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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안타까운 사건. 6위 - 조선 정조의 죽음

믿을만한 건강정보 2017. 5. 13. 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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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기억나질 않음


1. 역사상 안타까운 사건 6위


역사상에서 안타까운 일들은 수도 없이 많지만 정말 안타깝고, 뒤돌아봐서도 안타까운 일을 6가지로 간추려 보았다. 그중에서 6위는 조선 22대 왕 정조의 죽음이다.


뒤주세자뒤주세자


정조는 영조의 서차남 사도세자(장조, 장헌세자)의 차남이며, 혜경궁 홍씨의 소생이다. 사도세자의 장남 의소세자는 어린 나이에 죽어, 1759년 왕세손으로 책봉되었다. 1762년 사도세자가 죽자 횡사한 영조의 서장자 효장세자에게 입적되어 왕세손이 되었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죽음을 당연시한 노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한 의지를 보인 영조와 동궁 시절에 전례(사도세자의 죽음)를 밟지 않는 얌전한 처세로 왕위에 즉위한다.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는 말과 함께 즉위한 정조는 조정에 일대 개혁을 몰고 올 것을 공언하였다. 그리하여 사도세자의 죽음을 내버려 둔 당시의 영의정이자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인 홍봉한의 몇 촌뻘에 해당하는 홍상범이 암살단을 궁중에 난입시켜 정조를 살해하려 하였다. 국왕암살단이 대궐에까지 난입한 사건은 조선왕조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정조는 힘이 미약했던 초기에는 자신이 전면에 나서지 않고 홍국영을 앞세워 정적들을 제거하고 자신의 입지가 다져진 뒤에야 비로소 정치 일선에 나서는 치밀하고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막상 주도권을 가지게 되자 왕권의 안정에 주력하였다.


정조는 남인 세력과 가까웠으며, 그들은 상업을 중시하고 실용적인 학문을 추구하여 정조대의 정책은 자연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방향으로 흘렀다. 정조의 규장각과 장용영의 설치, 그리고 수원성의 건립 등 재위 시절의 업적과 치세는 세종대왕과 견줄 만큼 훌륭하고 뛰어났다. 그래서 정조가 왕업을 10년만 더 이어나갈 수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으며, 정조의 사망은 안타깝기만 하다. 그러면 정조의 죽음에 관한 논란을 해부하여 보자.


정조는 1800년 6월 초부터 종기가 나서 붙이는 약을 사용했다. 6월 14일에는 종기가 머리뿐만 아니라 등 쪽으로도 퍼졌으며, 열기까지 올라와 후끈후끈 한 증상을 보였으며, 이때 정조는 국왕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처방과 약제조를 직접 관장하였다. 정조는 어느 어의 못지않은 해박한 의학 지식을 갖고 있었다.


정조와 홍국영 동상이몽정조와 홍국영 동상이몽


이틀 후인 6월 16일에는 내약원의 진찰을 받으라는 두 번의 주청을 거부할 정도로 정조의 상태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정조는 자신의 종기를 대신들은 물론 의관들에도 제대로 보여주지 않았다. 이는 내의원 제조를 자주 교체한 것과도 관련이 있으며, 정조는 그만큼 극도로 경계하고 있었다. 정조는 6월 22일에야 의원의 진찰을 허용했다. 이때에도 어의와 지방 의관을 함께 대동하게 하였다. 6월 25일에는 정조의 증세는 한결 좋아졌으나 경옥고를 든 후에는 혼미한 상태에 있었다.


조선 정조의 가계도조선 정조의 가계도


이런 정조의 병세 진행 상황을 볼 때 정조 독살설과 관련해 문제가 되는 것은, 노론 강경파(내의원 도제조)이시수가 여러 차례 권한 경옥고와 28일 등장한 한 여인, 바로 정순왕후 김씨 때문이다.


정순왕후는 15세에 66세의 영조와 가례를 올렸으며, 아버지 김한구와 함께 사도세자 제거에 앞장섰다. 영조 말년 권력을 누리던 김씨의 친정 역시 정조가 즉위하자마자 급전직하 몰락의 길을 걸었으니, 정조에게 원한이 없을 수 없었다. 정조와 정순왕후 김씨는 법적으로는 모자지간이지만, 정치적으로는 원수였다. 


