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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호, 조선 개국공신을 몰랐던 고려 공민왕

믿을만한 건강정보 2016. 11. 15.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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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호, 조선 개국공신을 몰랐던 고려 공민왕


당나라 이신은 사기 이사 열전을 읽고 독이사전시讀李斯傳詩 그를 평가했으며, "권력으로 수단을 가리지 않고 여러 사람을 속이려 하는 것"이라는 뜻의 일수차천一手遮天이란 고사성어도 여기서 유래되었습니다.


당나라 이신의 동상[조선 개국공신 윤호와 고려 공민왕] 당나라 이신의 동상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재위한 지 2년째 되던 1393년.


조선 개국의 2등 공신이자 문무를 겸비했던 판삼사사 윤호가 명나라로 가던 중 사망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태조 2년(1393)


하성절사賀聖節使인 판삼사사判三司事 윤호尹虎가 금암역金巖驛에서 졸卒하였다. 부고訃告가 들리니 임금이 3일 동안 조회를 정지하게 하였다 ... 일찍이 공민왕대에 벼슬하였는데, 공민왕이 그와 더불어 바둑을 두니, 윤호(조선 개국공신 2등)는 이기지 아니하였다.


(공민왕이)명하여 옛날의 시詩를 써서 바치게 하니, 곧 당唐나라 이신李紳의 독이사전시讀李斯傳詩를 써서 바쳤다.


(欺暗尙不然 기암상불연), 어두운 곳을 속이는 일도 그렇지 못할 것인데,

(欺明當自戮 기명당자륙), 밝은 곳을 속이는 일은 마땅히 제 손으로 죽어야 할 것이다.

(難將一人手 난장일인수), 한 사람의 손으로서는

(掩得天下目 엄득천하목), 천하의 눈을 가리기가 어렵겠구나


공민왕 시절의 윤호는 일부러 바둑에서 지고 위와 같은 시를 읊었습니다.


이 시를 읊은 건 1373년, 공민왕 재위 22년째 되던 해로서, 공민왕이 시해당하기 이전해에 해당합니다. 아마도, 윤호는 평소에 담아 두었던 속마음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게 아닐까요. 공민왕은 재위 초반과는 다르게 말년엔 자제위들에게 후궁들을 겁탈해 아이를 낳도록 강요했습니다.


공민왕과 인덕왕후(노국대장공주)[조선 개국공신 윤호와 고려 공민왕] 공민왕과 인덕왕후(노국대장공주)


그 이외에도 기괴한 행보를 답습하는데, 이런 공민왕에게 정신 차리라는 일갈을 날렸던 건 아닐지요.


물론, 왕에게 너무 심한 표현이지 않을까 ... 싶은 생각도 듭니다. 실제로도 윤호는 이 시를 읊은 이후에 양광도 도순문사都巡問使로 가게 됩니다. 공민왕이 윤호를 껄끄럽게 여겨, 저 멀리 지방으로 발령을 내린 셈이죠.


진나라 이사가 좋은 정책 시도에 대해선 좋은 평가를 받을지언정, 말년의 광기에 가까운 독재에 대해선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합니다.


공민왕도 재임 초반에 보여줬던 기씨 일가의 숙청과 원으로부터의 독립 등,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겠으나, 말년의 광기에 대해선 비난받아 마땅합니다. 윤호가 언급한 독이사전시는 이사를 향해 지어진 시지만, 고려 말기엔 공민왕에게 향하는 화살이 되었습니다.


말년에 공민왕에게 광기가 없었다면, 윤호는 조선의 개국 2등 공신이 되었을까요.


윤호, 조선 개국공신을 몰랐던 고려 공민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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