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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화성 축성, 조선 실학 정약용의 거중기와 공사 실명제

믿을만한 건강정보 2017. 11. 6.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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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화성 축성, 조선 실학 정약용의 거중기와 공사 실명제


수원화성의 축성 계획

1790년 부사직副司直 강유姜游(1722~?)는 사도세자가 묻힌 곳이자 한양으로 올라가는 길목인 수원에 성곽을 쌓을 것을 정조에게 건의하였다. (수원화성 축성 시작) 


정조는 신도시 수원의 건설로 정치, 사회, 경제, 국방 전반에 걸친 개혁 의지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경험을 토대로 조선 성곽의 문제점을 해결함과 동시에 백성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한 축성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이를 위해 서학을 익힌 규장각 소속의 신진 관료인 정약용에게 축성 계획을 지시하였다.

정약용은 정조의 의중을 꿰뚫고 중국과 일본의 성제城制는 물론 중구을 통해 입수한 서양 과학 기술 서적을 연구하여 1792년 성을 쌓기 위한 이론과 기술을 정리한 보고서인 성설城說을 정조에게 올렸다.


정조가 직접 축성의 기본방향을 밝힌 어제성화주략御製城華籌略에는 정약용의 의견이 반영되어 있다.


수원화성 축성 조선 실학[조선 실학] 반계수록, 반계 유형원의 글 문집.


반계수록磻溪隨錄

조선 후기 실학의 선구자인 반계 유형원의 글을 모은 문집이다. 이 책에는 정조가 수원의 치소를 팔달산 아래로 정하는 데 영향을 준 글이 실려 있다.


조선 실학 정약용 거중기[조선 실학] 화성성역의궤 도설에 실린 거중기. 정약용 제작.


다산 정약용의 거중기 설계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조선 후기 실학의 완성자로 평가된다.


그는 실학에 관심을 가진 집안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성리학만이 아니라 토목학과 건축학도 공부하였다. 이러한 능력을 정조에게 인정받아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으로 이전할 때 한강을 건너기 위한 배다리를 설계하였고 정조의 명을 받아 수원화성 축성 계획에 참여하였다.


정약용은 기존에 있던 조선의 축성술을 총망라하고 중국과 일본 성곽의 장점을 참고하였다. 더욱이 축성의 편리한 시공을 위해 거중기, 유형거 등 여러가지 기구들을 설계하였는데, 기술자들의 안전과 효율성을 높임은 물론 축성 비용을 절감하는 효과를 거두었다.

정약용이 저술한 기중도설起重圖說에 거중기에 대하여 그림과 함께 자세한 설명이 실려있으며 1794년 화성을 건설할 때 처음으로 사용하여 상당한 효과를 보았다.


명나라 때 중국에 온 선교사 겸 과학자 요한네스 테렌츠 (Joannes Terrenz, 중국 이름 등옥함鄧玉函)가 지은 기기도설奇器圖說이 참고가 되었다.


이밖에 수원화성 축성과 관련된 정약용의 글은 성설城說, 옹설도설甕城圖說, 포루도설砲樓圖說, 현안도설懸眼圖說, 누조도설漏槽圖說, 총설總說 등이 있다.


실학자 정약용 거중기 실명제[조선 실학] 홍재전서, 성제도설


홍재전서에 실린 성제도설城制圖說

1794년(정조 18) 정조의 명령때문에 제작된 축성 관련 책은 성제도설이지만 현존하지는 않는다.


홍재전서 권180 군서표기에 따르면, 정조가 성제城制에 관한 규정을 마련하기 위해서 서영보徐榮輔(1759~1816) 등에게 명하여 성제 관련 여러 논설을 모아 그림과 함께 편집하여 성제론城制論, 성제도城制圖, 중국성제中國城制, 동국성제東國城制 각 1권씩 3권을 제작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정조는 수원화성 축성을 앞두고 성제와 관련된 연구를 체계화하여 이를 반영하고자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공사 실명제 수원화성 축성[조선 실학] 화성성역의궤 좌목


화성성역의궤 좌목華城城役儀軌 座目

1794년(정조 18) 1월부터 1796년(정조 20) 9월까지 진행된 수원화성 축성의 전 과정을 기록한 의궤 중에서 공사에 참여한 인물 명단인 좌목座目이다. 화성성역의궤 권수券首에 실려 있다.


정조의 명을 받들어 수원화성 축성을 총괄하였던 화성성역소 총리대신總理大臣 채제공의 이름이 좌목에 처음 등장한다.

