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역사

고려의 유학과 송나라와의 관계

믿을만한 건강정보 2017. 5. 22. 08:20

유학 儒學


동이東夷는 천성이 인자하여 그 땅에는 군자가 죽지 않는다는 나라가 있다. 또 기자箕子가 봉해졌던 조선 땅에서는 본래부터 8조의 가르침을 잘 알아, 그 남자들은 예의로 행동하고, 부인들은 올바름과 신용을 지키고, 음식은 두변豆籩(두와 변. 모두 법도에 맞게 쓰는 예기禮器)을 가지고 하고, 길을 가는 자들은 서로 양보한다. 그리하여 만맥 잡류蠻貊雜類들이 이마에 자자刺字하고, 발에 굳은살을 지우며 변발辮髮에 횡폭橫幅(오랑캐의 복식) 이름을 두르고, 부자가 잠자리를 같이하고 친족이 관곽을 같이하는 따위의 편벽하고 괴이한 것과는 다른 것이다.


한 무제漢武帝가 사군四郡을 설치해서부터는 신첩臣妾으로 내속內屬하여 중화의 정치 교화가 점차로 미쳐갔던 것으로 비록 위魏를 거치고 진晋을 지나면서 시대의 기복에 따라 잠시 이탈했다 잠시 합쳤다 하기는 하였으나 의리가 마음속에 뿌리박은 것은 없어진 적이 없었다.


당唐 정관貞觀(태종의 연호) 초년에 태종(626~649)이 위 정공魏鄭公(위징魏徵의 봉호가 정국공鄭國公임)의 한 마디를 써서 인의仁義로 정치하고 학교를 넓히며 학자를 숭상하였는데, 이때에도 의론에 참여하였던 대신들은 오히려 의심을 하고 그것의 유익함을 몰랐었다. 그런데 저 나라에서는 서둘러 자기네들의 뛰어난 자제들을 보내어 경사京師(당시 당의 수도였던 장안長安을 말함)에서 교육시키기를 청했다.


위징 당나라 명신위징 당나라 명신


그 후 장경長慶(목종의 연호, 821~824) 연간에는 백거이白居易(자는 낙천樂天, 당대의 시인)가 가행歌行(성률이 덜 근엄한 고체시古體詩의 일종으로 악부시樂府詩의 계통을 이은 것)을 잘 지었는데, 계림雞林(우리나라를 말함) 사람들은 옷깃을 여미고 감탄 흠모하여 일금一金(황금 1금을 말함)으로 한 편을 바꿔서 그것으로 규범을 삼기까지 하였으니, 그들의 마음 쓰는 것을 알 수 있다.


왜倭, 진辰 등 나머지 나라들을 살펴보면, 혹은 가로쓰고 혹은 왼쪽으로 획을 긋고 혹은 노끈을 매듭지어 신표로 하고, 혹은 나무를 파서 기록으로 삼고 하여 각각 방법을 달리하고 있다. 그런데 고려인들은 예서법隸書法을 모사하여 중화의 것으로 바로 잡으며, 화폐의 글자와 부절과 인장의 각자에 이르러서는 감히 망령되이 자체를 증손增損하지 않으니 문물의 아름다움이 상국上國과 맞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고려조운지도고려조운지도

(출처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쳔사 (4) - 고려시대)


송宋 나라가 일어나 그 문화가 멀리에까지 미쳐가자 머리를 조아리고 관문을 두드려 번신藩臣이 되기를 청해왔다. 그 사자使者가 와서 조정에 들 때마다 나라의 찬란한 문물을 보고서는 그 아름답고 찬란함을 부러워하고, 돌아가서는 서로 이야기하여 사람들이 더욱 힘쓰게 되었다.


순화淳化 2년(고려 성종 10년 991)에 천하의 선비들에게 조정에서 시험을 베풀었는데, 그들 역시 자기네 사람들을 빈공賓貢으로 보내서 문예文藝를 바쳐왔다. 태종 황제太宗皇帝께서 이를 가상히 여기시어 그 수효 안에서 뽑아주시어 왕빈王彬, 최한崔罕 등은 진사 급제進士及第로 장사랑 수비서성교서랑將士郞守秘書省校書郞을 제수하고 배를 태워 귀국게 하였다. 그때의 국왕 치治(고려 성종成宗)가 표물을 바쳐 사의謝意를 표했는데, 그 언사가 심히 감격스러웠다.


고려 대외 무역도고려 대외 무역도


신종황제神宗皇帝께서 속학俗學의 폐단을 근심하시어 삼경三經(시경, 서경 및 역경을 말함)을 훈석訓釋하여 천하의 암매함을 없애주도록 명하시고, 특히 조명詔命으로 그 책들을 내려 그들로 하여금 대도大道의 순전純全함을 볼 수 있게 하여 주도록 하시었다. 주상主上(송 휘종을 말함)께서는 선왕의 뜻을 훌륭히 계승하시어 시사법施舍法(시사법施舍法 : 빈객으로 온 자들의 짐을 풀어주고 무료로 거처를 제공하는 법)을 확대하셨고, 또 내학자제來學子弟(당시 고려 유학생을 말함) 김단金端 등에게 과명科名(과거 급제의 종류에 따른 명칭)을 내리어 귀국시키셨다.


