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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 33

고려 혼욕 풍습, 고려도경

선화봉사 고려도경 23권 잡속雜俗편 중 한탁澣濯(여기서 말하는 한탁은 요즘 말로 빨래) 옛 사서에 고려를 실었는데 그 풍속이 다 깨끗하다 하더니, 지금도 그러하다. 그들은 매양 중국인의 때가 많은 것을 비웃는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목욕을 하고 문을 나서며, 여름에는 날마다 두 번씩 목욕하는데 시내 가운데서 많이 한다. 남자 여자 분별없이 의관을 언덕에 놓고 물구비 따라 몸을 벌거벗되, 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의복을 빨고 깁이나 베를 표백하는 것은 다 부녀자의 일이어서 밤낮으로 일해도 어렵다고 하지 않는다. 우물을 파고 물을 긷는 것도 대개 내에 가까운 데서 하니, 위에 두레박鹿盧을 걸어 함지박으로 물을 긷는데, 그 함지박의 모양이 배의 모양과 거의 같다. (출처 : 陌上桑) 오오... 오호호..

동아시아 역사 2017.06.17

일본 국보 미륵보살반가사유상, 백제가 만들었나 신라가 만들었나

일본 고류지 미륵보살반가사유상 (일본 국보) 전체 높이는 123.5cm이며 보살상 앉은키는 83.3cm이다. 일본 고류지의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일본의 국보이다. 백제로부터 건너갔거나 백제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국보 83호 금동 미륵보살반가상과 쌍둥이처럼 닮았다. 보살상은 왼쪽 무릎 위에 오른쪽 다리를 얹어 반가좌를 틀고 오른쪽 손끝은 오른뺨 위에 댄 사유의 자세를 하고 있다. 반가사유상은 석가모니가 왕자였던 시절에 상념에 빠져있던 모습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미륵보살은 56억 7천만 년 뒤에 이 세상에 나타나 중생을 제도해 줄 부처이다. 도솔천에 상주하면서 장차 용화수 아래에서 중생을 제도하기를 기다리는 미륵보살은 출가 이전에 고뇌하던 왕자의 모습과 닮았다. 이러한..

동아시아 역사 2017.06.14

복원된 백제의 배와 치수들, 그리고 자세한 사진

백제 사람들은 배를 만드는 기술이 뛰어났다. 일본에 가서 배를 만들어 주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백제의 배는 백제방百濟舫 또는 백제선百濟船으로도 불렸다. 배의 바닥은 편평하고 돛은 1개인 것이 특징인데, 돛이 2개라는 설도 있다. 선장 (Length of Hull) : 10.35m (34.5척)전장 (Length over All) : 12.25m (40.8척) - 옆에서 바라봤을 때, 닻이 닿기 전까지를 선장, 닻까지 포함한 전체 길이를 전장이라 함. 선고 (Height) : 1.50m (5.0척)선광 (Breadth Molded) : 3.45m (11.5척)- 정면에서 바라봤을 때의 높이와 폭. 닻줄 - 닻을 메어다는 길게 연결한 밧줄 닻 - 배가 떠나가지 않고 머물러 있게 하려고 물속에 내리는 기구..

동아시아 역사 2017.06.13

조선시대 수라상과 음식 그릇, 국립고궁박물관

국립고궁박물관은 경복궁 바로 옆에 있습니다. 이곳 2층에 가보면 왕실의 생활관이 있는데 이곳에서 수라간 정보들을 봤습니다. 이곳을 들렀다 나오면 ... 괜히 배고파집니다. 그러니 식후에 돌아보는 걸 추천해요 ㅎㅎㅎ. 수라상, Surasang, the Royal Meal Table 조선시대 왕의 밥상인 수라상은 각 지방에서 올라온 좋은 재료를 사용해 최고의 맛과 모양을 낸 음식들로 차려졌다. 수라상 상차림은 밥과 탕을 포함한 기본 음식과 12가지 반찬으로 구성된 12첩 반상으로 이루어졌다. 12첩 반상은 왕실만을 위한 것으로 일반 반가에서는 차릴 수 없었다. 왕의 수라상은 기본적으로 세 개의 상으로 이루어졌다. 하나는 왕의 앞에 놓이는 대형의 둥근 밥상(대원반大圓盤)이고, 다른 하나는 음식에 독이 들었는지..

동아시아 역사 2017.06.11

청주 흥덕사지 출토 유물 - 고인쇄박물관

직지에는 이 책이 청주 흥덕사에서 인쇄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흥덕사가 1984년 '운천지구택지개발사업'을 시작하면서 진행한 '운천동사지발굴조사' 중에 새로운 절터가 발견되었다. 이에 1985년에 이 절터에 대해 발굴조사를 하였는데, "서원부흥덕사西原府興德寺"라는 글자가 새겨진 청동금구靑銅禁口 조각과 "황통십년흥덕사皇統十年興德寺"라고 새겨진 청동불발靑銅佛鉢이 출토됨으로써, 이곳이 직지를 인쇄한 흥덕사지로 확인되었다. 이밖에도 '계향지사桂香之寺', '대중삼년大中三年(849)'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와 조각, 청동소종, 금강저, 철불나발편 등이 출토되었다. 흥덕사지 치미전통건물의 용마루 양쪽 끝에 올려 건물이 더욱 웅장하게 보이도록 하는 기와로 '망새'라고도 한다. 건물의 권위나 위엄을 상징하며, ..