아무것도 드시질 못한다는 이시수의 말에 김씨는 "내가 직접 받아 올리고 싶으니 경들은 잠시 물러가시오" 하였다. 비록 대비나 왕비라 하더라도 국왕의 임종을 지킬 수 없게 한 조선의 예법을 어기고 김씨는 홀로 정조의 병석을 지켰으며, 잠시 후 방 안에서는 곡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렇게 정조는 1800년 6월 28일, 춘추 49세로 재위 24년 3개월을 마감하였다.


물론 정조 독살설을 부인하는 주장도 있다.


1. 독살이라면 어느 날 갑자기 급서하여야 하는데 정조는 한 달여의 투병 끝에 서거하였다. 

2. 배후 조종자로 지목되는 정순왕후와 노론 벽파의 인물들이 정조의 투약과정에 거의 관여하지 않았다. 

3. 독살 혐의가 있었다면, 당시 정조의 세력들이 이를 문제 삼았을 것이며, 정치적인 변동이 일어났을 것이다. 

4. 정조 사후 수렴청정을 하게 된 정순왕후의 정국 주도권은 5년간에 불과했다. 

5. 이 막연한 의구심은 이를 소재로 한 픽션의 극적인 허구성이다.


독살설의 오류를 지적하는 반론에도 오류가 보인다. 그러나 이 이상의 정조 독살에 관한 논쟁은 여러분에게 맡긴다. 어느 통설을 지지하는가는 개인의 역사적인 이해의 역량에 달린 문제일 것이다.


정조가 10년, 10년만 더 왕업을 이어나갔다면, 자신의 치세가 더 화려해질 결실을 얻었을 것이다. 화려한 결실을 볼 시기에 정조가 사망함으로써 빛을 발하던 꽃은 그러나 열매를 맺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꽃이 시들고 뿌리가 메말라 버렸다. 정조에 대해서 일당 독재정치로의 회귀, 세도정치를 낳게 한 원인이라는 부정적인 시각이 없지는 않지만 경제적, 문화적으로 황금기를 구가했으며, 조선 역사에서 마지막으로 부흥을 발했던 시기였다.


정조 사후 조선이 내리막길을 걷게 되는 것은 정조대에 황금기를 구사했지만, 그 시기에 후일의 내리막길로 이어지게 되는 요인들이 또한 잠재하고 있었음을 방증한다. 그래서 정조의 죽음이 안타까운 것이다. 10년만 더 왕업이 이어졌다면, 정조 치세의 열매는 맺어질 것이며, 불안한 잠재 요소들은 사라지고, 조선은 튼튼한 반석 위에 올랐을 것이다.


역린. 조선의 왕 정조역린. 조선의 왕 정조


조선은 정조의 죽음으로 노론 일당전제라는 폐쇄적 사회에서 더욱 개방적인 사회로 나아가야 할 시점에 오히려 한 가문이 정권을 잡는 일족 세도정치가 시작된 것이다. 정조는 조선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 추세였던 개혁과 개방을 적절히 수용하려 한 군주였다. 그러나 보수와 폐쇄로 전환한 세도정치는 조선이 발전하지 못하고 오히려 뒷걸음질 치는 역사의 후퇴였으며, 사실상 조선의 멸망이었다. 세도정치의 조선은 흥선대원군이라는 개혁가가 등장하기까지 60여 년을 암흑 속에서 살아야 했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의 개혁은 너무 쇄국적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정조의 죽음과 함께 비슷한 연대에 일어난 또 하나의 안타까운 사건은 사도세자의 죽음이다. 사도세자의 죽음은 사도세자를 뒤주 속에 가두어야만 했던 아비 영조의 애절함과 함께 비극적인 사건으로 누구나 알고 있는 사건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사도세자가 난폭하고 정신병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비극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을까?


