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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수원화성과 사도세자, 현륭원과 사도세자 유품들 (장헌세자)

믿을만한 건강정보 2017. 10. 18. 03:00

정조 수원화성과 사도세자, 현륭원과 사도세자 유품들 (장헌세자)


화산용주사 봉불기복게 탑본 정조 현륭원 사도세자[장헌세자의 친필]


정조가 공을 들여 조성한 수원화성 인근엔 사도세자의 흔적이 많습니다. 자연스레 만들어지진 않고 아들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를 그리워하여 인위적으로 조성한 것인데요.


대표적으로 현륭원과 용주사가 있습니다. 용주사엔 불설대보부모은중경이 있는데, 여기엔 부모와 자식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차있죠.


이제 소개할 아래 사진들은 수원화성박물관에서 직접 찍었습니다. 재밌게 봐주세요~


조선 후기 문화의 황금기

영조 - 장조(사도세자) - 정조의 시대


조선 후기 르네상스라 불리는 영조-장조(사도세자)-정조의 시대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가 모두 안정되고 크게 발전하여, 마치 청淸의 황금기라 불리는 강희제-옹정제-건륭제의 시대와 비견할 만하다.

정조는 왕위에 오른 후 아버지 사도세자의 명예회복을 위하여 사도세자의 묘소를 수원부 화산花山으로 옮겨 현륭원을 조성하고, 사도세자의 원찰로 용주사를 창건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화산 아래에 있던 수원부의 읍치를 팔달산 아래로 이전하여 행궁을 짓고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였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수원(수원화성이 있는 곳)이다.


영조英祖(1694~1776)

조선의 제21대 임금이자 사도세자의 아버지이다. 이름은 금昑이고 자는 광숙光叔이며 호는 양성헌養性軒또는 자성옹自醒翁이다. 숙종과 숙빈최씨 사이에서 태어난 6세 때 연잉군으로 봉해졌고 1721년 왕세제에 책봉되었다.


1724년 경종의 승하로 국왕에 즉위하여 많은 치적을 쌓았으며 재위 52년째 되는 1776년 경희궁에서 승하하였다.

재위 기간 동안 탕평책으로 정치적 안정을 이루고 민생 안정에 힘을 쏟았다. 자기 관리가 철저하였으며 사치스럽고 화려한 것을 싫어하여 평생 검소하게 살았다.


수원화성의 현륭원에 묻힌 사도세자의 아버지다.


화산용주사 봉불기복게 탑본, 정조 수원화성 사도세자[장헌세자의 친필]


사도세자思悼世子(1735~1762)

영조와 영빈이씨 사이의 맏아들로 이름은 선愃이고 자는 윤관允寬이다.


1736년 2세의 나이로 왕세자에 책봉되었고 1744년 홍봉한의 딸과 혼인했다. 1749년부터 영조를 대신하여 13년간 국정을 대리하였으나 1762년 임오화변으로 죽음을 맞이하였다.


사후에 영조는 사도라는 시호를 내렸고, 아들 정조가 즉위하여 장헌莊獻이라는 존호를 올렸다. 정조는 수원화성에 현륭원을 지어 아버지를 위로했다. 1899년 고종은 황제로 추존하여 장조莊祖라 하였다. 무예와 예술에 많은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전하며, 문집으로 능허관만고가 있다.

정조正祖(1752~1800)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사이에 아들로 이름은 성祘이고 자는 형운亨運이며 호는 홍재弘齋 또는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다. 영조와 사도세자를 비롯한 왕실의 기대와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1759년 왕세손에 책봉되었다.


1762년 김시묵의 딸과 혼인했으나 같은 해 윤5월 아버지 사도세자가 세상을 떠났다.

1775년 영조를 대신해 대리청정하였으며 1776년 마침내 조선의 제22대 임금으로 즉위하였다.


사도세자에 대한 효심이 깊어 재위 기간 동안 대대적인 추숭과 현창 사업을 추진하였다.


동궁보묵 정조 수원화성과 사도세자, 현륭원과 사도세자 유품들[장헌세자 아들 이산] 동궁보묵


동궁보묵東宮寶墨

사도세자가 8세 때 쓴 글씨를 모아 엮은 필첩筆帖이다.


표제는 동궁보묵東宮寶墨이고 내용은 해서체楷書體 큰 글씨로 쓴 군신유의君臣有義 군의신충君義臣忠 군신지분의君臣之分義이다.


말미에 첨부된 장악원첨정掌樂院僉正 이익준李益焌의 발문跋文에는 사도세자가 자신의 아들 갑득甲得에게 써 준 것을 1746년 장첩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사도세자 글씨의 필획筆劃이 정대正大하고 자체字體가 정엄精嚴하여 성덕成德의 기상氣象이 있다고 감상평을 남겼다.


