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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족의 갈족은 어떤 민족이었을까

흉노족의 갈족은 어떤 민족이었을까 흉노족匈奴은 어떠한 민족이었을까? 민족 구성이 고비사막 이북지역에서의 정복전쟁 과정에서 생겨난 다수의 피정복민족을 포함하여 극히 잡다했다는 점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다. 흉노의 언어는 고대 알타이어의 일종으로, 현재 러시아의 볼가 강을 따라서 사마라와 카잔 사이에 사는 추바슈인들의 언어에 가까웠던 듯하다. 그러나 흉노의 지배 부족 가운데에는 인도, 유럽계로 보이는 인종으로 이루어진 부족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치다 긴푸가 지적하듯이, 흉노 왕후王侯의 분묘로 추측되는 노인 우라 고분에서 출토된 자수刺繡 인물이 그 특징을 갖추고 있다. 또 한무제 때에 흉노를 토벌한 명장 곽거병의 묘 앞에 있는 석조에는 말발굽 아래에 쓰러진 흉노인 앙와상仰臥像이 있는데, 용모가 북유럽계..

동아시아 역사 2016.10.13

당나라 5왕 정변, 무측천은 황제에서 물러나라!

당나라 5왕 정변, 무측천은 황제에서 물러나라! 무측천은 주나라로 당나라를 대체하자마자 무씨 자제들을 재상과 장군으로 기용했고 공이 있는 신하에게도 무씨 성을 하사했다. 또한, 무씨 성을 가진 사람들의 세금을 면제해 주고, 무씨 선조를 추봉하고 시호를 짓고 사당을 세웠다. (당나라를 부정하는 의미) 무측천은 자신이 죽은 뒤 황위를 무씨 자손에게 넘기려는 조처였다. 일부 기회주의자들은 연명으로 무승사를 황태자로 봉하라고 상소했다. 장수 2년(693년) 설날에 거행된 제사에서 무측천이 초헌을 올리고 무승사와 무삼사에게 아헌과 종헌을 올리게 했다. (아헌과 종헌 모두 조상에게 올리는 술을 따르는 것으로 황제의 후계자가 담당하는 것이 일반적) 진정한 당나라 황태자 이단李旦은 한쪽 옆에 초라하게 서 있기만 했다...

동아시아 역사 2016.10.12

중국 삼국시대, 손권이 손책 후계자가 된 이유

중국 삼국시대, 손권이 손책 후계자가 된 이유 중국 삼국시대, 손책은 죽기 직전 후계자로 손권을 선택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손권이었을까요? 답은 손책의 유언 속에 있습니다. 중국 삼국시대 삼국지 손책전에서는 손책이 임종하기 전에 먼저 장소 등의 사람들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고 전합니다. "중원이 크게 어지럽소. 우리는 오吳, 월越의 백성들과 삼강三江의 견고함을 기반으로, 충분히 성패를 바라보며 기회를 엿볼 수 있을 것이오. 그대들이 내 동생을 잘 도와주시오." 그런 다음 다시 손권을 불러 인수印綏(관리들이 차는 관인과 그 끈을 말함)를 그의 허리에 차게 하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강동의 백성들을 이끌고 양쪽 진영의 사이에서 기회를 잘 택하여 천하와 기량을 겨루는 일은 네가 나만 못할 것이다. 그러나 현명..

동아시아 역사 2016.10.12

조조 삼국지 관도대전 上, 유비가 원소를 떠나다

삼국지 관도대전은 조조가 원소를 격파한 경영 전략 사례에 해당합니다. 수세에 몰렸던 조조가 어떻게 관도에서 원소를 이겼는지 이중텐의 삼국지 강의를 인용합니다.해당 내용은 상중하로 나눠 포스팅하며, 삼국지 조조 관도대전을 통한 경영 전략 사례를 간접적으로 접해봅니다. 조조 삼국지 관도대전 上, 유비가 원소를 떠나다 기회란 오기 마련입니다. 바로 원소와의 전쟁 때, 조조가 이를 악물고 끝까지 버티기로 결심을 했을 때, 세 가지의 일이 삼국지 관도대전을 셋째 단계인 전환 단계로 들어가게 합니다. 이중톈 선생이 설명하는 전환 4단계 1. 관도대전의 발발 : 교전 단계2. 관도대전의 전개 : 대치 단계3. 관도대전의 절정 : 전환 단계4. 관도대전의 결말 : 승리 확정의 단계 첫 번째 일은 유비가 몰래 도망간 일..

동아시아 역사 2016.10.08

중국 송나라, 열하일기에 적힌 고려와 에피소드

중국 송나라, 열하일기에 적힌 고려와 에피소드 열하일기(熱河日記序) 중 동란섭필편(銅蘭涉筆) 1. 우리와 함께 즐기세~ 우리나라가 동파(東坡, 소식(자는 동파))에게는 가장 잘못 보였던 모양이다. 그(소식)가 항주杭州 통판通判으로 있을 때, 고려의 조공 사신이 주군州郡의 관리를 능멸凌蔑하고, 당시 사신을 인도하는 관리들이 모두 관고(管庫 창고의 관리(管理))로서 세도를 믿고 제 맘대로 날뛰어 예절을 지키지 않았다 하여, 사람을 시켜 이르기를, "먼 지방 사람들이 중국을 사모하여 오니 반드시 공손하여야 할 터인데, 지금 보니 이렇게도 방자하니 이는 너희들(송나라 관리)이 잘못 지도한 것이라, 만일 이것을 고치지 않으면 마땅히 황제께 아뢰리라." 하니, 인도하던 관리들이 두려워서 수그러졌다. ※ 소동파에 대..