이러한 사실 아닌 사실은 사도세자의 아내였던 혜경궁 홍씨의 기록인 한중록으로부터 근거한다. 그러나 한중록은 정조의 사망을 전후하여 쓰인 것으로써 정조의 아들 순조에게 보여주기 위한 다분히 정치성이 농후한 작품이다. 사도세자가 죽던 당시에 쓰인 것이 아니라 순조의 즉위 후 몰락한 가문을 일으키기 위한 일종의 탄원서였다. 사도세자에게 정신병이 있었다면, 영조가 42세의 나이에 효종 이래로 4대 독자(삼종의 혈맥)로 얻은 사도세자를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치료하지 않았을까?


또한, 사도세자가 비행을 일삼고, 난폭하였다면 태종대의 양녕대군처럼 폐세자하여 내쫓으면 될 것이지 죽여야만 했을까?


사도세자는 붕당 정치의 희생양이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무예가 출중하며, 강직한 사도세자는 노론 대신들을 싫어했으며, 이는 노론 대신들이 다른 수단을 취하게 되는 계기에 이르게 된다. 게다가 경종의 신하들에게서 유소년 시절을 보낸 사도세자는 아버지 영조의 콤플렉스인 경종독살설에 관한 말을 가끔하게 되고 이로 인해 사도세자는 영조의 노여움을 산다.


남편을 비하하고 자신의 친정을 보호하기 위해 후일에 한중록을 썼듯이 사도세자의 아내 혜경궁 홍씨는 사도세자에게서 등을 돌리고, 당시 사도세자는 가족과 대신들로부터 외면을 받게 된다. 그래서 사도세자는 자신을 따르는 신하들과 함께 무엇인가를 꾸민 듯하다. 관서지방의 세력과 결탁하고, 동궁의 처소에 병장기를 숨기는 등 뭔가를 계획하였다.


사도세자는 은밀히 추진하고 있었지만, 영조의 귀에 아니 들어갈 리 없었다. 사도세자가 무엇을 계획하였는지는 모른다. 영조는 왕위 찬탈이라고 생각하고 눈물을 머금고 종묘사직에 아뢰고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둔 듯하나, 사도세자는 노론 대신들만을 제거하려는 목적이었거나 만일의 상황을 대비한 자신의 힘을 기르는 것일 수도 있었다.


한중만록, 혜경궁 홍씨한중만록, 혜경궁 홍씨


자기 아들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아비의 심정으로 보면 왕위 찬탈의 계획이었음에도 가능성이 있지만, 노론 대신들의 압박에 의한 희생양이었음도 간과할 수 없다. 그러나 후일 영조가 사도세자라는 이름을 지어주며, 그 당시의 일을 후회하고 슬퍼한 것에서 드러나듯이 사도세자가 영조의 의구심을 살만한 행동을 한 것은 사실이나, 노론 대신들의 압박에 의한 희생양이었음이 무게가 실린다. 또한, 영조가 세손 정조를 끔찍이 아끼고, 정조의 즉위를 노론 대신들이 극구 반대한 것을 보면 이러한 추측이 맞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사도세자가 죽지 않고 영조 다음의 왕위를 계승하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사도세자는 문무를 겸비한 인재였다.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소년 천자라는 칭찬을 들었으며, 문(文)보다는 무(武)를 국내의 파벌 다툼보다는 북벌에 더 관심이 많은 그야말로 현군의 자질이 있었다. 사도세자가 왕위를 계승하였다면 훌륭한 치세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 초기의 태종에 이은 세종대의 부흥기에 버금가는 사도세자와 정조로 이어지는 조선 제2의 부흥기를 구가했을 것이다.


사도세자는 자신의 치세는 물론이거니와 정적들을 제거하고, 찬란한 부흥기를 꽃 피울 수 있는 밑바탕이 되는 업적을 남겼을 것이다. 그러했다면, 조선은 다시 한번 찬란하고 빛나는 문화가 꽃피었을 것이며, 강성해진 국력으로 북벌이 이루어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또한, 정조 사후의 세도정치 시대와 같은 암흑기는 도래하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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