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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조가 아끼던 번암 채제공 유물들 (수원화성박물관)

믿을만한 건강정보 2017. 11. 3. 04:57

조선 정조가 아끼던 번암 채제공 유물들 (수원화성박물관)


채제공 번암집 수원유수 호패 초상[조선 정조 측근 번암, 수원화성박물관] 어정범례


※ 이 포스트에서 수원화성박물관에서 찍은 사진과 소개글을 정리합니다.


번암집 어정범례樊巖集御定凡例

정조가 채제공의 문집인 번암집 원고의 편차를 정해 준 어정범례이다.


1799년(정조 24) 1월에 채제공이 세상을 떠나자 그해 가을에 문인門人인 정약용丁若鏞과 이가환李家煥 등이 유고를 교정하였다.

이듬해 정조는 번암집 편집과 관행에 큰 관심을 갖고 유고를 여러 차례 살펴보고 직접 문집의 범례凡例를 지어 주며 문집을 편집하는 기준으로 삼게 하였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임금이 신하의 문집에 범례를 제정해 준 것은 매우 드문 일로 채제공에 대한 정조의 높은 관심과 애정을 느낄 수 있다.


수원화성박물관 채제공 번암집[조선 정조 측근 번암, 수원화성박물관] 전령


수원유수에게 장용외사를 겸하라는 전령

정조는 1789년(정조 13) 사도세자의 원침園寢인 현륭원顯隆園을 수원부로 이장하고 1793년(정조 17) 장용영壯勇營을 내외영으로 구분하여 수원부에 외영外營을 신설하며 수원을 친위 지역화하기 시작하였다.


1793년 1월 12일 정조는 수원부사水原府使를 유수留守로 승격시키며 유수가 장용외사壯勇外使와 행궁정리사行宮整理使를 겸직하게 하는 직제 개편을 단행하였다. 이 전령은 바로 이날 수원유수에 제수된 채제공에게 장용외사를 겸하도록 임명한 것이다. 문서의 좌측 상단에는 정조의 수결이 있고, 인장은 사명지보施命之寶를 날인하였다.


정조 채제공 수원화성박물관[조선 정조 측근 번암, 수원화성박물관] 유서


유서諭書

정조는 채제공蔡濟恭이 74세라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수원화성 축성築城을 위한 방략을 제시하는 등 수원유수로서 책임을 다하였다고 그 노고를 치하하며 신임유수와 교대한 뒤 조정으로 돌아올 것을 명하는 내용의 유서를 내렸다.

이렇듯 정조는 수원화성 축성을 앞두고 대신에서부터 지방수령에게 이르기까지 축성방략에 대하여 물었다. 여러 신하가 축성방략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였고, 그중 채제공의 축성방략에 대하여 "늙은 재상의 글을 보고 마음이 감동되었다"라고 할 정도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1793년(정조 17) 12월 정조는 채제공을 수원화성 축성의 총책임자인 총리대신総理大臣으로 임명하였고 이듬해 1월 채제공의 감독 아래 축성이 시작되었다. 이 유서의 내용은 승정원일기와 홍재전서弘齋全書 권37에 그대로 실려있다. 유서에 날인하는 어보御寶가 없는 것으로 보아 이후에 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정조 유서 호패 채제공 조선[조선 정조 측근 번암, 수원화성박물관] 호패


채제공 호패蔡濟恭 戶牌

1758년(영조34) 발급한 채제공 호패다. 호패는 신분에 따라 재질과 기재내용이 달랐는데 속대전續大典 호전戶典에 따르면 2품 이상은 아패牙牌, 생원과 진사는 황양목패黃楊木牌를 사용하도록 하였다.


채제공 호패는 아패로 제작되었으며 앞면에 새겨진 경자생庚子生, 계해문과癸亥文科는 출생년도인 1720년(경자년, 숙종 46), 문과 급제 연도인 1743년(계해년, 영조 19)을 말하며, 뒷면에 새겨진 무인戊寅은 호패를 제작한 1758년이다.


채제공은 24세 때 문과에 급제한 이후 79세에 벼슬에서 물러날 때까지 55년의 긴 세월 동안 영조, 사도세자, 정조로 이어지는 세 조정의 큰 신하였다.


수원화성박물관 전령 현륭원[조선 정조 측근 번암, 수원화성박물관] 어찰


정조 어찰正祖 御札

정조가 좌의정 채제공에게 부채를 하사하면서 내린 어찰이다.

1743년(영조 19) 24세의 나이로 문과 급제한 채제공은 강직한 성품으로 1762년(영조 38) 사도세자의 폐위를 목숨걸고 반대하여 영조와 정조의 신임을 얻었다. 정조가 부채를 하사하며 손수 써 준 이 어찰을 통해 이들의 관계가 매우 친밀하고 돈독했음을 알 수 있다.


장용영 내외영 유서 채제공 호패[조선 정조 측근 번암, 수원화성박물관] 선추


선추扇錘

선추는 부채의 고리나 자루에 다는 장식품이다. 선추 안에 향을 넣어 좋은 향기가 나도록하여 향낭香囊 또는 향합香盒이라고도 부른다. 채제공 초상 시복본에는 정조가 하사한 부채가 그려져 있는데, 이 선추는 그 부채에 달려있던 것이다.


수원화성박물관 채제공 번암집 어정범례 정조[조선 정조 측근 번암, 수원화성박물관] 초상 유지 초본


채제공 초상 유지 초본蔡濟恭 肖像 油紙 草本

채제공 65세 때 초상의 유지油紙 초본으로 오사모를 쓰고 단령을 입은 반신상이다. 초본을 그릴 때 유탄 대신 연필 같은 흑연 재료를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화면 우측에 "영의정領議政 문숙공文肅公 번암樊巖 채선생蔡先生 육십오세六十五世 초본草本"이라는 글씨가 쓰여 있어 이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시호는 사후에 하사받는 것이므로 이 글씨는 채제공 사후에 쓰여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채제공 65세 때 초상의 유지초본은 1점이 더 있고 72세 때의 것 1점이 남아 있어 유지초본은 모두 3점이 현존한다.


채제공 초상 선추 어찰 정조 수원화성박물관[조선 정조 측근 번암, 수원화성박물관] 72세 채제공 초상


채제공 초상 유지 초본蔡濟恭 肖像 油紙 草本

채제공 72세 때 초상 유지 초본이다. 선묘로 간략하게 윤곽안을 그리지 않고 먹과 담채로 마치 정본正本 초상을 그리듯 하였으며 전신이 아니라 반신상이다. 뒷면의 얼굴과 흰 창의 등에는 배채背彩 기법을 사용하여 색감이 은은하게 배어 나오도록 하였다.


단령의 어깨부분 수정을 위해 호분을 사용하였다. 이 초본은 초상화를 그리는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흥미로운 자료다. 화면 우측에는 영의정領議政 문숙공文肅公 번암樊巖 채선생蔡先生 칠십이세七十二世 초본草本이라는 제기가 쓰여있다.


좌측에는 신해辛亥(1791) 춘春 찰방察訪 이명기李命基 승명화 진상지내각이라는 기사가 부기되어 있어 이명기가 왕명으로 그린 채제공 초상이 내각에 수장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정조가 아끼던 번암 채제공 유물들 (수원화성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