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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역사 472

당고의 금과 8군, 8고, 8급, 3군 (당고의 화 피해자들)

당고의 금과 8군, 8고, 8급, 3군 (당고의 화 피해자들) 당고의 금 또는 당고의 화수도 낙양을 비롯, 여남汝南, 영천嶺川, 진류陳留, 산양山陽 등의 여러 군, 즉 하남성, 산동성, 하북성, 남부 등 화북의 선진지대에서는 이상에서 기술한 바와 같은 정세가 진행되어, 현, 향 등의 기초적인 향촌 사회의 범위를 넘어 군 규모의 크기를 갖는 향론의 범주가 만들어졌다. 예를 들면 산양군에서는 환관 후람候覽의 죄상을 통렬하게 고발한 장검張儉 이하의 8명을 8준八俊이라 칭하고 유표劉表 등의 8명을 8고八顧라고 불러 군 자체에서 독자적인 명사의 서열을 만들고 있었다. (모두 당고의 금 피해자) 군 규모의 크기로 퍼져 나간 향론의 범주는 다시 다른 군과 연합하여 전국적인 규모의 범주로 통합된다. 반환관파(당고의 화..

동아시아 역사 2017.12.13

고구려와 기자조선, 공자. 그리고 벽화엔 중국 문명 (중국 역사 비밀)

고구려와 기자조선, 공자. 그리고 벽화엔 중국 문명 (중국 역사 비밀) 원본 링크 : 揭秘鲜为人知的历史 高句丽竟是华夏族建立的一个地方政权 [클릭]중국 블로거의 2016년 2월 1일 글을 발 번역했습니다. 오역과 의역이 다수 있으며 문맥이 매끄럽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이 글은 2부이며 1부는 아래 링크이니 아랫글을 먼저 읽어주세요. 중화민족 : 중국 역사와 문명 속의 고구려 [바로가기 - 링크] 또한, 수나라 문제隋文帝의 신하였던 배구裴矩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고구려 땅은 본디 고죽국孤竹国으로 주周나라 시대 기자가 책봉된 곳이다. 한나라 때는 삼군三郡으로 나뉘었지만 진씨晋(사마씨의 진나라) 때에 요동으로 통합되었다." "요동 땅은 주周나라 기자가 책봉된 봉국으로 한나라 현토군이다. 위진魏晋(조조 위나라..

동아시아 역사 2017.12.10

고구려는 중화민족이 세운 정권 (화하족 중국 역사의 비밀)

고구려는 중화민족이 세운 정권 (화하족 중국 역사의 비밀) 원본 링크 : 揭秘鲜为人知的历史 高句丽竟是华夏族建立的一个地方政权 [클릭] 중국 블로거의 2016년 2월 1일 글을 발 번역했습니다. 오역과 의역이 다수 있으며 문맥이 매끄럽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지도를 펴고 살펴보세요. 1. 베이징, 상하이, 시안엔 없습니다.2. 고구려 국경 지대에 맞닿아있는 건 누구인가요? 바로 한국 사람입니다. (중국 영토에 있었던 고구려가 지리적, 혈연적으로 한국과는 멀다는 것을 설명) 중국 역사의 진실은 이렇습니다. 고구려는高句(gōu)丽(lí) (기원전 37~기원후 668) (중국 역사서엔 고구려高句骊라 적혀있습니다. 약칭으로 고려句丽, 고려句骊라고도 하며, 요즘엔 고씨 고려高氏高丽라고 합니다)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

동아시아 역사 2017.12.10

조선 문화재, 명필과 묵죽도 (신위, 위창, 숙신옹주 등)

조선 문화재, 명필과 묵죽도 (신위, 위창, 숙신옹주 등) 여기서 소개하는 내용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문화재들입니다. 소식蘇軾 조주한문공묘비潮州韓文公廟碑 윤순尹淳(1680~1741), 1740년 백하 윤순이 당나라의 조주자사潮州刺史를 지낸 한유韓愈(768~824)의 묘비문을 쓴 것이다. 비무 내용은 송나라 명문장가 소식蘇軾(1037~1101)이 지었다. 미불 서풍을 근간으로 짜임과 운필의 변화를 조화롭게 운용한 윤순의 천연스러운 필치가 잘 드러난다. 윤순이 1740년(영조 16) 6월에 썼다고 했는데, 61세로 타계하기 1년 전이다. 윤순 행서의 전형을 살필 수 있어 서예사적 의미도 높다. 퇴촌이십영 시평退邨二十詠 時評 신위申緯(1769~1845), 1816년 이 서첩에는 '홍초소옥紅椒小屋'이란 당호..

동아시아 역사 2017.12.05

조선 명필, 조속, 서명균, 정조대왕, 박문수 등 (대전역사박물관)

조선 명필, 조속, 서명균, 정조대왕, 박문수 등 (대전역사박물관) 조선명필조선 시대에는 문신, 학자 중에 명필이 많았고 사자관寫字官 등의 직업서예가도 많았습니다.그중 조선왕조 초기, 중기, 후기, 말기의 서예를 이끈 명필로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1418~1453), 석봉韓濩 한호石峯(1543~1605), 백하白下 윤순尹淳(1680~1741),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를 들 수 있습니다. 이밖에 성수침成守琛, 김구金救, 이황李滉, 김인후金麟厚, 양사언楊士彦, 황기로黃耆老, 김현성金玄成, 조속趙涑, 허목許穆, 송준길宋浚吉, 이수장李壽長, 이광사李匡師, 강세황姜世晃, 조윤형曺允亨, 유한지兪漢芝, 신위申緯, 이삼만李三晩 등이 뛰어난 기량과 개성으로 서예사를 빛냈습니다. 이들의 필적을 통하여..

