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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와 기자조선, 공자. 그리고 벽화엔 중국 문명 (중국 역사 비밀)

믿을만한 건강정보 2017. 12. 10.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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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와 기자조선, 공자. 그리고 벽화엔 중국 문명 (중국 역사 비밀)


원본 링크 : 揭秘鲜为人知的历史 高句丽竟是华夏族建立的一个地方政权 [클릭]

중국 블로거의 2016년 2월 1일 글을 발 번역했습니다. 오역과 의역이 다수 있으며 문맥이 매끄럽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이 글은 2부이며 1부는 아래 링크이니 아랫글을 먼저 읽어주세요.

중화민족 : 중국 역사와 문명 속의 고구려 [바로가기 - 링크]


또한, 수나라 문제隋文帝의 신하였던 배구裴矩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고구려 땅은 본디 고죽국孤竹国으로 주周나라 시대 기자가 책봉된 곳이다. 한나라 때는 삼군三郡으로 나뉘었지만 진씨晋(사마씨의 진나라) 때에 요동으로 통합되었다."

"요동 땅은 주周나라 기자가 책봉된 봉국으로 한나라 현토군이다. 위진魏晋(조조 위나라, 사마염 진나라) 시기, 봉국과 멀리 떨어져 있어 불가피하게 멸망했다."


바꾸어 말하자면, 삼국 시대 직전에 고구려의 기반 지역은 중국이었고, 주나라 대에 이미 중국인이 살던 기자의 봉지(기자조선)였습니다.


고구려 문명이랑 중국 문명 속에 있었습니다.


고죽국 고구려 중국 역사[고죽국 상상도] 기자조선, 공자, 중국 문명


당연히 양견으로선 아직 달성하지 못한 통일을 위해 고구려를 병합하려 했던 것이죠.


양견에겐 천하 통일의 임무가 주어진 셈입니다. 고구려족은 우리나라(중국) 동북지역과 조선반도 북부, 중부를 아우르는 영토를 보유했었습니다.


우리나라(중국) 선진先秦 시대에 만들어진 일주서逸周书 오회편五会篇엔 "북방 땅에 고이高夷가 있다"라고 적혀있으며, 후세엔 공영孔颖이 통달하여 말하길, "고이는 동북 오랑캐 고구려다"라고 했습니다.


공자 군자 고구려 기자조선[공자 동상] 기자조선, 중국 문명


이렇듯 중국 초기에도 고구려족을 이미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또, 공자孔子는 이런 말을 했었습니다.


"도가 실행되지 않으니 뗏목을 타고 바다로 가고 싶구나. 나를 따를 사람은 아마도 자로(공자의 제자)겠지?" 


또 이런 일화도 있습니다.

"선생님(공자)께서 구이九夷 땅에서 살고 싶어 하셨다. "


(그러자) 누군가 말했다.


“누추한데 어떻게 하시렵니까?”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군자가 거기에 산다면, 무슨 누추함이 있겠느냐?” (기자 조선으로 무식한 오랑캐가 교화되었다는 뜻)


구이는 고대 동방 연해 일대 오랑캐夷人들을 총칭하는 말로, 그곳 사람들을 동이东夷라고도 불렀습니다.


그곳에 사는 오랑캐들은 다양해서 구이九夷라고도 부른 것이죠. 고증에 따르면, 현토玄菟, 낙랑乐浪, 고려高丽, 만식满饰, 부여扶馀, 색가索家, 동도东屠, 왜인倭人, 무비无鄙 등이 존재했습니다. 이 중 3번째가 고구려입니다.


이들은 후에 중국 문명에 편입되었습니다.


하나라 구이 고이 고구려[하나라 영역] 기자조선, 공자, 중국 문명


당 고종唐高宗 시기, 설인귀薛仁贵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고구려인 대부분이 중원으로 이주했습니다.


일부는 신라, 백제로 이주했으니 지금의 조선한국(북한) 일대입니다. 후에 건국된 고려국高丽国과 고구려高句丽는 아무 관계 없습니다.


