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들보다 나았던 북벌 정책론자 유익, 위진남북조 시대 유량 동생 (343년, 강제 건원 원년의 일)유치공庾穉恭(유익, 庾翼)은 이전부터 중원을 회복코자 하는 뜻(북벌 정책 찬성자)을 가지고 있었으나 (큰 형) 문강文康(유량, 庾亮)이 살아 있을 때는 그 권력이 강했고, 그런 실권이 자기에게는 없었다. (둘째 형) 계견季堅(유빙, 庾冰)이 재상의 자리에 오르자 전화戰禍를 꺼리고 두려워했다. 유치공은 그와 오랫동안 시비를 벌인 다음에야 겨우 출병하기에 이르렀다. 형荊, 한漢 지방의 총병력을 투입하고, 군선軍船과 병거兵車를 있는 대로 총동원했으며 군단을 양양襄陽에 진주시켰다. (1) 그곳에서 치공은 막료들을 전원 집합시키고 군기軍旗와 무기 일체를 도열시킨 다음 친히 활과 화살을 주면서 말했다. "이번에 내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