현장 총감독인 감동당상監董堂上으로 조심태, 도청都廳으로 이유경, 책응도청策應都廳으로 김노성, 정동협, 홍원섭이 차례로 등장한다.


이후로는 현장 감독인 별감동, 감동, 별간역, 간역 등 다양한 직책과 명단이 이어진다.


수원화성 축성 거중기 정약용[조선 실학] 조선 정조 대왕 윤음


화성성역 공사를 중지시키는 윤음

수원화성 축성이 진행 중이던 1794년(정조 18) 전국적인 흉년이 발생하여 정조는 그 해 10월 19일 대신들과 축성 진행여부에 대한 논의를 하였다.


채제공을 비롯한 상당수의 대신들은 축성으로 구휼의 효과가 있기 때문에 공사를 진행하자고 하였으나 정조는 황정이 우선되어야 할 상황이라고 판단하였다.


정조는 신하들과 논의한 지 10여일 후인 11월 1일 유화성성역동공제신윤음諭華城城役董工諸臣綸音을 내려 수원 화성 축성을 중지시켰다.


정조는 이 윤음을 통해 축성은 언제든지 할 수 있고 10년까지 끌 수도 있으나 백성들은 잠시라도 굶주리게 할 수 없다면서 국가사업보다 백성이 더 중요하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수원화성 조선 실학 정약용[조선 실학] 반계수록, 반계 유형원의 글 문집.


체계적인 조직운영을 통한 수원화성 건설

정조는 수원화성을 체계적이고 계획적으로 건설하여 비용절감을 했으며 효율적인 조직운영을 통하여 작업능률을 높이고자 했다.


이를 위해 공사 총 책임자는 총리대신 채제공과 화성유수 조심태를 비롯하여 약 357명으로 이루어진 성역소城役所라는 임시 기구를 만들어 현장을 관리 감독하게 하였다.

성역소城役所

성역소는 수원화성 성역을 주관했던 특별기구로 총책임자인 총리대신總理大臣 채제공과 현장에서 공사책임을 맡은 감동당상監董堂上 조심태, 공사 전반의 실무업무를 주관한 도청都廳 이유경이 중심이었다.


도청 하위 조직으로 공사 관리 분야를 책임지고 있었던 것은 책응도청策應都廳인데 주로 돈이나 자재의 출납을 관리하는 일을 맡았으며, 책응도청 아래 감관監官이 있어 지시에 따라 일을 수행하였다.


서울성곽의 공사표시석[조선 실학] 수원화성 팔달문 공사실명판. 공사 책임자, 중간 간부, 기술자의 이름을 새김.


공사 기술 분야를 책임지고 있었던 것은 별감동, 별간역, 감동, 간역으로 이들은 공사의 기술적인 업무를 담당하는 감독관리였으며, 그 아래 패장으로 하여금 실질적인 관리업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기술 분야의 하부 조직에는 각종 장인匠人이나 단순한 노역자들이었던 모군慕軍이 포함되어 있어 축성 공사의 실질적인 작업을 담당하였다.


수원화성 팔달문 공사실명판[조선 실학] 수원화성 창룡문 공사실명판. 공사 책임자, 중간 간부, 기술자의 이름을 새김.


책임감을 높이기 위한 철저한 수원화성 공사실명제 추진

정조는 기술적 지식을 가진 장인을 직접 통제하는 패장이라는 직책을 두어 공사의 질을 높였다.


또 오랫동안 현장에서 일을 해온 석수와 목수들은 편수라는 이름으로 편제하여 조정에서 나온 감독관들을 도와 현장을 지휘하도록 했다.


수원화성 창룡문 공사실명판[조선 실학] 서울성곽의 공사표시석. 태조 때 경상도 경산지방 백성들이 동원되어 쌓았던 곳을 표시한 공사표시석.


기술자들을 천시하던 기존의 풍토를 없애고 국왕을 비롯한 관료들이 기술자들에 대한 우대를 실시하자 이들은 더욱 열심히 일하였다.


또한 팔달문, 장안문, 화서문, 창룡문 등 화성의 4대 문에는 공사 책임자, 중간 간부, 기술자의 이름을 새겨 공사에 대한 책임감을 높였다.


더불어 축성 공사 보고서인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에는 참여한 기술자와 일꾼들의 이름까지 모두 적어 놓아 완벽한 공사 실명제를 추진하였다.


수원화성 축성, 조선 실학 정약용의 거중기와 공사 실명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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