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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5왕 정변, 무측천은 황제에서 물러나라!

믿을만한 건강정보 2016. 10. 12.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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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5왕 정변, 무측천은 황제에서 물러나라!


당나라 무측천 노년당나라 무측천 노년


무측천은 주나라로 당나라를 대체하자마자 무씨 자제들을 재상과 장군으로 기용했고 공이 있는 신하에게도 무씨 성을 하사했다. 또한, 무씨 성을 가진 사람들의 세금을 면제해 주고, 무씨 선조를 추봉하고 시호를 짓고 사당을 세웠다. (당나라를 부정하는 의미)


무측천은 자신이 죽은 뒤 황위를 무씨 자손에게 넘기려는 조처였다. 일부 기회주의자들은 연명으로 무승사를 황태자로 봉하라고 상소했다.


장수 2년(693년) 설날에 거행된 제사에서 무측천이 초헌을 올리고 무승사와 무삼사에게 아헌과 종헌을 올리게 했다. (아헌과 종헌 모두 조상에게 올리는 술을 따르는 것으로 황제의 후계자가 담당하는 것이 일반적) 진정한 당나라 황태자 이단李旦은 한쪽 옆에 초라하게 서 있기만 했다.


이러한 모든 일은 당연히 이당왕조에 충성하는 원로중신들의 반감과 불만을 불러일으켰다.

적인걸과 이소덕 등 견식이 있는 예전 당나라 재상들은 교묘하게,


"조카와 아들 중에 누가 더 가깝습니까?


폐하께서 만약 아들에게 황위를 넘겨주시면 자손들이 올리는 제사를 받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조카에게 넘겨주신다면 여태까지 조카가 황제가 되어 고모를 위해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낸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라고 무측천에게 충고했다.


당나라 경휘, 평양군왕당나라 경휘, 평양군왕


하루는 74세의 무측천이 적인걸에게,


"어저께 꿈에 나는 큰 앵무새 한 마리의 두 날개가 끊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자네가 보건대 이건 무슨 징조인가?"


라고 물었다.


적인걸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앵무새는 무武이므로 폐하를 가리킵니다. 두 날개는 폐하의 두 아들을 말합니다.

폐하께서 만약 두 아들을 기용한다면 두 날개는 다시 회복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라고 대답했다.


이때 재상 길욱吉頊도 무측천의 총애를 받는 장역지와 장창종 형제에게


"당신들이 권력을 쥐고 제멋대로 하여 군신들의 미움을 사고 있다. 자신을 보전하려면 유일한 선택은 태자를 정하는 일에 참여하는 것이다. 침상에서 황제에게 노릉왕(즉, 당나라 황태자 이현)을 황태자로 복위하라고 권해야만 화를 면할 수 있다."


라고 귀띔했다.


두 사람은 놀라기도 하고 두려워서 길욱의 말대로 여러 번 침상에서 이현을 태자로 복위하라고 무측천을 부추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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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측천은 많은 고민 끝에 결단을 내리고 사람을 보내 노릉왕 이현을 비밀리에 낙양으로 데려왔다.


당시의 황태자 이단(이현의 동생, 즉 예종)은 상황을 판단해 퇴위를 요청했고 이현이 태자에 책봉되었다. 무승사는 눈앞에서 태자의 자리가 다른 사람한테 넘어가자 우울해 하다가 죽었다.

무측천은 자신이 죽은 뒤 무씨와 태자 사이에서 일어날 정권 쟁탈전을 방지하기 위해 태자 이현과 상왕相王 이단 그리고 태평공주와 무씨 자제들을 모아 놓고 명당에서 맹세하게 하고 철권鐵券에 새겨 사관史館에 보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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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에게 화목을 맹세하게 하여 조정의 긴장된 분위기를 완화했다. 이 때문에 무측천은 만년을 비교적 안정되게 보냈고, 죽은 뒤에도 영예를 얻을 수 있었다.


장안 4년(704년), 무측천은 병으로 침대에 누워 있으면서 몇 달 동안 재상을 만나지 않았다. 옆에는 오직 장역지와 장창종 형제만이 시중을 들었다. 조정 대신들은 황태자 문제에 변화가 생길까 전전긍긍했다.


이듬해 정월, 즉 신용神龍 원년(705년) 정월,


재상 장간지張柬之,

재상 최현위崔玄暐,

좌우림장군左羽林將軍 환언범桓彦范,

우우림장군右羽林將軍 경휘敬暉,

우대중승右臺中丞 원서기袁恕己 등은 비밀리에 모의하고 정변을 일으켰다.


우우림대장군 이다조李多祚가 군사를 거느리고 현무문을 공략하고 무측천이 누워있는 영선궁迎仙宮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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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역지 형제는 반항도 못 하고 피살되었고 장씨 집단에 속하는 기타 중요한 사람들도 살해되었다. 병석에 누워있던 무측천은 어좌에서 내려와 당나라 태자 이현에게 양위했다.


정변 다음날에는 무측천의 명의로 조서를 내려 황태자 이현이 국사를 관장한다고 반포했다.


네 번째 날에는 황태자 이현이 정식으로 즉위했는데 계속 중종이라 하여 이당왕조는 재건되었다. 주나라를 폐하고 당나라를 재건하는 데 공이 있는 장간지 등 5인이 왕에 봉해졌는데 역사에는 이날을 5왕정변이라 한다. (장간지, 최현위, 환언범, 경휘, 원서기)


5왕정변 발생 1년이 채 안 되는 신용 원년(705년) 11월 2일, 82세의 무측천은 상양궁上陽宮의 선거전仙居殿에서 처량하게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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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 전에 제호帝號를 취소하고 측천대성황후則天大聖皇后라 부를 것, 건릉(고종의 능묘)에 합장할 것, 왕황후와 소숙비 두 가문 및 저수량, 한애韓璦, 유석柳奭의 가족들을 사면할 것 등을 유언으로 남겼다.


무측천은 하야하기 전에 이미 혹리에 의해 무고 되었던 많은 사람을 사면했다. 이 유언은 반세기 동안 최고 권력을 행사한 위세 당당한 여황제가 최후에는 정통 봉건의 길을 선택했음을 말해준다. 그리하여 그녀는 전무후무한 봉건사회의 유일한 여황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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