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역사

흉노족의 갈족은 어떤 민족이었을까

믿을만한 건강정보 2016. 10. 13. 01:00
반응형

흉노족의 갈족은 어떤 민족이었을까


흉노족匈奴은 어떠한 민족이었을까? 민족 구성이 고비사막 이북지역에서의 정복전쟁 과정에서 생겨난 다수의 피정복민족을 포함하여 극히 잡다했다는 점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다.


흉노의 언어는 고대 알타이어의 일종으로, 현재 러시아의 볼가 강을 따라서 사마라와 카잔 사이에 사는 추바슈인들의 언어에 가까웠던 듯하다. 그러나 흉노의 지배 부족 가운데에는 인도, 유럽계로 보이는 인종으로 이루어진 부족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치다 긴푸가 지적하듯이, 흉노 왕후王侯의 분묘로 추측되는 노인 우라 고분에서 출토된 자수刺繡 인물이 그 특징을 갖추고 있다.


흉노족 모습, bc7년흉노족 모습, bc7년


또 한무제 때에 흉노를 토벌한 명장 곽거병의 묘 앞에 있는 석조에는 말발굽 아래에 쓰러진 흉노인 앙와상仰臥像이 있는데, 용모가 북유럽계 인종의 특징을 갖추고 있다.


흉노의 지배 부족인 도각종은 인도, 유럽계였을 가능성이 꽤 짙다. 왜냐하면, 선우의 후예로 중원에 전조前趙 왕조를 세운 유연이나 그 일족인 유요가 모두 190cm를 웃도는 당당한 장신이었다고 중국의 사서는 특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같은 인도, 유럽적인, 특히 북유럽적인 특징을 보다 명확하게 문헌상에서 추적할 수 있는 것은 다음의 갈족이다.


갈曷족은 후조後趙 왕국을 세운 석륵이 속하는 종족으로, 문헌에서는 흉노의 별부이고, 강거종羌渠種이라고 불리는 부족이었다고 한다.


진회제 311년 흉노적 낙양 함락진회제 311년 흉노적 낙양 함락


갈이라는 명칭은 그들이 흉노의 남하와 함께 산서성 동남부, 당시에는 상당군上堂郡 무향현武鄕縣의 갈실葛室이라는 곳에 살았기 때문에 갈실이라는 지명의 발음에서 유래한 듯하다.


하지만 갈의 한자 뜻은 거세된 양이라는 뜻으로, 중국인이 이민족을 부를 때 짐승과 연관 지어 멸시하는 명칭을 즐겨 사용하였기 때문에 그러한 호칭이 정착하였을 것이다.


흉노족 갈족 산서성 동남흉노족 갈족 산서성 동남


이 갈족의 석시가 세운 후조에 대하여 기술한 진서晉書의 재기載記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남아 있다.


갈인이었던 손진이라고 하는 사람이 최약이라고 하는 한인 관료에게 물었다.


"나는 눈병을 앓고 있는데 뭐 좋은 치료법이 없을까."


원래 손진을 경멸하고 있던 최약이 조롱했다.


"눈 안에 소변을 넣으면 낫지."

"소변 따위를 넣을 수 있는가."

"당신 눈은 크니까 충분히 소변을 넣을 수 있을 걸세."


조롱을 당한 손진은 참을 수가 없어 석호의 태자인 석선에게 이 일을 고했다.


석선은 석호의 아들 가운데 그 용모가 가장 호족풍을 띤 인물로 눈이 깊게 패 있었다. 석선은 손진의 이야기를 듣고 격노하여 최약 부자를 주살했다.


흉노족 갈족 모습, 기마병 평상복흉노족 갈족 모습, 기마병 평상복


이 이야기는 갈족의 특색 가운데 하나가 윤곽이 뚜렷한 용모였음을 보여준다. 후조는 350년에 한인인 염민이라는 자에게 멸망했는데, 그때 염민은 군대를 이끌고 수많은 갈족을 학살하였다.


그 수는 20만 이상에 달했다고 하는데, 그 가운데 코가 높고, 수염이 많아 갈족으로 오해받고 살해된 자가 반수에 가까웠다고 사서는 전하고 있다.


이처럼 중국의 사서가 갈족의 특색을 '높은 코', '깊은 눈', '많은 수염'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는 것은 갈족이 소위 몽고인종이 아니라 인도, 유럽계였음을 나타내는 유력한 증거가 된다.


갈족 외에도 당시의 화북에는 노수호盧水胡, 산호山胡, 계호契胡, 등, '호'라고 불리는 종족이 가끔 사서에 보인다. 이 또한 원래는 흉노의 일부로서 화북에 남하해 온 인도, 유럽계 민족이었을 가능성이 상당히 크다.


중국의 역사 위진남북조, 가와카쓰 요시오, 혜안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