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역사

칠종칠금, 제갈량의 남방 정벌과 촉나라의 기초 확립

믿을만한 건강정보 2016. 11. 4. 04:03

칠종칠금, 제갈량의 남방 정벌과 촉나라의 기초 확립


삼국지연의에 의해 널리 소개된 제갈량의 칠종칠금 고사는 소설 형식으로 각색되어 사실과는 다른 점이 많다. 이 칠종칠금 문제를 다룬 사서로는 정사 삼국지와 동진 시대 상거가 편찬한 화양국지의 남중지南中志, 그리고 당나라 시대 번작이 편찬한 만서蠻書가 전부다. 그러나 이들의 기록은 매우 간단하다.


특히 삼국지에는 후주(유선), 여개, 양흥, 마량, 이회 등의 열전에 흩어져 있을 뿐이다.


인구에 회자하는 이 사건을 주도한 제갈량의 열전의 칠종칠금은,


"건흥 3년 봄 제갈량이 무리를 이끌고 남정에 나섰고 그해 가을 모두 평정했다.


그곳으로부터 군사자금이 나오게 되어 나라가 부유하게 되었다. 이에 군사를 정비하여 대거大擧(북벌)를 기다렸다."


가 전부다.

227년 북벌을 위해 출정할 때 쓴 출사표에,


"5월에 제갈량이 노수를 건너 깊이 불모의 땅에 들어갔다."


고 되어 있을 뿐이다. 정작 칠종칠금이란 말은 동진 시대 역사가 습착치가 저술한 한진춘추에 비로소 나온다. 즉,


"칠종칠금의 전략을 구사하여 맹획의 심복을 받고 전지에 이르러 남중이 완전히 평정되었다."


고 되어 있다.


칠종칠금. 맹획의 항복을 받는 제갈량


위와 같은 영성한 자료를 가지고 당시 전투 지점을 확인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사실 똑 부러지게 어디라고 말할 수 없는 까닭으로, 중국인들의 제갈량과 인연대기 경쟁에서 나타난 위조 사적들이 각처에 즐비하기 때문이다. 남중 반란의 원인과 칠종칠금의 이유가 과연 어디에 있었는가가 사실문제다.


잘 알다시피 사료는 모두 중국 측에서 쓴 것이다. 중국 측 기록에는 이른바 반란을 주도한 익주군 대성 옹개를 따르는 자가 별로 없었다고 되어 있다.


때문에 옹개는 남중 사람들에게 이 지역에서 조달할 수 없는 물건인,


"앞가슴이 검은 오구烏狗 300두와 진드기의 뇌 3두, 삼장 길이의 단목(토막 나무) 3,000근을 관부(촉나라 중앙 정부)에서 요구하고 있다."


거짓 선전하며 반란을 획책한 것으로 되어 있다.


즉 진드기의 경우 몸길이가 겨우 1~2mm 정도인데 3두라는 양을 채우기란 불가능한 일이고, 단목이라는 것도 운남에서는 생산되지 않는 것이다. 옹개가 패권을 획득하기 위해 속임수로 민중을 자극한 자작극이라는 것이다.


옹개측의 기록이 없는 이상 이것도 일방적인 주장일 따름이다. (제갈량의 칠종칠금도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의미)


최근 중국 학계에서는 이수인 맹획을 한족 대성이라고 강변하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그가 한족이어야 이 전쟁이 민족 간의 모순이 아니고 계급 모순의 소산이었다는 체제 이념과 맞기 때문이다. 실로 망발이 아닐 수 없다.


타사대왕과 전투를 치루는 촉군


또 학계에서는 소위 5월에 노수를 건넜다는 구절과 유명한 만두 고사를 생성시킨 것으로 알려진 9월 칠종칠금 후 회군 시의 도강 지점이 어디인가를 두고 쟁론이 벌어진 적이 있다.