동아시아 역사 2017.06.08

아리수(한강)를 건넌 고구려 군사와 일상 생활

아리수를 건넌 고구려 4세기에 고구려는 낙랑군과 대방군을 축출하는 등 정복 전쟁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396년 광개토왕은 백제를 공격해 58개 성 700개 마을을 빼앗고, 아리수阿利水(한강)를 건너 백제 아신왕의 항복을 받고 돌아갔다. 이후 475년 장수왕이 백제의 도읍인 한성漢城을 함락시키고 한강 유역을 장악하였다. 고구려는 한강 유역의 요충지에 크고 작은 군사시설을 만들고 군현을 설치했으며, 551년 백제와 신라 연합군의 공격을 받기 전까지 이 지역을 76년간 지배하였다. In 396, King Gwanggaeto of Goguryeo attacked Baekje across the Arisu(Hangang River), returned home after the surrender of King As..

동아시아 역사 2017.06.06

가야의 대외 교류 (백제, 신라, 중국, 일본과의 교류)

가야의 대외교류 가야의 많은 나라가 낙동강과 그 지류, 그리고 남쪽 바다 가까운 곳에 있었다. 육지는 물론이고 강과 바다로 이어진 물길로 많은 사람과 물자가 오갔는데, 가야 지역의 특산품 중 하나는 철鐵이었다. 전기 가야연맹을 이끈 금관가야는 우수한 철을 생산해 한韓, 예濊, 왜倭와 서북쪽의 낙랑, 대방군에 공급한 것으로 알려진다. 철을 만드는 기술은 단단한 그릇을 만드는 기술로도 이어졌다. 5~6세기에 가야는 한반도와 일본 열도를 잇는 중요한 통로였다. 백제와 왜의 사신 모두 가야를 거쳐 바다를 건넜다. 비록 6세기 중엽에 가야 제국이 멸망하였지만, 가야 사람들이 개발하고 운영한 교통, 교역 네트워크는 여전히 남아 동아시아의 사람, 기술, 문화를 더욱 풍요롭게 하였다. (5세기엔 고구려 평양, 백제 한..

동아시아 역사 2017.06.05

금속활자, 목활자, 목판본 구별 방법

금속활자본과 목활자본 구별법 금속활자본 목활자본 글자모양 일정한 글자본에 의해 주형을 만들어 주조하였기 때문에 글자 모양이 같고 정연하다. 그러나 글자본이 다르거나 주조방법이 다른 초기 및 민간활자의 경우는 동일한 글자라 하더라도 글자 모양이 다르다. 활자 하나하나가 글자본을 써서 뒤집어 붙이고 새겨 내기 때문에 동일한 글자라 하더라도 같은 글자 모양이 없고 조금씩 또는 각각 다르다. 민간 활자는 글자 모양이 더욱 고르지 않고 치졸하다. 글자획 글자획의 굵기가 고르고 일정하다. 그러나 어미자에 의한 주조방법을 쓰지 않은 초기 및 민간 활자인 경우는 그다지 고르지 않다. 획의 굵기의 차이가 심하며 고르지 않다. 마멸 오래 사용하면 글자획이 마멸되어 가늘어지고 일그러지지만 글자 획은 떨어지지 않고 붙어있다...

동아시아 역사 2017.06.05

그림 속 백제 사신의 모습 (양직공도)

양직공도梁職貢圖는 6세기 중국 양나라를 찾은 백제, 왜 등 외국 사신들의 모습을 그리고, 그 나라의 역사와 풍속을 기록한 화첩이다. 지금 남아 있는 그림은 양나라 원제元帝(재위 552~554) 소역이 왕자 시절인 539년에 제작한 원본을 1077년 북송 시대에 모사한 것이다. 백제국사百濟國使로 기재된 그림 속 백제 사신의 모습은 가늘고 길게 째진 눈매에 낮고 넓은 콧방울, 작지만 붉은 입술, 오동통한 볼이 특징이다. 머리에 흰색 관을 쓰고 두루마기와 바지를 입었으며, 검은색 가죽신을 신었다. 백제 사신 그림 옆에는 백제의 유래와 도성, 제도, 풍속 등에 대해 기록되어 있다. 이 백제 사신 그림은 백제 사람의 구체적인 모습을 담은 유일한 자료이다. 타이완臺灣 국립고궁박물원國立故宮博物院에 소장된 남당고덕겸모..

동아시아 역사 2017.06.04

우리 민족 인쇄의 시작과 역사, 사례

인쇄의 시작 자신의 의사를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고 또 전달받는 정신적, 심리적인 교류는 인류문화의 시작과 함께 존재해왔다. 음성, 몸짓과 같은 원시적인 매개수단에서부터 언어와 문자, 인쇄를 거쳐 현대의 인터넷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다양한 소통수단을 통해 끊임없이 정보를 생산, 전달하고 유통해왔다. 또 이러한 과정의 기술적인 진보와 발전은 곧 인류 문명사의 근간이 되어왔다. 그 가운데 인쇄는 정보의 기록과 전달을 위한 가장 획기적이며 합리적인 매체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인류역사에서 현재와 같이 정보의 대량 보급과 유통이 가능해진 것은 그렇게 오래된 일이 아니다. 인간은 음성과 몸짓을 통한 원시적인 의사 표현 단계를 지나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고 보존하기 위해 다양한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만..

동아시아 역사 2017.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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