동아시아 역사 2016.10.08

창천항로, 삼국지 적벽대전 [만화가가 그린 환상의 적벽]

창천항로, 삼국지 적벽대전 [만화가가 그린 환상의 적벽] 소설 삼국지연의의 영향력은 대단하다. 한 인터뷰를 위해 보내져 온 한국 독자의 창천항로 평을 읽고 조금 놀랐다. 연의라고 하는 허구의 이야기가 어디까지나 역사적 사실인 것처럼 인식되고 있다. 들어보면 일본도 같은 경향이라고 한다.그러고 보면, 연의라고 하는 세례를 받지 않은 나에게도 이 연의의 환상은 여러 번 나타나 성가신 걸림돌이 되고 있다. 아마도 삼국지에 대해 쓰인 대부분 글이 이 환상에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환상의 정도가 가장 현저하게 나타난 일막이 적벽대전이다. 유비와 손권 측의 관계자로부터 천하의 대전이라 이야기되는 이 전투. 정사의 본문에서는 거의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선주(유비)전에서는, 단지 55단어, 연의..

동아시아 역사 2016.10.04

광개토왕 관미성 전투, 병관좌평 진가모는?

광개토왕 관미성 전투, 병관좌평 진가모는? 어제 사극 광개토왕 57편을 봤습니다. 수전에서 아신왕에게 패하는 고구려군의 모습과 갈등이 최고조에 다다른 관미성 내부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관미성에선 아신왕과 대요승의 갈등이 백제군의 패배를 암시하고요. 광개토왕 재위 첫해인, 392년,7월 - 병력 4만으로 백제 전방의 성 10개를 함락,9월 - 거란을 공격해 후방을 안정시킴,10월 - 곧, 관미성을 공격해 20일 만에 점령. 사실, 병관좌평 진가모가 관미성에서 광개토왕과 맞섰다는 기록이 없으므로 병관좌평 진가모를 관미성과 별개의 인물로 처리해도 무리는 없을 겁니다. 그렇지만, 고국양왕 때, 도곤성(도압성)을 함락한 공로로 병관좌평(국방부 장관)에 오를 인물이라면, 직간접적으로 병관좌평 진가모를 관미성과 연관..

동아시아 역사 2016.10.03

아신왕 광개토태왕에 항복. 삼국사기에 누락된 아신왕 항복

아신왕 광개토태왕에 항복. 삼국사기에 누락된 아신왕 항복 다음카페 한사모에 올라왔던 댓글을 정리했습니다. 댓글치곤 예리한 부분이 많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습니다. 주제아신왕 광개토태왕에 항복하며 무릎 꿇고 '이후로 영원히 노예가 되겠다'고 하였고, 왕의 아우와 대신 10명이 고구려에 끌려갔고, 이는 사실상 백제왕조의 멸망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왜 이런 엄청난 일이 삼국사기, 백제 본기와 고구려 본기에 누락이 되어 있는 것일까요?(더욱 이상한 것은 다음 해 왜에 전지 태자를 볼모로 보내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하 댓글 댓글1."아리수를 건너 성을 찌르고 죄어 보내었다. □□소굴로 돌아가니 □편을 둘러쌌다. 백잔주가 죄임에 괴로워하여 남녀 1천 명과 세포 천 필을 나와 바치며 왕 앞에 꿇어앉아 ..

동아시아 역사 2016.10.01

명성황후 시해 사건 : 미우라 고로 민비 시해 사건 과정 [매천야록]

명성황후 시해 사건 : 미우라 고로 민비 시해 사건 과정 [매천야록] 조선 말기 황현이 지은 매천야록에 명성황후 시해 사건 경위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본인 미우라 고로가 민비 시해 사건을 저질렀는데 이 과정이 상세히 적혀있죠. 아래 글은 서해문고 매천야록을 인용했습니다. 매천야록에 기록된 명성황후 시해 사건 과정, 미우라 고로가 민비 시해 사건을 저지르는 과정 살펴보시죠. 1. 명성황후 시해 사건 원인 - 명성황후 권력욕1895년 8월 2일[무자]에 왜국 공사 미우라 고로(삼포오루三浦梧楼)가 대궐에 침입했다. 왕후 민씨가 시해되고, 궁내부대신 이경직과 대대장 홍계훈이 적에게 대항하다가 죽었다. 왕후는 오랫동안 정사에 참여하지 못하다가 (왜국 공사)정상형에게 많은 뇌물을 주어 임금에게 정권을 돌려주도록 ..

동아시아 역사 2016.09.30

전쟁포로였던 조선인 일본군, 그리고 그의 아내

전쟁포로였던 조선인 일본군, 그리고 그의 아내 일제가 패망한 1947년.당시 소련은 크라스노야르스크 지구를 포함한 각지 수용소의 일본군 전쟁포로 중 조선인(강제 징집된 젊은 청춘)들을 분리해 수용합니다. 전쟁이 끝났기에 전쟁포로 조선인들을 먼저 송환하려는 의도였고, 이에 따라 조선인 전쟁포로들은 여러 항구와 열차 인근의 집결지로 이동합니다. (현대 크라스노야르스크 전경) 꾸준히, 그리고 산발적으로 북을 거쳐 남으로 송환되어오던 조선인 청년(전쟁포로였던 조선인 일본군)들은 조국으로 돌아갈 생각에 기쁜 마음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당시 조선에선 이런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으나, 하나둘 돌아오는 사람들을 통해 실제 송환이 이뤄지고 있다는 것을 조금씩 알게 됩니다. 그러나, 이름은 알 수 없는 김군의 일화처럼 슬..

동아시아 역사 2016.09.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