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역사

[오두미도] 중국 한나라 후한 때, 종교 왕국

믿을만한 건강정보 2016. 10. 14. 01:30
반응형

[오두미도] 중국 한나라 후한 때, 종교 왕국


중국 한나라 오두미도 도자기중국 한나라 태평도, 삼국지 장로


오두미도의 종교왕국

중국 후한 말기, 태평도와 매우 유사한 종교 교단이 사천성에서 섬서성 남부의 한중 분지에 걸쳐 형성되었다. 이 중국 후한의 종교집단은 215년 조조에게 항복할 때까지 중국 한나라 시대 30년 가까이 한중을 중심으로 하여 독립적인 종교 왕국을 이루고 있었다.


오두미도五斗米道라고 불린 이 중국 후한의 종교는 조조의 지배하에 들어간 후에도 종교활동을 계속하여 태평도와도 섞이면서 화북으로 퍼져나가, 교단 종교로서 소위 도교道敎가 되었다. 따라서 자료가 거의 남아있지 않은 황건 무리의 의도를 살펴볼 때 오두미도의 가르침과 교단조직이 크게 참고가 된다.


오두미도의 창시자는 원래 중국 한나라 강소성 풍현豊縣의 패국沛國 출신으로 사천성 곡명산鵠鳴山에서 수도하던 장릉張陵이라는 자인데, 신자에게 5두(약 1리터)씩의 쌀을 내게 했다고 해서 오두미도라고 불렸다고 한다.

장릉의 아들은 장형張衡, 손자는 장로張魯라고 하는데 이 세 사람을 3장三이라고 한다. 이 가운데 손자 장로가 192~193년 무렵 사천성에서 중국 한나라 한중으로 들어와 여기에 독자적인 종교 정권을 만들었다.


장로는 교단조직에서 자신을 사군師君이라고 칭했는데 후에는 천사天師라고도 불린다.

그 밑의 대사교구는 치治라고 하고 그 지도자는 치두治頭라고 하였다.


대사교구 밑에 있는 각각의 교구교회에는 제주祭酒가 있었는데, 대제주大祭酒라고 하는 상급 제주도 있었으므로 대제주는 대사교구를 통할하는 치두와 중첩되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오두미도 조직, 중국 후한 한나라오두미도 조직, 중국 후한 한나라


제주란 원래 제사를 지낼 때 최초로 신주神主를 따르는 장로를 가리킨 듯한데, 한대에도 일반적으로 같은 종류의 벼슬아치 가운데에서 가장 장로에 해당하는 자를 제주라 불렀고, 현명한 연장자나 도덕적으로 공정한 관직 등의 의미가 있는 말로서 중국 후한 향촌공동체 이념과 관계 깊은 명칭이었다.


중국 한나라 오두미도에서 제주는 기독교 교구교회의 사제에 해당하는데, 교회와 교구민의 관리책임자이고, 제사, 기도의 주재자임과 동시에 정치와 종교가 밀착한 오두미도에서는 관구의 통치자이기도 했다.


제주 밑에는 귀리鬼吏, 간령姦令 등의 관직이 있어서 제주를 도왔다. 귀리란 신을 섬기는 관리, 간령은 간악 즉 죄과를 범한 자를 단속하는 자리라는 의미인데 일반 신도로 들어온 자는 귀졸鬼卒이라고 불렸다.


이와 같은 교단 구성의 등급체계는 제주라는 말의 의미가 상징하듯이 수도의 단계에 따라서 수양하여 얻은 덕은 고하에 따라는 것이라는 관념이 있었다.


중국 한나라 태평도, 삼국지 장로


공동체적 이상향의 이미지

중국 한나라 오두미도의 가르침은 태평도와 마찬가지로, 개개인의 행위를 항상 자세히 살펴보고 있는 신들 앞에서 병의 원인인 죄를 참회, 고백하고 회개를 실천하는 데 있었다.

단지 회개, 고백만을 하기 위한 정실靜室이라는 건물이 있었고, 천지수天地水 3신에게 죄를 회개하고 앞으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맹세를 담은 삼관수서三官手書라고 하는 세 통의 서약문을 작성하여 한 통은 산꼭대기에 두고, 한 통은 땅속에 묻고, 다른 한 통은 물속에 가라앉게 하여 3신에 맹세하는 의식이 있었다.


나아가 회개를 위한 집단적인 의식도 있었던 것 같다. 즉 제주는 신도들을 한데 모아 노자오천문老子五千文을 읽히고, 다리와 도로의 수리 등 공익을 위해 일하면 죄가 없어진다고 하여 사람들은 앞다투어 근로봉사를 하고 의사義舍라고 하는 무료 숙박시설에 쌀이나 고기를 기부하기도 하였다.


오두미도 조직, 중국 후한 한나라


여행자나 유랑민 등은 이 의사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었는데, 필요 이상으로 살고 고기를 먹으면 신의 벌을 받아 병에 걸린다고 하였다.


이상으로 기술한 오두미도의 조직과 가르침은 인간의 선악을 살피고 있는 신들 아래에서 끊임없이 자기를 반성하고 억제하며, 서로 도움을 주면서 중국 한나라에 공동체 생활을 만들어 내고자 하는 의도로 일관되어 있다. 그것은 종교적, 도덕적 공동체임과 동시에 정치적, 사회적 이상 국가의 건설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


중국 한나라 오두미도 천지수


그리고 장로가 다스리는 중국 후한의 오두미도 왕국에서는 왕국이 30년 가까이 계속되는 동안 그러한 이상 국가의 모습이 일정하게 실현되고 있었던 것 같다. 중국 한나라 중원의 혼란을 피해 이곳으로 흘러들어와 머무르는 자는 모두 오두미도를 신봉했고 그곳에서는 민도 오랑캐도 함께 즐긴다고 할 만큼 인심이 안정된 이상적인 상태가 이루어지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다만, 한 가지 주의할 것은 한중漢中에서 사천성에 걸친 일대에는 저족이나 만족 등의 원주민이 살고 있었고, 오두미도에는 이들 원주민도 다수 가담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프랑스 학자 R. A. 스턴은 원주민 사이에 남아 있던 공동체 생활과 오두미도가 목표로 한 공동체 사회 건설이라는 양자 사이에는 어떤 상관 관계가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출처 : 중국의 역사 위진남북조, 가와카쓰 요시오, 혜안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