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역사

이순신은 정말로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지 않았을까?

믿을만한 건강정보 2017. 5. 10.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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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불멸의 영웅 이순신, 이우각


성웅 이순신은 죽었나 살았나


분명히 전사했다는 데도 두고, 두고 "못 믿겠다"는 사람들이 심심찮게 나왔다. 심지어 이런 괴소문까지 등장했다.


"자신을 천거한 류성룡柳成龍을 살리고 영웅에게 따르게 마련인 화를 미리 피하고자, 일부러 갑옷도 입지 않고 비 오듯 쏟아지는 조총 탄환에 자신을 노출해 자살 아닌 자살을 감행했다."


세상 사람들의 추측과 입소문은 언제나 현실 이외에 또 하나의 가공적인 현실을 만들어 놓곤 했다.


인민영웅 리순신 장군인민영웅 리순신 장군

(출처 : 朝鲜文李舜臣将军)


1986년 4월 1일 출판1986년 4월 1일 출판

(출처 : 朝鲜文李舜臣将军)


이순신의 전사장면을 놓고 "직접 들었다", "직접 보았다", "보고받았다"는 식의 이야기들이 몇 갈래로 이어져 왔다. 우선 조카 이분李芬이 기록한 이순신 행장(죽은 이의 일생을 기록한 글)이 있다. 이분은 이순신의 전사현장을 지켜보았다는 조카 완李莞의 친형이다.


1598년 11월 19일 새벽, 이순신이 한창 독전 중에 공중을 나는 탄환에 맞았다. 이순신은 숨지기 직전에 다음과 같이 다급하게 말했다.


"싸움이 한창 급하다.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戰方急,愼勿言我死)"


이때 맏아들 회李薈와 조카 완(이분의 친동생)이 활을 쥐고 곁에 섰다가 울음을 잃고 서로 말했다.


"이렇게 되시다니! 정말 기가 막히는구나!"

"그렇지만 지금 만일 곡소리를 냈다가는 온 군중이 놀라고 적들이 또 기세를 올리게 될지 모릅니다."

"그렇다. 게다가 시신을 보전해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습니다. 전투가 끝나기까지 참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는 시신을 안고 선실로 들어갔기 때문에 이순신을 모시고 있던 종 김이金伊와 희와 완, 이렇게 세 사람만이 알았을 뿐 심지어 친히 믿던 부하 송희립宋希立 등도 전혀 알지 못했다.


이순신 장군 전사 장면이순신 장군 전사 장면

(출처 : 朝鲜文李舜臣将军)


이분의 행장과 달리 선조실록 31년 11월 무신일조 기록은 그 순간을 전혀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사관이 말하기를 ... 이순신이 스스로 왜놈들을 쏘다가 적탄에 가슴을 맞아 배 위에 쓰러지자 그 아들이 곡하려 하므로 군심이 어지러워 지려 하였다. 곁에 있던 이문욱李文彧이 울음을 저지시키고 옷으로 공의 시신을 가린 뒤 그대로 북을 울리며 나가 싸우매

 ... 

사람들이 모두 죽은 순신이 산 왜군을 무찔렀다고 하였다.


위의 기록에 의하면 이문욱은 당시 일본어 역관으로 이순신이 전사하는 순간 임기응변을 발휘해 공을 세운 인물이 된다. 또한 위의 기록보다 한참 뒤에 나오는 선조실록 31년 12월 25일 자는 이문욱만이 시신을 가린 것이 아니라고 반박하며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노량해전의 전공은 모두 이순신이 힘써 이룬 것으로 불행히 탄환을 맞자 군관 송희립 등 30여 명이 상인喪人(아들과 조카)의 입을 막아 곡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고, 군사를 재촉하여 생시나 다름없이 ... 모든 배가 주장主將의 죽음을 알지 못하게 함으로써 승세를 이루었다.


노량해전 상황도노량해전 상황도

(출처 : 백전백승 불패신화)


당시 도원수(조선군 총사령관)였던 권율權慄도 이순신의 죽음에 관한 조사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이순신이 죽은 뒤에 다행히 손문욱(이문욱) 등이 마침 지혜 있게 일을 처리하여 (우리 군사들이) 죽을 각오로 싸웠다.


