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화성 4

수원문화재, 그림과 글들, 수원화성박물관

수원문화재, 그림과 글들, 수원화성박물관 수원의 선비문화조선시대 수원은 정조와 수원화성으로 대표되지만, 그 이전부터 충과 효의 고장으로 널리 알려졌다. 서울과 평양 다음으로 무과武科 급제가가 많았던 수원은 상무尙武 전통과 함께 문무文武를 겸비한 유교 문화가 꽃피었다. 수원 땅에서 대를 이어 살아온 선비들은 유력한 명문 벌열閥閱 가문은 아니지만 수많은 동족 마을을 형성하면서 다양한 삶을 보여준다. 김시진 유언金始辰遺言, 1667년김시진(1618~1667)이 아들 양신에게 써 준 유언. 김시진은 한성좌윤, 형조, 예조, 호조의 판서와 수원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이 유언은 그가 죽은 50세의 3월과 4월 두 번에 걸쳐 작성된 것으로, 3월의 기록에는 하나뿐인 적자 양신이 공부를 게을리하여 가문의 유업遺業이 끊..

동아시아 역사 2017.11.16

수원 유수부와 수원행차 (조선 정조의 계획 도시, 수원화성박물관)

수원 유수부와 수원행차 (조선 정조의 계획 도시, 수원화성박물관) 대도시로 성장한 수원 유수부 "이곳은 본디 허허벌판으로 인가가 겨우 5~6호였는데, 지금은 1천여 호나 되는 인가가 즐비하게 찼구나. 몇 년이 안되어 하나의 큰 도회지가 되었다."(- 정조실록 권39, 1794년 1월 15일) 수원(당시 수원 유수부)은 정조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농업은 물론 상업이 발달함으로써 일거리를 찾아 유입되는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팽창하여 서울에 버금가는 도시로 성장하였다. 더불어 전국에서 가장 중요한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유수부로 승격 - 활성화되기 시작하는 수원 유수부수원은 1793년 명칭이 화성으로 바뀌면서 유수부로 승격되고, 성을 쌓으면서 점점 발전하였다. 이는 화성을 활성화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동..

동아시아 역사 2017.10.29

수원 화성성역의궤와 수원 출신 김후 (수원화성박물관)

수원 화성성역의궤와 수원 출신 김후 (수원화성박물관) 김후 초상김후金㷞(1751~1805)의 본관은 해풍海豊이고 자는 광중光仲이며 증호조참판贈戶曹參判 김상걸金相傑(1727~1798)의 아들이다. 1771년(영조 47) 정시 무과에 급제 후 출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1790년(정조 14) 수원중군에 제수되었고, 1791년 당시 수원부 읍치邑治의 외곽을 호위하던 독성산성禿城山城의 중군을 역임하였다. 1793년에는 경기중군이 되어 경기지역의 모든 군사업무를 실질적으로 통솔하게 되는데, 수원 화성 축성(화성성역의궤를 만든 이유)이 시작되기 딱 1년 전이었다. 정조가 의도적으로 수원 토박이 무반 가문 출신의 김후를 중용하였다. 1794년 2월 화성성역 별감동別監蕫이 되어 화홍문, 방화수류정 등 시설물의 현장감독..

동아시아 역사 2017.10.23

조선 정조대왕 13차 수원 행차와 군복 (수원화성박물관)

조선 정조대왕 13차 수원 행차와 군복 (수원화성박물관) 이 포스트는 수원화성박물관에서 개최한 조선 정조대왕 수원 행차 행사에서 찍은 사진과 글을 소개합니다. 조선 후기 성군인라 칭송되는 조선 정조대왕은 탕평 군주이자 문예 군주로 규장각 설치, 장용영 창설, 수원화성 축성 등의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 특히 수원과는 특별한 인연을 맺어 재위 기간 동안 무려 13차례나 수원 행차를 거행하였습니다. 1789년 수원으로 옮겨 조성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에 매년 참배하기 위한 행차였습니다. 조선 정조대왕은 재위 20년이 되는 해인 1795년 을묘년 8일간의 성대한 수원 행차를 위해 6천 명이 넘는 수행원을 이끌고 화성행궁으로 향했습니다. 백성들과 함께 어머니 혜경궁의 회갑 잔치를 수원에서 베풀어 자식으..

동아시아 역사 2017.1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