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역사

역사상 안타까운 사건. 4위 - 인조 반정, 광해군 폐출

믿을만한 건강정보 2017. 5. 15. 07:12

출처 - 기억나질 않음


3. 역사상 안타까운 사건 4위


광해군이 더 오래 왕업을 이어 가지 못한 것은 더 안타까운 일이다.


광해군은 조선의 제15대 왕이다. 인조반정으로 폐출된 왕으로서 가족의 죽음과 조선의 굴욕을 봐야만 했던 불행한 조선의 임금이다. 광해군은 요즘과 같이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이해관계가 맞물려 가는 국제정세에서 우리에게 대처방안을 일깨워주는 선각자로서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탁월한 외교 정책을 펼친 군주'이 것이 광해군을 새롭게 조명하는 이유이며, 중립 외교 정책을 견지한 군주로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광해군이 위대한 왕이었다는 것은 탁월한 외교 정책과는 다른 또 하나의 이유가 있으며, 외교 정책에 관해서도 좀 더 자세히 알 필요가 있다.


광해군 이혼 1608년 즉위광해군 이혼 1608년 즉위


먼저 광해군은 다른 조선의 왕들과는 다른 이름으로 우리에게 남겨져 있다. 연산군도 또한 그러한데 연산군은 반정으로 내쫓긴 임금으로 난폭하며, 실정했기 때문에 당연하며 후에도 시호에 관한 논란은 없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듯이 광해군은 인조정권에 의해 부쳐진 시호일 뿐 광해군의 업적은 훌륭했으며, 뛰어난 임금이었다. 그러나 집권 세력에 의해 심하게 폄하되어왔고, 오늘날에서야 재해석 되는 등 조명받고 있지만, 아직 광해군에 대한 복권은 부족한 것 같다.


인조의 집권세력들은 광해군이 ‘어머니를 폐하고 동생을 죽였다. '(폐모살제)', '명나라로부터 입은 은혜(재조지은)를 저버렸다'라는 명분으로 반정을 도모하여 광해군을 폐출하였다. 당시 이러한 명분은 상당한 호응을 얻었기 때문에 실정과는 거리가 먼 광해군이 폐위된 것이었다. 그러나 광해군의 실정이라고 한다면, 사실 광해군 자신의 문제보다는 광해군을 등에 업고 권력을 얻은 대북파 정권에서 비롯되었다. 대북파는 남인과 서인을 축출하였고 이는 후에 인조반정으로 이어지는 불씨가 되었다.


신하를 잘 다스리지 못한 것 또한 군주의 책임이겠지만, 조선은 왕권이 신하들과의 힘의 균형에서 절대 우위를 차지할 수 없는 그야말로 신하의 나라였다.


그들, 인조정권은 명분을 내세워 정권을 획득하는 데는 성공하였지만, 국가를 보위하는 데는 실패했다.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민생과 국가는 그들의 안중에 없었으며, 오로지 정권을 차지하겠다는 일념뿐이었다. 정묘호란을 겪으면서도 깨닫지 못해서 병자호란을 겪고 그래도 무엇을 자각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하는 그들을 나는 사회의 암 같은 존재였다고 부르고 싶다. 국가를 이끌고 민생을 안정시켜야 할 지도자들이 자신의 안위에만 급급한 형국이니 더욱 매도하고 싶을 뿐이다.


광해군 분조의 시작광해군 분조의 시작


광해군은 국내적으로는 척신정치에서 동서분당 정치로의 변화가 이루어지고, 국제적으로는 열강들이 그 강대함을 토호 하는 격변의 시대를 살아온 임금이었다. 임진왜란으로 광해군은 18세의 나이에 그야말로 전격적으로 왕세자가 되었다. 적자가 아니었으며, 또한 둘째였던 광해군은 임진왜란으로 왕세자가 되는 기회를 얻은 것이었다. 그러나 광해군은 왕세자의 자질이 있었으며, 분조를 이끌면서 벌였던 활약은 눈부셨다. 무엇보다 중요한 성과는 백성들에게 조정이 아직 건재하다는 사실을 알렸다는 것이었다.


우여곡절 끈에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먼저 민생을 회복시키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동의보감의 편찬 및 간행을 후원하였으며, 민생구제책으로 대동법을 시행하였다. 또한, 전란 중 훼손된 사고에 대한 정비 작업을 벌이고 실추된 왕권의 위상을 회복하기 위하여 왕궁의 중건에도 노력하였다. 무엇보다 광해군의 훌륭한 치세는 탁월한 외교 정책이었다.


후금 초기의 동아시아후금 초기의 동아시아


광해군만큼 열심히 주변 열강의 동향을 살피고, 그만큼 기민하게 국제정세 변화에 대처하려 했던 군주는 일찍이 없었다. 그의 외교 목표는 분명했다.


