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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이 맹획을 제압한 이유, 칠종칠금 원인

믿을만한 건강정보 2017. 10. 19. 01:00

제갈량이 맹획을 제압한 이유, 칠종칠금 원인



이것은 잘 알다시피 맹획이 독룡동의 동주 타사대왕의 도움을 얻어 제갈량의 군대와 대적할 당시 물을 마시면 벙어리가 되고, 살이 타서 시커멓게 변한 후 썩으며, 몸이 솜처럼 힘이 없어진다는 독천이 있던 곳이란다.


또 곡정을 한때 둔하屯下라고 하였는데, 제갈량이 맹획을 정복하고 이곳에 둔전을 열고 선진 문물을 전파한 곳이라는 뜻이다.

이처럼 곡정 일대가 현재 중국인에게는 칠종칠금의 고사가 얽힌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삼국지연의를 보면 이 독룡동이라는 곳도 서이하 근방으로 묘사되고 있으니 작가 나관중의 지리 지식은 우리를 매우 혼란스럽게 한다.


삼국지연의에는 많은 동굴이 나온다.

맹획이 마지막으로 오과국의 국주 올돌골의 도움을 얻어 일곱 번째 전투를 벌인 곳이 바로 반사곡의 전투다.


제갈량의 남중 정벌도[칠종칠금] 제갈량의 남중 정벌도


제갈량이 가장 많은 살상을 감행하여 오과국 인민으로 살아남은 자가 거의 없어 그가 회한의 눈물을 자아내게끔 한 맹획과의 이 전투의 현장감을 곤명 남방 관광지 석림石林에서 느낄 수가 있었다.


석림은,


"사방을 돌아보니 매복할 만한 수풀이 없고 보이나니 석산이요, 석벽이요, 석곡이다."


라는 삼국지연의의 칠종칠금 묘사를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여하튼 제갈량의 남정이 후세에 미친 영향은 컸다. 남정 후 제갈량은 그곳을 확실하게 장악하기 위해 이 지역의 군현화에 힘을 쏟았다. 먼저 사천 성도의 또 다른 이름은 익주라는 군의 명칭부터 없앴다. 대신 건녕군으로 하고는 군 소재지를 전지에서 미현으로 옮겼다.


또 운남군과 흥고군을 신설하는 등 이전의 남중 5군을 7군으로 조정하였다. 그중 건녕, 주제, 영창, 운남, 흥고 등 5군은 현재의 운남성 경내에 두었다. 그리고 사천 남부에 둔 월수군, 귀주성 서북부에 둔 장가군을 서남이 지역에 넣어 모두 9군으로 편성하여 칠종칠금을 완성하였다.

동시에 제갈량은 이회를 건녕군 태수로, 여개를 운남군 태수로, 영창군승이었던 왕항을 영창군 태수로, 마충을 장가군 태수로 임명했다. 맹획 등 대성, 이수들은 남중에서 분리해 촉한 정권 내로 흡수했다. 맹획을 어사중승, 맹염을 보국장군, 찬습을 영군장군으로 기용한 것이 그러하다.


한나라 때 서남이에 설치한 군현제보다 훨씬 합리적으로 편성되고 중앙 조정이 조종할 수 있게 됨으로써 중앙집권이 어느 정도 가능해졌다.


또한, 옹개, 고정 등이 거느리던 경졸청강 1만여 가를 성도로 사민 시키고, 그들을 오부군五部으로 편성하여 위나라 정벌건의 중요 부분으로 활약하게 했다. (칠종칠금이 아니었으면 이룰 수 없었던 부분)


한편 약자들은 군량미 생산을 위해 둔전민으로 투입했다. 제갈량은 건녕군 미현에 오부도위五部都尉를 두어 둔전 사무를 관리케 하니, 이로써 전지 지구가 남중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이 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즉, 곤명이 운남의 새로운 중심지로 떠오른 것이다.


한나라 제갈무후가 맹획을 잡은 곳[칠종칠금] 한나라 제갈무후가 맹획을 잡은 곳


남정 후 3년만은 228년, 제갈량은 제1차 위나라 정벌을 위해 출사한다. 맹획을 위시한 남중의 촉한 편입은 남안, 천수, 안정 등 현재 감숙성 남부에 포진한 3군에 분포하고 있던 저강 세력을 우군으로 삼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천수 지구의 정치 대표인 강유를 받아들이고 그 이듬해 제갈량은 저강의 항복을 받고 무도, 음평 2군을 얻었다.


이로써 촉한 정권은 기본적으로 저강과 서남이가 분포하는 농, 촉, 전 세 지구를 통일하여 촉나라의 국가적 기초를 확립한 것이다.


출처 : 영웅시대의 빛과 그늘, 박한제, 사계절

제갈량이 맹획을 제압한 이유, 칠종칠금 원인