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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유수부와 수원행차 (조선 정조의 계획 도시, 수원화성박물관)

믿을만한 건강정보 2017. 10. 29. 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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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유수부와 수원행차 (조선 정조의 계획 도시, 수원화성박물관)


수원 유수부 수원행차 조선 정조[조선 정조 수원행차] 수원화성박물관


대도시로 성장한 수원 유수부


"이곳은 본디 허허벌판으로 인가가 겨우 5~6호였는데, 지금은 1천여 호나 되는 인가가 즐비하게 찼구나. 몇 년이 안되어 하나의 큰 도회지가 되었다."

(- 정조실록 권39, 1794년 1월 15일)


수원(당시 수원 유수부)은 정조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농업은 물론 상업이 발달함으로써 일거리를 찾아 유입되는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팽창하여 서울에 버금가는 도시로 성장하였다.


더불어 전국에서 가장 중요한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유수부로 승격 - 활성화되기 시작하는 수원 유수부

수원은 1793년 명칭이 화성으로 바뀌면서 유수부로 승격되고, 성을 쌓으면서 점점 발전하였다. 이는 화성을 활성화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였기 때문이다.


수원으로 이사하는 사람들에게는 10년 동안의 세금과 기존에 국가에서 빌린 환곡도 없애 주었다. 또한 수원과 인근 5읍에 거주하는 백성들을 위하여 1년에 한 차례씩 과거시험을 보았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수원으로 모여들고 인구는 급속도로 증가하였다.


둔전과 시전 - 농업과 상업이 발전하는 수원 유수부

농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만석거, 만년제, 축만제 등 저수지를 만들고 농사지을 땅을 개간하였다. 이 땅을 중심으로 토지 없는 백성들이 모여들고 새로운 농법 개발로 농업이 활성화되었다.


상업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시전을 만들어 전국의 주요 상인들을 유치하고 수원 지역의 상인들이 거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하였다.


수원화성박물관 수원 유수부[조선 정조 수원행차] 수원화성박물관


영화역 설치 - 물산과 유통의 중심지 수원 유수부

화성축성 완공을 1달여 앞둔 1796년 8월 29일 신도시 수원에 영화역을 설치하였다. 한양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는 역을 총괄하던 양재역의 기능을 장안문 북쪽 영화역으로 옮긴 것이다.


영화역의 설치는 수원이 교통로의 중심 지역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되어, 자연스럽게 물산과 유통의 중심지로 커 나갔다.

장용영 외영의 설치 - 안팎으로 건실해지는 수원 유수부

장용영 외영의 설치로 약 5천여 명의 군사들이 화성에 주둔하게 되자 무예 이론 교육기관인 강무당을 활성화하고 연무대에서 무예를 익히게 하였다.


또한, 화성행궁의 부속 시설물로 외정리소와 분봉상시를 만들어 국왕의 행차를 주관하게 하였다. 이처럼 수원은 조선의 수도였던 한성부와 더불어 가장 큰 도시로 성장하였고 정조 사후에도 그 지위와 역할을 계속되었다.


화성기적비 수원화성박물관 조선 정조[조선 정조 수원행차] 수원화성박물관


화성기적비

화성 축성의 전반적인 과정이 기록된 비석으로 정조의 명에 따라 1797년 1월 김종수가 작성하였다.

정조가 화성 축성을 주도적으로 계획하고 추진하였음을 밝히고 있는데, 정조의 위민 정신과 개혁 의지를 느낄 수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사업은 수원 유수부가 기호畿湖 요충지라고만 해서 하는 것이 아니며 5,000병마의 무리가 있다고 해서 하는 것도 아니다. 한편으로는 선침仙寢을 위한 것이며, 또 한편으로는 행궁行宮을 위한 것이다.


마땅히 민심을 즐겁게 하고 민력을 덜어주는 것에 힘써야 할 것이며, 조금이라도 백성들을 괴롭히는 데 가까운 일이 있다면 비록 공사가 하루를 못 간다 할지라도 나의 본의는 아니다.


모든 일은 먼저 그 대체를 세워야 한다. 성을 쌓는 데 중요한 것은 형편에 따라서 기초를 정하되 둥글거나 모나게 하지 말며, 보기에 아름답게 꾸미지도 말고 이로움과 형세에 따라서 하라.

운반을 편리하게 해 주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없으니, 옛사람의 인중기引重機와 기중기起重機를 사용한 법을 강구해서 거행하도록 하라.


재물 모으는 방법은 조처하고 계획한 것이 있으니 경비를 걱정하지 말고 다른 기부금도 받지 말도록 하라. 모양을 꾸미는 방법으로는 위는 처마처럼 하고 아래는 돌층계처럼 하여 지역에 따라서 쌓되, 멀리는 중국의 법을 모방하고 가까이는 고상故相이 논한 것을 취하라. 위대하도다! 왕의 말이여.


한결같도다! 왕의 마음이여, 여기에서 모든 왕 중에 으뜸가는 효도와 백성들을 자식같이 여기는 인자함과 만물에 두루 베푸는 지혜를 볼 수 있도다."


화성성역의궤에 위와 같은 비문의 내용이 남아있었는데 이를 바탕으로 1991년 장안문 서쪽 장안공원에 화성기적비를 건립하였다.


수원 유수부와 수원화성박물관 계획 도시[조선 정조 수원행차] 수원화성박물관


조선 최대의 국왕행렬 1795년 수원행차

정조는 임금의 궁궐 밖 나들이인 행행行幸(행차)을 자주 했다. 재위 24년간 총 66회의 행차를 했는데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 참배를 위해 수원행차(수원 유수부)도 13회나 하였다. 이는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추모와 어머니 혜경궁 홍씨에 대한 효심의 실천이었다.

특히 1795년에는 정조의 재위 20년이 되는 해이자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가 회갑이 되는 해로써 왕실의 경사를 만백성과 함께하고자 대규모의 행렬을 이끌고 수원으로 행차한 것이다. 이를 통해 정조는 왕권의 건재함을 알리며, 자신의 친위세력과 백성들을 결집하고자 하였다.


수원행차 돈화문 혜경궁 홍씨[조선 정조 수원행차] 수원화성박물관


을묘년 수원행차의 시작, 돈화문 출발

1795년 윤2월9일, 정조와 그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는 창덕궁 돈화문을 출발하여 수원으로 향했다.

이날부터 다시 창덕궁으로 돌아올 때까지 8일 동안 화려하면서도 의미 있는 행차가 진행되었다.


정조는 사도세자가 잠들어 있는 수원에서 어머니의 회갑 잔치를 거행함으로써 부모님에 대한 효도를 다함과 동시에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자 하였다. 민폐를 최소화하며 왕실의 경사를 백성과 함께 나누고자 한 애민 정신이 깃들어 있는 국왕의 행차였다.


돈화문 수원화성박물관 수원 유수부[조선 정조 수원행차] 수원화성박물관


국왕의 위엄을 보여준 수원행차

을묘년 수원행차는 왕실 여성을 포함한 왕족들과 정승, 판서 등 신하들이 동원되었고 궁녀와 호위 군사들까지 대략 6,3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여한 엄청난 규모였다.


이처럼 대규모의 인원을 움직일 수 있는 재정능력, 그리고 한 나라의 국왕으로서 과감하게 8일 동안 궁궐을 비울 수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당시 정조의 왕권이 얼마나 안정적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1795년 수원행차는 행차 기간으로 보나 동원된 인원수로 보더라도 그야말로 조선 시대 최대의 국왕 행차였다.


수원 유수부와 수원행차 (조선 정조의 계획 도시, 수원화성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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