고구려 왕조의 유적지는 중국 길림吉林 집안시集安市에 분포해 있는데, 이곳엔 국내성国内城, 환도산성丸都山城, 왕릉王陵(14기), 귀족 묘지(26기)가 있습니다.

고구려 옛 무덤의 고분벽화는 세계 최고 수준의 예술 벽화라 부를 만 합니다. 벽화가 완성된 시기는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하기 이전이며, 이 시기는 기원전 37년에서 기원후 427년 사이입니다. 366년 만들어진 막고굴莫高窟 돈황 벽화敦煌壁画와 시기가 비슷합니다.


고구려인은 중원의 신물神物 삼족오三足乌를 숭배했는데, 초기부터 고구려 최고의 상징으로 사용되었음이 분명하고 이는 고분 벽화에도 여실히 드러납니다.


삼족오 고구려 벽화[고구려 벽화] 삼족오


고분에는 사냥, 전쟁 등이 나오는데 이는 국경 지대(중국의 국경 지대를 말하는 듯) 민족들이 갖고 있었던 상무尚武정신을 표현한 것입니다.


벽화에는 사신四神 숭배 모습도 나오는데 여와 그림女娲图, 신농 그림神农图, 도가道家의 우의선인羽衣仙人图 등 중화 문명(중국 문명과 역사)의 특징이 녹아있습니다.


이렇듯 고구려 문화는 중화 문명 체계에 속해있었음을 확증할 수 있습니다.


여와도 고구려 벽화 중국[고구려 벽화] 여와도


신농 그림 고구려 벽화 중국 역사[고구려 벽화] 신농 그림

벽화 속 고구려인의 의복은 한나라 의복과 비슷하기에 이 또한 고구려 문화가 중화 문화(중국 문명과 역사)의 일부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계속 연구하면 중국인들도 고대 동북 지역도 중국의 영토였음을 알게 될 겁니다.


의복 중국 고구려 당나라 문명[고구려 벽화] 고구려 여인들 의복을 서한 시대와 비교.


한국인들은 고구려가 한국의 역사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인들은 우리 동북 지역(우리란 중국) 일부를 욕심내고 있습니다. 이들을 막기 위해선 앞으로도 이런 연구가 계속되어야 할 것입니다.


외국인(중국을 제외한 외국, 이 글에선 한국을 뜻함)들은 우리 오천 년 역사를 강탈하려 한다!

우리 민족은 너희들에게 절대 패배하지 않을 것이며 앞으로도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하하하하하하!


여기까지가 중국인이 쓴 글의 번역입니다.


이 사람의 글 말고 다른 사람의 글도 읽어봤습니다. 중국어 실력이 미천하여 제대로 읽진 못했으나 일반적으로 고구려가 중국 문명에 속해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논리는 이렇습니다.


1. 기자로 시작된 고구려 역사

2. 기자로 시작된 부여 역사

3. 고구려 벽화에 나타난 중국 문명과의 유사성

4. 고구려 사람들은 중원으로 이주

5. 고구려 유물은 중국에 분포


하지만 절대 언급하지 않는 것들도 있죠.


1. 고려, 조선은 해동 삼국이라 하여 고구려, 백제, 신라를 조상의 나라로 인식.

2. 한, 수, 당, 송, 명, 청으로 이어지는 중국 통일 왕조의 고구려 인식.


중국 문명에 고구려가 속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고대 역사가들의 게으름을 지적합니다. 왜 우리 역사인데 제대로 적지 않았느냐고 말이죠. 그 게으름이 5천 년이나 이어졌다는 아리송한 주장입니다.


흠, 2000년대 초반 주장이 전혀 바뀌지 않은 채 네티즌들 사이에서 확대, 재생산되는 걸 보면 동북공정이 왜 무너졌는가 이해가 되네요. 논리가 너무 빈약해요.


고구려와 기자조선, 공자. 그리고 벽화엔 중국 문명 (중국 역사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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