡이의 외부를 대모玳瑁(바다거북의 등껍질)로 마감하여 제..

동아시아 역사 2017.10.10

조선 정조대왕 13차 수원 행차와 군복 (수원화성박물관)

조선 정조대왕 13차 수원 행차와 군복 (수원화성박물관) 이 포스트는 수원화성박물관에서 개최한 조선 정조대왕 수원 행차 행사에서 찍은 사진과 글을 소개합니다. 조선 후기 성군인라 칭송되는 조선 정조대왕은 탕평 군주이자 문예 군주로 규장각 설치, 장용영 창설, 수원화성 축성 등의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 특히 수원과는 특별한 인연을 맺어 재위 기간 동안 무려 13차례나 수원 행차를 거행하였습니다. 1789년 수원으로 옮겨 조성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에 매년 참배하기 위한 행차였습니다. 조선 정조대왕은 재위 20년이 되는 해인 1795년 을묘년 8일간의 성대한 수원 행차를 위해 6천 명이 넘는 수행원을 이끌고 화성행궁으로 향했습니다. 백성들과 함께 어머니 혜경궁의 회갑 잔치를 수원에서 베풀어 자식으..

동아시아 역사 2017.10.09

부산포해전3. 400여척 격파, 1592년 9월 2일 [임진왜란 이순신 전쟁]

부산포해전3. 400여척 격파, 1592년 9월 2일 [임진왜란 이순신 전쟁] 초2일 (이로부터 8일 후인 9월 11일 경상도 성주에서 김면의 의병 부대가 왜군을 격파했다.9월 16일에는 함경도 경성에서 정문부의 의병 부대가 왜군을 격파했다.그 뒤 10월 초6일에 진주에서 목사 김시민 등이 왜군을 무찌르고 성을 지켰다.10월 30일에 함경도 길주, 장평에서 정문부의 의병 부대가 왜군을 격파했다.11월에는 경상도 상주에서 정기룡 부대가 왜군을 격파했다.성주에서는 김면의 의병 부대가 7~14일에 걸쳐 왜군을 격파했다.10일 길주에서 정문부의 의병 부대가 왜군을 격파했다.) 싸우고 난 다음 날이다.또 한 번 쳐들어가서 적들의 소굴을 불 지르고, 배들을 전부 깨부술까 하였다. 그러나 위로 올라간 적들이 여러 곳..

동아시아 역사 2017.10.07

부산포해전2 절영도. 1592년 9월 1일 [임진왜란 이순신 전쟁]

부산포해전2 절영도. 1592년 9월 1일 [임진왜란 이순신 전쟁] 9월 초1일, 닭이 울자 출발하여 아침 8시쯤 몰운대를 지나자, 갑자기 동풍이 일고 파도가 넘놀아 간신히 배를 지탱하였다. 화준구미花樽仇未에 이르러 왜의 큰 배 다섯 척을 만나고, 다대포 앞바다에 이르자 왜의 큰 배 여덟 척, 서평포 앞바다에 이르러서 왜의 큰 배 아홉 척을 만났다. 절영도에 이르니 왜의 큰 배 두 척이 모두 기슭에 줄지어 정박하고 있었다.이어 3도 수사가 거느린 여러 장수와 조방장 정걸 등이 힘을 합하여 남김없이 두들겨 부쉈다. 배에 가득 실린 왜의 물건과 무기도 끌어내지 못하게 하고 모두 불살라 버렸다. 왜적들이 우리 기세를 바라보고 산으로 도망가서 머리를 베지는 못하였다. (부산포해전 대승의 시작 시기) 절영도 안팎..

동아시아 역사 2017.10.06

북제 무성제 고담이 태자 고위에게 선위한 이유

북제 무성제武成帝 고담이 태자 고위高緯에게 선위한 이유 북제 무성제 고담은 4번째 황제로 동위魏 권신 고환의 9번째 아들입니다. 효명제孝昭帝 고연高演의 동복동생으로 어머니는 누娄씨입니다. 황건皇建 2년인 561년 즉위했고, 하청河清 4년(565) 태자 고위에게 선위하며 태상황제太上皇帝로 물러납니다. 고담은 황제였던 4년 동안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설마 아무 생각 없이 태자에게 선위했을까요? 사실 고담이 아무 생각 없이 선위했을 가능성은 없습니다. 효소제孝昭帝 고연高演(고담의 친형)이 즉위할 때 고담은 우승상으로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었습니다. 오래지 않아 고연이 중병에 걸리자, 무성제 고담은 형제인 고원해高元海, 고귀언高歸彥 등과 몰래 모의해 병사를 일으키려 합니다. 그래서 점쟁이를 찾아가지만, 점쟁이..

