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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들보다 나았던 북벌 정책론자 유익, 위진남북조 시대 유량 동생

믿을만한 건강정보 2016. 12. 11. 0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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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들보다 나았던 북벌 정책론자 유익, 위진남북조 시대 유량 동생


형주의 명사를 모으던 유익[북벌 정책론자 유익] 형주의 명사를 모으던 유익


(343년, 강제 건원 원년의 일)

유치공庾穉恭(유익, 庾翼)은 이전부터 중원을 회복코자 하는 뜻(북벌 정책 찬성자)을 가지고 있었으나 (큰 형) 문강文康(유량, 庾亮)이 살아 있을 때는 그 권력이 강했고, 그런 실권이 자기에게는 없었다.


(둘째 형) 계견季堅(유빙, 庾冰)이 재상의 자리에 오르자 전화戰禍를 꺼리고 두려워했다. 유치공은 그와 오랫동안 시비를 벌인 다음에야 겨우 출병하기에 이르렀다. 형荊, 한漢 지방의 총병력을 투입하고, 군선軍船과 병거兵車를 있는 대로 총동원했으며 군단을 양양襄陽에 진주시켰다. (1)


그곳에서 치공은 막료들을 전원 집합시키고 군기軍旗와 무기 일체를 도열시킨 다음 친히 활과 화살을 주면서 말했다.


"이번에 내가 출전한 것은 이 화살을 쏘는 것과 같다!(我这次出征,就像这次射箭一样)"

그렇게 말한 다음 일어나서 세 번 쏘았고 세 번 다 명중시켰다. 병사들은 이것을 보고 용기가 10배나 올라갔다.


유효표의 주.


(1) 한진춘추漢晉春秋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유익은 풍자風姿(드러나 보이는 풍채)가 화려하고 재능이 풍부하여 젊었을 때부터 세상을 평정하고 다스릴 큰 뜻이 있었다. 형인 유량의 뒤를 이어 자사刺史에 오르자 안팎을 바로잡아 유지하고 여러 도적의 무리를 소탕하려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두예杜乂, 은호殷浩 등의 사람들은 높은 이름을 세상에 드날리고 있었는데, 유익은 그들을 존중하려고 하지 않고 늘 이렇게 말했다.


"이 무리를 고각高閣에 묶어 두었다가 천하가 평정된 후에 그들의 소임을 의논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의 의기가 이와 같았다.


유익은 북벌을 추진하던 유일한 인물[북벌 정책론자 유익] 유익은 북벌을 추진하던 유일한 인물


오직 환온과는 사이가 좋아서 천하를 편안하게 구해낼 것을 서로 맹세하였다. 처음에 유익은 부하 병사와 거마車馬 수만을 출동시키어 그 대군을 이끌고 면하沔河로 들어갔고 이적夷狄을 정벌코자 하여 양양에 진주하였다.'


유익별전庾翼別傳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유익이 형주자사荊州刺史였을 때, 평소 원대한 뜻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생각했다.


"가문의 위세가 혁혁하고 형제들 모두가 은총을 입어 높은 벼슬을 받고 있는 데도 힘을 다하여 충성하지 않으면 어찌 나라에 보답할 수 있으리오.


촉蜀 땅은 험준한 요새로 둘러싸여 있고 오랑캐 도적들은 흉포한 힘을 의지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러나 그들은 무도하고 또한 잔혹하니 이 점을 이용하여 쉽게 멸망시킬 수 있다. 이 때 즈음하여 촉과 오랑캐, 두 적도를 일소하고 왕업을 회복할 수가 없다면 사나이가 아니지."

그래서 3주州의 백성을 총동원하고 그 재물들을 모두 바치게 하여 총병력 5만의 대군단을 편성했다. 또 유민流民 노예를 이끌고 군비를 갖추어 대대적으로 거병하여 곧바로 위魏, 조趙를 향했다. 군단은 양양에 진주하고, 그 위력은 한북漢北 땅에 떨쳤다.'


세설신어 中, 호상豪爽(기품이 호탕하고 시원스러워 범속하지 않은 일)편 7화

세설신어 中, 안길환, 명문당


유익을 비웃던 그의 어머니와 형들[북벌 정책론자 유익] 유익을 비웃던 그의 어머니와 형들


유익 일가의 구성.


아버지 : 유침庾琛, 승상, 군자좨주(丞相军谘祭酒)

어머니 : 구씨(丘氏)


장녀(맏딸) 유문군庾文君 : 명제 사마소(明帝司马绍)의 부인. 명목황후明穆皇后.

장남 : 유빙庾冰

차남 : 유역庾怿

삼남 : 유조庾条

사남 : 유익庾翼


동진의 두번째 황제인 명제 사마소는 죽기 직전, 5살의 어린 아들을 후계자로 선택하니 이가 성제 사마연입니다.


황제가 어리니 자연스레 황제의 어머니인 유황후庾에게 권력이 집중됩니다. 그때, 유황후의 동생이자 성제의 외삼촌인 유량도 권력을 얻지만, 유량은 아주 편협하고 여러모로 모자란 인물이었습니다.


문제는, 유량만 못난이면 괜찮은데 유량의 동생 유역도 엄청나게 무지한 인물이라 둘은 사사로운 감정으로 황족은 물론이고 지방 태수까지 살해하는 등 전횡을 일삼았습니다.

그나마 다행인진 모르겠으나, 유빙, 유역과는 다르게 유조, 유익은 큰 전횡을 일삼진 않았습니다. 형들과는 생각이 달라서 그런가 유빙 생전엔 유조, 유익에게 큰 권력은 없었습니다.


시간은 흘러 유량이 사망하자 형주 일대의 군권은 유익이 장악하게 됩니다. 343년, 북벌의 상소를 올리지만 둘째 형 유역은 손작 등을 보내며 이를 만류합니다. 아마도 손작이 유량의 비문을 잘 지은 건, 그도 유량에 빌붙어 떡고물이라도 얻어먹던 상황이라 그랬을지도요.


거품이 많이 낀 유량[북벌 정책론자 유익] 거품이 많이 낀 유량


아무튼, 유익은 유역의 만류에도 군사를 모아 북벌에 나섭니다.


번성을 함락시키고 양양을 탄탄히 하는 등 성과를 내지만, 당시 황제인 강제 사마악이 사망하자 군사 활동은 멈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유익이 탄탄히 한 양양은 전진의 부견도 쉽게 함락시키지 못했을 정도로 꾸준히 견고함을 자랑합니다. 유익의 공이겠죠.


그렇지만, 유익을 포함한 형제의 아들들은 권세가 강했기에 환온의 3차 북벌이 끝난 뒤 대거 숙청당합니다. 그렇게... 수십 년간 권력을 잡았던 유씨 일가는 몰락합니다. 유익 형제가 모두 유익과 같았다면, 왕도처럼 대우를 받으며 집안을 유지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형들보다 나았던 북벌 정책론자 유익, 위진남북조 시대 유량 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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