당시 노수는 지금의 금사강을 가리키는 것임이 분명한데, 금사강은 현재 사천성 의빈宜賓 상류와 장강의 최상류인 통천하通天河 사이의 장강을 일컫는 말로 그 길이가 매우 길다. 제갈량은 성도를 출발하여 민강 하류를 지나 안상安上(사천 병산屛山), 월수로 나가 비수를 거친 후 고정을 공격한 것으로 짐작된다.

노수에는 많은 나루터가 있지만, 현재 대강 세 가지 견해가 제시되어 있다.


첫째, 현재의 사천 회리현會理縣,

둘째 운남 교가현巧家縣,

셋째, 사천 반지화시攀枝花市 일대가 그것이다.


이런 쟁론이 벌어진 것은 죽은 제갈량이 산 운남 사람들을 먹여 살리기 때문이다.


남정군의 회군시 도강 지점은 어디


제갈량이 지난 곳으로 인정되면 관광객이 모이고, 그들은 위안화를 풀어놓고 가기 때문이다.


삼국지연의가 동아시아인에게 끼친 영향은 실로 막대하다. 칠종칠금이라는 말도 한진춘추에서 처음 나왔다는 것을 이미 지적했지만, 이 책의 저자 습착치야말로 실로 말이 안 되는 촉한정통론의 최초 주창자였다는 사실에 근거한다면, 이것도 촉한을 드러내려는 과정에서 출현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사실 3월 출정, 5월 도노, 추평사군의 기사를 믿는다면 제갈량은 4개월간 남중에서 전쟁을 치른 셈인데, 그토록 짧은 기간에 칠종칠금이 과연 가능했겠는가.


그러면 그가 맹획과 전쟁을 치른 지점은 어디일까?


과거에 가장 유행했던 설은 대리의 천생교天生橋 부근이었다.


삼국지연의를 보면 사금사종 후 제갈량은 여개의 의견을 받아들여 서이하西洱河 위에 죽교竹橋를 만들어 건넜다고 되어 있다. 서이하는 중국 7대 담수호인 이해의 유일한 출구로 물살이 매우 급하기로 유명하다.

현재 대리백족자치주 입구인 하관시下關 서북의 서이하 변에 반원의 큰 돌이 있는데, 이것이 제갈량이 건너 맹획을 생포한 곳이라고 한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한나라 제갈무후가 맹획을 잡은 곳漢諸葛武侯禽孟獲處이라는 9자의 해서로 새겨진, 청대인이 세운 석비가 있었다고 한다. (현재 대리 이해공원 안으로 옮겨져 있다.)


그곳이 오금맹획의 장소라는 것이다.


구룡산 기슭의 제갈정 2


그러나 이런 주장은 상상하기 힘들다는 견해가 있다.


왜냐하면, 대리는 당시 전서 영창군 태수 여개의 세력 범위 아래에 있었던 곳인데, 앞뒤로 협공당할 것이 뻔한 그곳에 맹획이 갔을 리 만무하다는 이유에서다. 칠종칠금 자체가 일어날 수 없다는 뜻이다.


대신 최근 가장 유력한 전쟁터로 부상한 곳이 맹획의 고향 건녕, 즉, 운남성 곤명에서 동북 167km에 위치한 운남성 제2 도시인 곡정 일대다.


구룡산 기슭의 제갈정 1


이 일대에는 제갈량에 얽힌 전설이 많다. 곡정 성북 5km 지점의 백석강白石江 강변에는 제갈량과 맹획이 회맹했던 광경의 부조도浮雕圖가 대형 대리석 위에 그려져 있다.


1987년에 완공된 이 그림에는 100여 명의 이한夷漢 인물과 60여 종의 금수, 그리고 장려한 산천이 그려져 있다. 또 곡정 시내에는 제갈가諸葛街가 있으며, 성 밖 구룡산九龍山 기슭에는 제갈정諸葛井이 있는데, 독수毒水 두 자로 된 석비가 세워져 있다.



출처 : 영웅시대의 빛과 그늘, 박한제, 사계절

칠종칠금, 제갈량의 남방 정벌과 촉나라의 기초 확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