권율은 위에 언급된 선조실록의 두 대목을 "맞다"고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다음은 명나라 수군 제독 진린陳璘이 전하는 말이다. 이순신과 연합함대를 구성해 노량해전(1598년 11월 19일)을 치른 명나라 해군 제독 진린의 제문은 다음과 같다.


평시에 (이순신이) 사람들을 대할 때 말하기를 "나라를 욕되게 한 사람이라 오직 한 번 죽는 것만 남았노라" 하시더니 이제 나를 이미 찾았고 큰 원수마저 갚았거늘 무엇 때문에 오히려 평소의 맹세를 실천해야 하셨던고.


진린 장군 동상진린 장군 동상

(출처 : 史书上很少提到甚至被漠视的十大战功显赫名将)


특히 이순신이 아끼던 부하였던 유형柳珩은 행장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평소에 속마음을 토로하며 말하기를 "예로부터 대장이 전공을 인정받으려는 생각을 조금이라도 갖는다면 대게는 목숨을 보전하기 어려운 법이다. 그러므로 나는 적이 물러나는 그 날 죽음으로써 유감될 수 있는 일을 없애도록 하겠다"고 했는데 ... 이는 물고 뜯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숙종 때 사람 이민서는 김덕령 장군 전기를 남기며 그 속에서 이순신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이 글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김덕령金德齡 장군이 반역의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사형당한 이야기를 전하는 가운데 이순신의 죽음을 나름대로 언급하고 있다.


(김덕령) 장군이 죽고부터 여러 장수가 모두 저마다 스스로 제 몸을 보전하지 못할까 걱정했던 것이니 저 (의병장) 곽재우郭再祐는 마침내 군사를 해산하고 산속에 숨어 화를 면했고 이순신도 바야흐로 전쟁 중에 갑옷을 벗고 앞장서 나섬으로써 스스로 탄환을 맞아 죽었으며 ... 


이순신은 1598년 11월 19일 노량 바다에서 죽었다. 고향인 충남 아산으로 옮겨져 다음 해 2월 11일 죽은 지 80일 만에 장례가 치러졌다. 그 후 16년이 지난 1614년에 600m 떨어진 곳으로 이장된다.


이순신이 전사했다는 소식은 나흘 후인 11월 23일 선조에게 보고됐다. 보고 할 당시는 이미 전쟁이 끝난 후인 데다 장례비도 조정에서 국고로 지출했기 때문에 장례를 늦출 이유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 이순신 생존설의 뿌리다. 장례를 전사한 지 장장 80일이나 지나 치른 것도 이상하고, 16년 후에 이장한 것은 더더욱 이상하다는 것이다.


이순신 장군 묘 1이순신 장군 묘 1

(출처 : 충남 아산의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묘)


이순신 장군 묘 2이순신 장군 묘 2

(출처 : 충남 아산의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묘)


예나 지금이나 역시 대중의 인기를 독차지했던 스타가 사라지면 열광하던 이들은 대게 "아직 죽지 않았다. 어디에 나타난 걸 본 사람이 있다"는 식으로 환상인지 상상인지 착각인지를 멋대로 일삼게 마련인가 보다.


왜란을 치르며 상거지 떼거지가 된 백성들은 "이순신이 살아있다"고 믿고 싶어 했을 것이다. 무간지옥으로 변한 조선 땅 조선 하늘을 바라보며 한동안 넋을 잃어야 했던 죄 없는 백성들은 "조선 바다를 주름잡던 이순신은 아직 죽지 않았다"거나 "못된 놈들이 미워 일부러 목숨을 내던진 것"이라고 믿고 싶었을 것이다. 이순신이 죽었건 살았건 사람들은 그의 이름 석 자를 들먹이며 간신히 기운을 차리고 헤쳐나갈 용기를 얻었을 것이다. "이순신"이라는 이름 자체가 바로 백성들의 수호 천사가 되고 신통력 있는 부적이 되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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