현륭원 사도세자 수원화성[장헌세자 아들 이산] 장헌세자 무덤 현륭원


사도세자 무덤, 현륭원의 조성 (수원화성 인근)

조선 시대 왕실 무덤은 왕과 왕비의 경우 능陵, 세자와 세자빈 그리고 왕의 친어머니인 경우는 원園, 왕족이지만 세자가 아닌 경우 묘墓라 하였다.


양주 배봉산(현 서울시립대학교 뒷산)에 있던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은 수은묘垂恩墓로 불리며 세자로서의 예우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이는 영조가 사도세자의 장례를 치르면서 일반 왕자의 예법으로 치르라고 지시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도세자는 왕실 및 백성들에게 세자의 대우를 받지 못했고 자연스럽게 정조 역시 정통성이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정조는 1776년 3월에 즉위하면서 사도세자의 무덤을 영우원永祐園으로 격상하였고 경모궁景慕宮(현 혜화동 서울대학교 병원 내)이라는 사당도 만들었다.


그로부터 13년의 세월이 흐른 1789년(정조 13), 정조는 다시금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의 읍치가 자리 잡고 있던 화산花山으로 옮기고 이름도 현명하신 분을 융성스럽게 받든다는 의미를 담은 현륭원顯隆園으로 바꾸면서 정통성 회복을 꾀하였다.


이와 더불어 사도세자의 명복을 기원하는 왕실원찰인 용주사龍珠寺를 창건하였다.


융릉 명칭 변천


 

 1762년(영조 38)

 1776년(정조 즉위)

 1789년(정조 13)

 1899년(광무 3)

 능호 :

 수은묘垂恩墓

 영우원永祐園

 현륭원顯隆園

 융릉隆陵

 사당 :

 수은묘垂恩廟

 경모궁景慕宮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정조[장헌세자 아들 이산] 조선 시대 비극


사도세자의 권위 회복 추진


嗚呼, 寡人思悼世子之子也

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1776년 3월 10일 즉위한 날 정조가 신하들에게 한 말이다.


영조는 세손이 정치적 대립 구도 속에서 뒤주에서 죽은 사도세자의 아들로 남아 있으면 왕위 계승이 어려울 수 있다고 판단하고 세손을 일찍 죽은 첫째 아들 효장세자(훗날 진종, 1719~1728)의 아들로 입적시켰다.


그러나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자신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라고 공표하였다. 이는 생부 사도세자의 정통성을 복권하기 위한 준비이자, 반역죄로 죽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처지 때문에 발생할지도 모를 왕위의 정통성 문제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정치적 시도였다.


따라서 정조는 아버지에게 장헌이라는 새로운 존호를 올리고 영우원과 경모궁의 격상, 현륭원 조성 등 사도세자 추숭 사업을 착실히 진행해 나갔다.

장조 추존 연표


 1762년(영조 38)

 1776년(정조 즉위)

 1899년(광무 3)

 사도세자思悼世子

 장헌세자莊獻世子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

 혜빈惠嬪

 혜경궁惠慶宮

 헌경의왕후獻敬懿王后


어제 화산용주사 봉불기복게 탑본 정조 용주사[장헌세자 아들 이산] 어제 화산용주사 봉불기복게 탑본


어제 화산용주사 봉불기복게 탑본 (수원화성 인근)

1795년(정조 19) 정조가 용주사에 내린 기복게 목판의 탑본이다.


내용은 용주사에 부처를 모시고 복을 기원하는 것이다. 정조는 불교에 대한 관심을 특별히 나타내지는 않았으나, 이곳 용주사에 대해서는 부처님의 은덕을 칭송하는 기복을 함에 있어 주저함이 없었다.


봉불기복게는 불교식 가사체의 글인데, 부처님 자비로 백성을 깨우치고자 하는 염원과 사도세자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내용이다.


불설대보부모은중경 현륭원 용주사[장헌세자 아들 이산] 불설대보부모은중경


불설대보부모은중경 아비무간지옥 정조 현륭원[장헌세자 아들 이산] 불설대보부모은중경


불설대보부모은중경佛說大報父母恩重經

현륭원의 원찰 용주사에서 간행된 불설대보부모은중경 목판본이다.


불설대보부모은중경에는 부모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10가지로 제시하고, 그 은혜를 갚기 위한 어려움을 8가지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또한, 보은報恩의 방법으로 타인에게 베풀고 진리를 실현하면서 살 것을 권하며, 불효했을 때 받게 되는 업으로 아비무간지옥阿鼻無間地獄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ps. 본문의 표 2개 그림 파일은 아래에 있습니다.



정조 수원화성과 사도세자, 현륭원과 사도세자 유품들 (장헌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