"명에게 지켜야 할 기본적인 예의는 지킨다. 그러나 조선의 존망 여부까지 걸어야 할 요구는 거부한다. 후금이 오랑캐임은 분명하지만 일단 그들을 다독거려 침략을 막는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얻어진 평화의 시간 동안 최악의 상황에 대비한 실력을 배양한다."


광해군은 중립 외교를 펼친 것이 아니라, 국제 정세를 살피고, 국내 상황을 개선해 실리를 추구하는 실리 외교를 펼친 것이다. 이것이 광해군이 탁월한 외교 정책수립자로 다시금 조명을 받는 이유일 것이다.


광해군의 중립 외교광해군의 중립 외교


광해군이 칭송받아야 할 이유는 또 있다. 바로 역사의 흐름을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하려는 군주였다는 점이다. 당시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에서 실리 외교 정책을 견지한 사람은 광해군뿐이었다. 신하들이 지지하지 않는 정책 노선의 광해군이었지만, 한 나라의 군왕이었고, 뛰어나 수완과 노련한 국정운영으로 광해군은 자신의 정책 노선을 견지해나갈 수 있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크다. 광해군의 왕업이 계속 이어졌다면, 당시 유일사상이었던 성리학 사상의 변화로도 이어질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조선은 성리학의 발상지인 중국에서조차도 찾아볼 수 없는 세계 유일의 순수 성리학의 나라였다. 순수 성리학은 실용적인 것과는 거리가 있어, 학문과 사상적인 분야에서는 발전을 가져왔으나, 민생과 국력 신장에는 도움이 되지 못했다. 중국왕조들의 수명을 볼 때 500년을 이어온 조선왕조의 전통은 범상한 것은 아니다. 이것은 성리학이라는 확고한 사상체계와 정치이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왜구가 감히 우리를 범하겠느냐는 식의 성리학 사상에 갇혀 임진왜란을 겪고 말았다. 역사상의 많은 국가가 내분으로도 멸망하지만, 외적의 침입으로도 멸망해왔듯이 조선왕조의 생명은 임진왜란 당시 사라지는 단계였다. 이것은 실생활과 거리가 먼 성리학을 고수해온 왕조의 당연한 순서였으며, 그동안의 축적돼온 결과물로서 허약한 국력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은 구국의 명장, 성웅 충무공 이순신과 권율, 곽재우, 김시민, 김덕령, 서산대사, 사명대사, 류성룡, 송상현 등 많은 인재를 배출하며, 국난을 극복하였다. 그래서 조선왕조는 생명을 계속 이어갈 수 있었지만, 이것은 네 개의 바퀴 중에 한 개가 없이도 수레가 굴러가는 듯하게 왕조가 계속 이어지는 것이었다. 이렇게 멸망하는 순서를 이탈하고, 생명을 기이하게 이어가는 왕조를 바로 잡을 수 있던 것이 바로 광해군이었다.


광해군은 전쟁의 참상과 비극을 몸소 체험하였다. 분조를 이끌면서 왜구에 대항하였기 때문에 조정의 나약함도 민생의 피폐함도 그리고 전쟁의 참화도 그보다 더 절실하게 느끼고, 자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고, 조선의 실리를 위해 탁월한 외교 정책의 기지를 발휘한다. 당시 조선사회의 흐름과 대세와 다른 외교 정책을 견지했던 광해군이었기에 사상체계에도 변화를 가져올 수 있었다. 광해군은 시대의 흐름을 파악하고 있는 선각자였다. 그리고 대세를 거역하면서까지 그 길을 가려 한 선구자였다.


광해군이 계속 왕업을 이어갔다면 계속된 사상체계의 변화가 이루어져 새로운 것이 확립되고 발전되는 그야말로 역사의 새로운 조류를 타는 혁신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것은 새로운 역사가 창조되는 것이다. 조선이지만, 새로운 제2의 조선이 세워지는, 신조선이 건국되는 것이다. 어떤 하나의 확고한 체계를 부정하고, 새로운 것으로 대체하는 것, 즉 발상의 전환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재조지은, 임진왜란 때 명이 도와준 은혜재조지은, 임진왜란 때 명이 도와준 은혜


조선왕조 500년 동안 한 체계가 계속 이어져 온 것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광해군이 바로 그 일을 이루고자 했던 깨어있던 의식의 소유자였다. 당시 사회가 외침에 시달려야 했기 때문에 내부적으로는 의식의 변환을 가져올 좋은 기회였다.


그러나 광해군은 재위 15년으로 왕업을 끝내야 했고, 조선은 하늘이 준 기회를 놓치고 다시금 옛 왕조의 모습으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결국 일제에 의해 생명을 빼앗기고 말았으니, 200여 년 후의 결과론적인 일이며, 광해군의 폐출과 일제 강점기의 도래와의 연관성은 적지만, 광해군이 오랜 왕업을 이어갔다면, 일제 치하의 시대는 절대 오지 않았을 것임은 확신한다. 그래서 광해군 짧은 왕업은 너무나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