동아시아 역사 2017.10.05

양무제 조상의 무덤을 찾았다? (랑야방 무제의 모티브인 양무제)

양무제 조상의 무덤을 찾았다? (랑야방 무제의 모티브인 양무제) 2015년 7월, 상양시襄阳(후베이성 서북부 도시)를 탐사하던 중 동진에서 수당 시대의 전실묘砖室墓(벽돌방무덤, 벽돌 덧널무덤, 양무제 조상의 무덤?)가 발견되었습니다. 27개의 전실 중에서 15호 전실 무덤이 가장 컸는데, 이 무덤의 주인이 전실묘를 만들게 된 주연으로 추정됩니다. 15호 전실에선 유일하게 화상画像(초상화)이 그려진 벽돌이 쌓여있었는데, 아마도 묘 주인의 재력과 신분을 과시하는 용도였을 겁니다. 전문가들은 이 고분墓葬이 위진남북조 시대 양나라梁 황실 가족의 무덤일 가능성이 높다는 견해를 밝혔습니다. 왜 이렇게 말했을까요? 왜냐면 호북성湖北 상양襄阳시는 양무제梁武帝 집안을 일으킨 곳이기 때문입니다. 양나라의 황제 중 상당수는..

동아시아 역사 2017.10.04

세설신어, 위진남북조 송나라 유의경 명저, 서평 (명문당)

세설신어, 위진남북조 송나라 유의경 명저, 서평 (명문당) 세설신어세설신어는 남송 소흥 8년(1138), 동분이란 사람이 보관하던 세설신어 구본과 안수의 수정본을 육유가 상, 중, 하로 나눴다.안타깝게도, 그때의 세설신어는 중간에 일실 되었고, 이후 명나라 원경이 육유의 수정본을 다시 수집해 내놓았다. 명나라 왕세정은 하양준의 어림을 가하여 세설신어보로 간행했다.이것이 크게 유행되었는데 이 책은 원래의 세설신어를 많이 삭감하고, 또 순서를 바꾸었는데, 이것에 당송명인들의 사적을 더 가한 것이므로 세설신어의 본디 모습과는 완전히 다르다. 청나라가 되어 왕선겸이 원경본을 가지고 사현강사본을 간행했는데 이것이 오늘날 제일 많이 퍼져있는 세설신어이다.우리가 현재 볼 수 있는 세설신어가 바로 이것이다. 유의경, ..

동아시아 역사 2017.09.28

위진남북조 북위 말기, 반란 지도 (형세도, 세력 일람)

위진남북조 북위 말기, 반란 지도 (형세도) 위진남북조 시대 북방을 통일했던 북위 말기 지도입니다. 위 파일은 위진남북조 북위 말기를 그린 지도입니다. 1603 x 842 크기로 용량이 1.8MB입니다. 글자가 작으니 클릭해서 크게 보시고요. 위진남북조 시대에 이름을 남겼던 북위 반란 세력들 일람은 아래에 따로 정리하였습니다. 그리고 음音은 다를 수 있다는 점 유념해주세요. 지금 포스팅하느라 그림을 다시보니, 북위의 포여, 강현, 하동은 너무 왼쪽으로 갔네요. 반대로 장안은 왼쪽으로 덜 갔고요. 나머진 그런데로 괜찮은데 하필이면 위진남북조 시대 관중 일대에 오류가 있네요. 그리고 동그라미 크기가 다른데 큰 의미가 있는 건 아니고, 그리다 보니 크기가 안 맞을 뿐입니다. 원래는 다 같은 크기로 하려고 했는..

동아시아 역사 2017.09.20

중국 인민 지원군이 북한에서 저지른 성범죄, 1954~1956년

중국 인민 지원군이 북한에서 저지른 성범죄, 1954~1956년 중국 인민 지원군은 북한에 주둔하면서 그들의 노동력을 활용하여 북한의 전후 복구사업을 도왔다. 중국 인민 지원군의 주둔 목적은 노동력을 활용하여 북한을 지원하고 안보적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중국 인민 지원군이었다. 하지만 과연 북한도 이들의 주둔을 모두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는지에 대해서는 확인할 수 없다. 왜냐하면, 북한과 중국의 공개 자료들은 대부분 중국 인민 지원군의 성과만을 위주로 선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에서는 중국 인민 지원군이 들어올 때부터 이들이 들어오면 상황이 변화되리라 예측하였고, 실제로 이들이 북한에 주둔하고 있음으로써 중국은 북한의 내정에 간섭할 수 있었다. 양국의 갈등은 외부에 드러나지 않았지만, 내부적으로는 점차 갈..

동아시아 역사 2017.09.18

[위진남북조] 노포 전신론, 돈이 신이 된 시대

[위진남북조 서진] 노포 전신론, 돈이 신이 된 시대 돈이 신이 된 시대위진남북조 서진 시대, 돈의 활동 범위는 보통 사람들의 범위보다 훨씬 넓었다.노포도 이에 주목해 다시 돈의 활동범위를 설명하고 있다. "아무런 덕을 쌓지 않았는데도 높임을 받고 세력을 갖지 않았는데도 뜨겁게 맞아줍니다.금마문金馬門을 밀치고 자달紫闥로 들어가서 위태로워진 것을 안전하게 만들어주며, 죽을 것도 살게 하여줍니다.귀한 사람이지만 천하게 부릴 수 있고 산 것이지만 죽이게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돈의 위력이다. 그동안 사람들은 덕을 쌓는 것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알고 이를 쌓은 사람은 자연히 부귀할 수 있다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돈은 이러한 덕을 쌓은 일이 없는데도 궁궐을 무시로 드나들 수 있게 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

동아시아 역사 2017.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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