이리하여 휩쓸리듯 따르고 세차게 교화되어 즐겁고 공경스럽게 유학을 지켜나가 비록 연한燕韓(중국 북방 지역을 포괄해서 말한 것)의 변두리 편벽한 곳에 살기는 하지마는 제노齊魯(지금의 산동지방으로 공자, 맹자의 영향을 받아 유풍儒風을 대표하는 고장으로 여겨져 왔다)의 기풍과 운치를 지니게 된 것이다.


근자에 사신이 그곳에 가서 물어보고 알았지마는, 임천각臨川閣에는 장서가 수만 권에 이르고, 또 청연각淸燕閣이 있는데 역시 경, 사, 자, 집經史子集 4부의 책으로 채워져 있다 한다. (임천각에 관해서는 권 6 동조 참조. 청연각淸燕閣에 관해서는 김연金緣 1487~1544의 청연각기 및 본서 권 6 영연전각 참조.東國輿地勝覽 卷6, 東文選 卷 64) 국자감國子監을 세우고 유관儒官을 선택한 인원을 짜 갖춰져 있었으며, 황사簧舍(학교를 말함)를 새로 열어 태학太學의 월서계고月書季考(매월 한 차례씩 배운 것을 써보게 하고 사계절에 한 차례씩 배운 내용이나 시문을 시험하는 것)하는 제도를 퍽 잘 지켜서 제생諸生의 등급을 매긴다.


떡을 치는 고려 사람떡을 치는 고려 사람

(출처 : [어린이·청소년] 육식 금했던 고려땐 두부요리가 발달했지)


위로는 조정의 관리들이 위의가 우아하고 문채가 넉넉하며, 아래로는 민간 마을에 경관經館과 서사書舍가 두셋씩 늘어서 있다. 그리하여 그 백성들의 자제로 결혼하지 않은 자들이 무리 지어 살면서 스승으로부터 경서를 배우고, 좀 장성하여서는 벗을 택해 각각 그 부류에 따라 절간에서 강습하고, 아래로 졸병과 어린아이들에 이르기까지도 향선생鄕先生(자기 고장의 글가르치는 선생)에게 글을 배운다. 아아, 훌륭하기도 하구나!


그런데 제후가 공을 이룩하는 것은 실은 천자의 위령威靈을 빈 것이고, 제후가 덕을 드러내는 것은 실은 천자의 교화를 따른 것이다. 고려인은 중국에 대해서는 바다 한구석의 후백侯伯의 나라일 뿐이다. 이제 그들의 문물이 풍성함이 이와 같음은 대체로 좋은 감화의 소치이니 또한 위대하지 않은가? 이를테면 일월을 비롯한 삼진三辰(일, 월, 성을 말함)은 원기元氣를 빌어서 열列을 이룩하나, 그것들이 빛으로 나타내는 것은 하늘의 밝음으로 되는 것이다. 그리고 초목을 비롯한 온갖 보물은 원화元化(조화의 위대한 작용을 말함)를 받아서 꽃을 피워내나, 그들 꽃이 아름답게 피고 지고 하는 것은 땅의 문체로 되는 것이다.


바둑을 두는 고려 사람들바둑을 두는 고려 사람들


그 나라의 선비를 뽑는 제도로 말하면, 비록 본조本朝(송나라를 말함)의 그것을 규범으로 삼기는 하지마는, 전승하여 듣고 구례를 따르고 하는 데 따라 약간의 차이가 없을 수 없다. 그들은 학생學生들에 대해서는 매년 문선왕묘文宣王廟(공자묘 즉 문묘)에서 시험하는데 합격자는 중국의 공사貢士(중앙고시에의 응시자격을 추천 받은 자)와 대등하다.

그들의 거진사擧進士(진사시에 응시할 자격을 갖춘 자)는 한 해 건너 한차례씩 그 소속지에서 시험을 시행하여 합격하면 공자貢者(학생으로 합격한 자를 말함)와 대등해지는데, 모두 3백 50여 인이다. 추천 선발이 끝나면 또 학사學士들에게 명해 영은관迎恩館에서 전체 시험을 치르게 하여 30~40인을 뽑아, 갑, 을, 병, 정, 무 5등으로 나눠서 급제를 내리는 것이 대략 본조의 성위省闈(궁중에서 치르는 중앙고시를 말함)의 제도와 같다. 왕이 친히 시험해서 벼슬을 주는 것으로 말하면 시, 부, 논詩賦論 3제를 쓰고 시정時政을 책문策問하지 않으니 이것은 우스운 일이다. 그 밖에 또 제과制科굉사宏辭의 명목이 있는데 조문은 갖추어져 있으나 늘 시행하지는 않는다. 대체로 성률聲律을 숭상하고 경학經學은 그리 잘하지 못한다. 그들의 문장을 보니 당의 여폐餘弊와 방불하다.


제과制科 - 임시로 실시하여 특출한 인재를 발탁하는 과거로, 국왕이 직접 출제하여 시험하는 것이다.

굉사宏辭 - 곧 박학굉사博學宏辭로 관리를 뽑는 과명科名. 문장 3편을 시험했다. 文獻通考 選擧考 賢良方正

성률聲律 - 여기서는 시율詩律을 두고 한 말.

당唐……여폐와 방불하다 - 당대에 시부로 취사取士해서 그 방면에만 치중한 데서 빚어진 폐단을 말한다.


출처 - 고려도경 40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