동아시아 역사 2017.11.25

수원 역사 인물, 근대 위인들 (수원역사박물관)

수원 역사 인물, 근대 위인들 (수원역사박물관) 김노적, 1895~1963, 교육 및 독립운동김몌례, 생몰년 미상, 교육자김사라, 1874~?, 종교인 (수원 최초의 전도부인)김세환, 1889~1945, 교육 및 독립운동김향화, 1897~?, 독립운동 (기생) 나중석, 1878~1970, 지역유지 박충애, 1897~1978, 교육자 변기재, 1903~?, 사회운동가 송세호, 1881~?, 대한제국기 무관, 교육자 염석주, 1895~1944, 농촌계몽운동 윤교충, 1903~?, 동착, 천도교인 이그레이스, 1883~?, 수원 최초의 여의사이하영, 1870~1952, 교육 및 종교인이현경, 1899~?, 사회운동가 임면수, 1874~1930, 교육 및 독립운동 홍가륵, 1913~?, 독립운동홍득순, 생몰년 ..

동아시아 역사 2017.11.21

[수원역사] 수원역과 수원시 변화모습 (정월 나혜석 유럽)

[수원역사] 수원역과 수원시 변화모습 (정월 나혜석 유럽) 다양한 삶의 교차점 수원역 수원역은 경부선이 개통된 1905년 이후 격동의 근현대사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조국 독립의 꿈을 꾸며 서울로 통학했던 학생들을 맞이하였고, 광복 이후 한국 전쟁의 포화 속에서 역사驛舍가 파괴되기도 하였습니다. 전쟁 후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산업화를 이끌던 우리 부모님들의 출퇴근길을 위로해주었으며, 민주화 항쟁이 뜨겁던 1980년대에는 시민들의 민주화 열망과 함성으로 가득하였습니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이 각각의 사연을 지닌 채 수원역을 거쳐 떠나고, 다시 돌아오고 있습니다.수원 사람들 삶의 교차점으로서 100여년 동안 변함없이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는 수원역의 역사歷史를 되돌아봅니다. 수원역에서 바라..

동아시아 역사 2017.11.20

60년대 수원 거리, 양장점, 중앙극장, 화춘옥 [수원역사박물관]

60년대 수원 거리, 양장점, 중앙극장, 화춘옥 [수원역사박물관] 예쁘다 양장점 1960년대 초반 영동시장 안에 세워진 양장점이다. 주인 박창원씨는 남문의 양재학원을 졸업하고 천덕상회 옆 단층건물을 세내어 장사를 시작하였다. 그 당시 옷은 집 또는 양장점에서 직접 지어 입었던 때로 영업이 번창하였다. 우리말 이름 '예쁘다'라는 상호가 재미있어 누구나 쉽게 기억하였다. 소화국민학교와 영복여고 교복을 디자인한 것으로 유명하며, 1980년대 없어졌다. 중앙극장 625전쟁 직후인 1953년 9월 10일 남문 옆에서 개관하였다. 일제시대 문을 연 수원극장과 더불어 수원을 대표한 극장이었다. 수원에서 가장 번화한 남문 옆에 있어 친구들과 연인들이 만나는 장소였다. 개봉관이었던 중앙극장은 2004년 문을 닫았다. 화..

동아시아 역사 2017.11.18

우리나라 한국 60년대 수원 풍경, 수원역사박물관

우리나라 한국 60년대 수원 풍경, 수원역사박물관 대통령 후보 강하고 담대한 사람 리승만착하고 진실한 사람 리기봉 환경 포스터쥐를 살려두면, 사람은 굶는다, 쥐를 잡아 없애자 삐라 포스터불온삐라를 보면 즉시 신고합시다! 60년대 공중전화 1. 중앙극장2. 예쁘다 양장점3. 공중목욕탕4. 화춘옥5. 천덕상회 헌법 개정안 게시 국민투표법 제23조의 규정에 의하여 1969년 8월 9일에 공고되고 1969년 9월 14일에 국회의 의설을 거친 헌법개정안을 다음과 같이 게시한다. 1969년 9월 18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우리나라 한국 60년대 수원 풍경, 수원역사박물관

동아시아 역사 2017.11.17

수원문화재, 그림과 글들, 수원화성박물관

수원문화재, 그림과 글들, 수원화성박물관 수원의 선비문화조선시대 수원은 정조와 수원화성으로 대표되지만, 그 이전부터 충과 효의 고장으로 널리 알려졌다. 서울과 평양 다음으로 무과武科 급제가가 많았던 수원은 상무尙武 전통과 함께 문무文武를 겸비한 유교 문화가 꽃피었다. 수원 땅에서 대를 이어 살아온 선비들은 유력한 명문 벌열閥閱 가문은 아니지만 수많은 동족 마을을 형성하면서 다양한 삶을 보여준다. 김시진 유언金始辰遺言, 1667년김시진(1618~1667)이 아들 양신에게 써 준 유언. 김시진은 한성좌윤, 형조, 예조, 호조의 판서와 수원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이 유언은 그가 죽은 50세의 3월과 4월 두 번에 걸쳐 작성된 것으로, 3월의 기록에는 하나뿐인 적자 양신이 공부를 게을리하여 가문의 유업遺業이 끊..

동아시아 역사 2017.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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